〈쇼코의 미소〉
최은영 지음
문학동네 펴냄
사는 일이란 늘 그런 식이다. 어제까지 멀쩡하게 잘 쓰던 우산이 꼭 필요한 오늘 고장나버리는 방식으로 굴러간다. 새 우산을 살 돈도 없던 어느 날, 할아버지가 ‘나’의 자취방에 약속도 없이 찾아온다. 마치 문병이라도 온 양 비타민 음료 한 박스를 들고. 기차를 타고 다시 또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온 이 늙은 사내는 갑자기 내린 비를 고스란히 다 맞은 채였다.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걸 사내답지 않다고 여기는 시대를 살아온 퉁명한 사람에게도 사랑의 마음이 있고, 마음은 어떻게든 비어져 나와 그런 식의 흔적을 만든다. 표제작 〈쇼코의 미소〉는 그 흔적에 대한 이야기다. 뒤늦게 도착한 서툰 마음조차 통역이 필요한, 가깝고도 먼 가족에 대한 이야기.

대단한 사건 없이도 이야기는 굴러간다. 이 소소하고 담담한 글이 일정한 무게를 지니고 ‘힘 있게’ 읽히는 건 무엇 때문이었을까. 표제작을 시작으로 책에 실린 단편 일곱 편을 한 달에 걸쳐 순서대로 천천히 읽었다. 저릿한 마음을 책갈피 삼아 한참 동안 책을 펼쳐두고 훌쩍이던 밤도 있었다. 〈미카엘라〉와 〈비밀〉을 읽으며 특히 그랬다. 소설이 현실의 ‘사건’을 기록하는 방식이란 무엇이며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했다. 세계와 사회를 굴러가게 만드는, 그러나 결국 어디에도 공식적으로는 기록되지 못할 얼굴들이 소설이라는 형식 덕분에 생명력을 얻었다. 이념이나 주의를 설명하지 않고도, 유대와 환대가 무엇이어야 하는지 드러낸다.


부드럽지만 집요한 소설의 세계를 경험하는 동안 현실의 나는 세상에 대한 내 몫의 책임에 관해 생각했다. 좋은 소설이란 마땅히 그런 법이다. 그래서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때로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아무것도 몰랐던 거, 미안해”라고(〈신짜오, 신짜오〉, 86쪽). 윤리는 무지를 자각하는 자리에서 생겨난다. 〈쇼코의 미소〉는 내가 만난 올해 가장 아름다운 소설이다.

기자명 장일호 기자 다른기사 보기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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