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군 ‘위안부’ 기림비(Memorial)를 세우기 위한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퍼뜩 든 생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또?’, 다른 하나는 ‘과연 제대로 될까?’. 그동안 여기저기서 ‘위안부’ 소녀상이나 기림비를 세운다는 뉴스가 나왔지만 미국 로스앤젤레스 인근 글렌데일처럼 시 차원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공공부지에 만들어진 경우는 드문 데다, 아베 정부 출범 이후 일본 측의 방해 공작이 더욱 거세지면서 계획 자체가 무산되는 사례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만 해도 경기도 수원시와 자매결연을 한 독일의 프라이부르크 시가 소녀상을 세우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가 일본 자매도시 등의 반대로 철회한 바 있다.

하지만 이런 의구심은 이 운동을 이끌고 있는 중국계 두 여성 릴리안 싱과 줄리 탕을 만난 후 사라졌다. 각각 30년 이상 샌프란시스코에서 판사로 일한 두 사람은 지난해 4월 샌프란시스코에 ‘위안부 기림비 건립을 위한 정의연대(Comfort Women Justice Coalition·CWJC)’를 만들어 공동 의장으로 취임한 후 판사직에서도 물러났다. 본격적인 활동을 위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데다 공적인 자리에서 목소리를 낼 기회도 많아졌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주도한 샌프란시스코 ‘위안부’ 기림비 건립 계획은 이미 중반을 넘어섰다. 기초가 되는 결의안이 지난해 9월 시의회를 통과했고, 기림비 건립에 필요한 모금액도 당초 목표로 삼았던 40만 달러를 거뜬히 넘어섰다.

ⓒ연합뉴스지난해 9월22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시의회가 ‘일본군 위안부 기림비 건립 촉구 결의안’을 통과시킨 직후 ‘위안부’ 생존자 이용수 할머니(가운데)와 줄리 탕(왼쪽에서 두 번째)·릴리안 싱(왼쪽에서 네 번째) 등이 함께 기뻐하고 있다.
릴리안 싱과 줄리 탕은 10월16일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 내 ‘위안부’ 피해자 지원 방안 등을 현지 활동가들과 논의한 뒤 10월24일부터 일주일가량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다. 이 방문에는 CWJC 집행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김현정 ‘가주(캘리포니아 주)한미포럼’ 사무국장 등이 동행할 계획이다. 10월4일 이들을 만나 그간의 진행 경과와 이번 한국 방문의 목적 등을 물었다.

샌프란시스코에 ‘위안부’ 기림비를 건립하겠다고 나선 이유가 궁금하다.

릴리안:판사 생활을 하면서 ‘정의’의 중요성을 절감했고 가해자의 사과가 피해자의 상처 치유에 얼마나 절실한지도 깨달았다. 일본은 그 끔찍한 전쟁범죄를 저지르고도 사과는커녕 범죄 자체를 부인하는 것으로 일관하고 있다. 일본이 아무리 발뺌하려 해도 역사를 덮을 수는 없다. 전쟁범죄의 반인륜성을 보여주고, 여성과 어린이에게 특히 가혹한 전쟁범죄가 더 이상 자행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후세에게 교육하기 위해서라도 ‘위안부’ 기림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줄리:그동안 난징대학살 문제를 알리는 데 전념해왔는데 지난해 난징대학살 자료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일본은 난징대학살에 대해서도 발뺌을 해왔는데 유네스코에 등재되면서 역사적 사실로 길이길이 남게 됐다. 그래서 이제는 ‘위안부’ 문제에 집중해야겠다는 생각에 정의연대를 만들었다.

기림비 설립은 어느 정도 진척되었나?

릴리안:지난해 9월 관련 결의안이 샌프란시스코 시의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시에서 부지를 제공했고 나머지 비용은 모금을 통해 마련 중이다. 내 헤어디자이너도 25달러를 기부하는 등 많은 시민이 동참해 40만 달러 이상을 모았다. 여기에는 한국 커뮤니티가 모은 10만 달러도 포함되어 있다. 지금은 건축안을 공모 중이고, 5명 심사위원이 당선작을 확정하면 공사가 시작될 것이다. 바라건대, 내년에는 이 계획이 마무리되어 판사직으로 복귀했으면 한다(미국은 판사 정년이 없고 퇴임했다가 다시 돌아갈 수도 있다).

미국 내 중국 커뮤니티가 ‘위안부’ 문제에 적극적인 게 인상적이다.

줄리:대다수 중국인이 일본의 전쟁범죄에 대한 나쁜 기억과 감정을 가지고 있다. 중일전쟁 당시 난징대학살, 741 부대, 화학전 등 일본의 죄악이 워낙 광범위하고 잔인해서 가족이나 이웃, 친척 등 피해자가 없는 집이 거의 없다. 그런 사연들을 제각기 가지고 있는데 일본이 안 했다고  잡아떼니 다들 화가 나는 거다.

기림비 추진 과정에서 일본 측의 방해는 없었나? 글렌데일에서는 소녀상을 철거하라는 소송이 진행 중이고, 독일의 한 시장은 소녀상을 세우겠다고 했다가 일본 측 압력으로 취소하기도 했다.

릴리안:공청회가 열릴 때마다 일본계나 이들의 로비를 받은 인사들이 몰려와 반대 의견을 개진하고 시의원·교육위원 등 결정권을 가진 이들에게 메일과 로비 공세 등을 펴곤 했다. 지난해 9월 시의회 공청회 때는 고이치 메라라는 USC(서던캘리포니아 대학) 교수가 이용수 할머니 면전에서 할머니의 증언이 거짓이라고 공격을 해서 분위기가 험악했는데, ‘내가 산증인인데 무슨 소리냐’라는 할머니의 반박과 ‘부끄럽게 생각하라’는 한 시의원의 호통 등으로 오히려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그 일본 교수가 글렌데일 소송도 제기했다.

줄리:아베가 2015년도에 해외 홍보비를 3배로 늘려 5억 달러를 퍼붓고 있다던데 그 돈의 위력이 곳곳에서 발휘되고 있다. 미국 교과서를 만드는 맥그로힐이라는 출판사가 낸 책에 ‘위안부’ 관련 내용이 한 문단 들어갔는데 일본 측 인사들이 그 글을 쓴 교수를 직접 찾아가 빼달라고 했다더라.

캘리포니아 주 공립 교과서가 ‘위안부’ 내용을 담기로 했음을 알리는 공식 사이트에 지난해 말 발표된 한·일 외무장관 합의 내용이 링크된 것도 일본의 로비 때문인가?

줄리:공개적인 방해 활동도 있지만 문 뒤에서 하는 로비가 훨씬 많다(이와 관련해 인터뷰에 배석한 김현정 CWJC 집행위원은 “캘리포니아 교과서에 ‘위안부’ 관련 내용을 넣으려는 캠페인은 가주한미포럼이 주도적으로 진행해왔고 그것이 성과를 내 2017년 가을 학기부터 미국 학생들에게 가르치기로 교육과정안이 마련됐다. 이제는 어떤 내용을 어느 정도 수위로 교과서에 넣고 가르칠 것인지 구체적인 커리큘럼을 논의할 단계인데, 이를 앞두고 한·일 외무장관 합의가 나와서 상황이 많이 어려워졌다. 일본 측 인사들이 이 합의 내용을 근거로 ‘다 끝난 일’이라며 미국 교육위원·시의원들을 설득 중이다”라고 덧붙였다).

지난해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한·일 외무장관 합의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나?

릴리안:판사들은 일단 문서를 보고 그 법률적 효력 등을 따지는 게 몸에 배어 있다. 그래서 한국 정부 쪽 인사들에게 “도큐먼트(합의문서)가 있느냐. 그러면 좀 보여달라”고 했더니 “문서가 있다”는 말만 반복하고 정작 내놓지는 못하더라. 결국 한·일 외무장관끼리 한 얘기일 뿐, 피해자들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결코 동의할 수도 없는 합의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줄리: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위안부 문제는 한·일 간 정치적 어젠다가 아니라 국제 인권의 문제라는 것이다. 피해자가 중국·타이완·인도네시아·필리핀 등 10여 나라에 걸쳐 20만명이 넘는데 한·일 외무장관이 합의한다고 역사가 ‘불가역적’이 되고 다 끝날 문제인가.

한국에 가면 이런 메시지를 전할 생각인가?

릴리안:기림비를 만들면 여행사들이 샌프란시스코 투어 코스 중 하나로 넣고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데리고 현장학습을 나오도록 만들 계획이다. 이런 계획을 한국 사회에 알리고 동참해줄 것을 요청하려 한다.

줄리:중국에 들러서는 중국 ‘위안부’ 피해자를 발굴하고 지원하는 방안 등을 중국 활동가들과 논의할 예정이다. 지금까지 위안부 문제는 한국 피해자들과 시민사회가 주도적으로 이끌어왔고 중국에서는 피해자 등록조차 받지 않았는데, 중국 피해자들이 극심한 빈곤에 처해 있는 등 상황이 매우 좋지 않다고 한다. ‘위안부’ 문제는 어느 한두 나라의 문제가 아니라 국제적인 인권 이슈다. 한국 이외 피해자들의 적극적 연대가 필요하다.

이 지역 출신인 마이크 혼다 의원(하원)이 미국 의회에서 ‘위안부’ 결의안 통과를 주도했다. 이 일로 오는 11월에 치러지는 재선 가도에 빨간불이 켜졌다고 들었다.

줄리:혼다를 눈엣가시로 생각하는 일본 측이 혼다의 상대 후보를 적극 지지하고 후원금을 몰아주면서 혼다가 예비선거에서 졌다. 11월 본선거에서는 꼭 이겨야 하는데 그러려면 지지자들의 적극적인 투표와 후원이 필요하다.

기자명 이숙이 기자 다른기사 보기 sook@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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