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7월3일 밤 자정, IS의 수도인 시리아 북부 라카에 미국의 정예 델타포스 요원 20여 명이 낙하산을 타고 침투했다. 미국인 인질이 억류된 것으로 추정되는 정유 공장을 급습했지만 작전은 실패했다. 정보가 잘못되었는지 인질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미군이 구출하려던 인질은 제임스 라이트 폴리(당시 40세)였다. 미국 국적의 프리랜서 기자인 폴리는 2011년 11월 시리아 현지에서 실종되었다. 결국 그는 구출되지 못하고 IS가 공개적으로 참수한 최초의 미국인이 되었다.

2014년 8월19일, IS의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 계정에는 ‘미국에 보내는 메시지’라는 제목의 4분짜리 동영상이 실렸다. 폴리를 참수하는 끔찍한 장면이었다. 영상에서 폴리는 “미국의 이라크 공습을 중단해달라”는 내용의 메시지를 읽었다. 그러자 그의 옆에 있던 검은 복면을 쓴 남성이 폴리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 뒤이어 역시 미국인 기자인 스티븐 소트로프(당시 31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미국 정부의 태도에 그의 처형 여부가 결정될 것이라며 위협한다. 2주 뒤 소트로프 기자가 무릎을 꿇은 채 참수당하는 동영상이 인터넷에 떴다.

ⓒ유튜브 영상 갈무리IS가 유튜브에 올린 미국 프리랜서 기자 제임스 라이트 폴리(왼쪽) 참수 동영상.
이후에도 외국인 인질의 처형은 계속되었다. 미국의 이라크 공습이 처형 이유였다. 2014년부터 IS가 점차 영토를 넓혀가며 외국인 전사를 모으자 이라크 정부는 다급해졌다. 결국 미국에 군사 개입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망설이던 미국은 IS가 모술 댐을 장악하고 소수민족인 야지디족을 학살할 기미가 보이고 나서야 움직였다. 미국의 공습에 IS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아무리 IS라 하더라도 세계 최고의 화력에는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IS가 반격 카드로 들고나온 것이 바로 인질 참수였다.

IS의 전략은 교묘했다. 유튜브를 이용해 전 세계에 영상을 삽시간에 뿌렸다. 외국인, 그것도 미국인 기자를 참수함으로써 홍보 효과를 극대화했다. 미국 정부가 ‘테러집단과는 협상을 하지 않는다’라는 원칙을 고수했지만 상관없었다. 이미 전 세계에 존재를 각인시키지 않았던가. 지금도 IS는 SNS를 통해 7개 언어로 된 각종 메시지와 전투 사진 등을 실시간으로 배포한다. 폴리를 참수할 때 동원된 복면 대원은 ‘지하디 존’이라 불리는 영국 국적자 무함마드 엠와지였다. 그는 1988년 쿠웨이트에서 태어나 6세 때 영국으로 이민갔고, 런던 웨스트민스터 대학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전공했다. 영국 국내정보국(MI5)과 국외정보국(MI6)은 발칵 뒤집혔다. 필립 해먼드 영국 외무장관은 “극악무도한 가해자를 영국이 키워냈다고 생각하니 끔찍하다”라고 한탄했다. 2015년 11월12일 미국 정부는 지하디 존이 시리아의 라카에서 드론 공격을 받아 사망했다고 밝혔다.

ⓒAP Photo2014년 9월 미국은 최강의 전투기로 꼽히는 F22 랩터 스텔스기를 동원해 시리아 라카를 공습했다.
IS는 인질을 죽일 때마다 오렌지색 죄수복을 입힌다. 미국이 쿠바에서 운영하는 관타나모 죄수복과 같은 색상이다. 이라크 전쟁 후 이 수용소에서 이슬람 죄수에 대한 고문과 불법 감금 등 인권 유린 문제가 불거졌다. IS는 관타나모와 똑같은 대우를 미국인에게 돌려준다는 명분으로 이슬람권의 환심을 사려 했다. 참수 영상에는 이처럼 여러 가지 고도의 계산이 깔려 있다.

IS는 따로 미디어팀을 운영한다. 이들은 할리우드 영화에나 나올 법한 컴퓨터 그래픽 기법까지 구사한다. 이들이 만든 영상 중 압권은 생포된 요르단 조종사를 화형에 처하는 장면이다. 역시 오렌지색 옷을 입은 조종사를 철창 안에 가두고 웅장한 음악을 틀었다. 카메라 여러 대가 세팅되어 여러 각도로 처형을 지켜볼 수 있게 만들었다. 전직 IS 대원 요세프는 “IS 전투에는 반드시 자체 카메라맨이 따라간다. 전투 장면을 촬영하고 편집하기 위해서다”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막장 드라마를 보듯 욕하면서도 이런 자극적인 영상에 빠져들곤 한다.

참수 전략으로 세계가 반(反)IS로 돌아서자 웃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이다. 시리아 내전이 시작된 뒤 그는 희대의 폭군이자 살인마 같은 이미지였다. 자기보다 더 비난받는 악당의 등장이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시리아 정부는 내전 초기부터 반군을 ‘테러리스트’라고 규정했다. 최근까지도 반군과의 전투를 ‘테러와의 전쟁’으로 불렀다. IS가 등장해 만행을 일삼자 이 논리가 기정사실이 되어버렸다.

날뛰는 IS, 뒤에서 웃는 알아사드 정권

그래도 시리아 정부로서는 미국인 인질 사태가 마냥 반가울 수만은 없었다. 애초에 시리아 정부는 미국이 군사 개입을 하는 상황을 가장 꺼렸다. 만약 미국이 시리아 반군을 도우면 하루아침에 알아사드 정권은 무너질 수 있다. 알아사드가 사담 후세인이나 오사마 빈라덴처럼 되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오바마 미국 행정부는 줄곧 온건한 반군인 자유시리아군(FSA)을 지지하며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에게 물러나라고 촉구해왔다.

ⓒAP Photo2014년 9월 지중해에서 조난당한 시리아 난민 300여 명이 구조되어 크루즈선으로 옮겨 타고 있다.
시리아 정부는 미국 정부에 급하게 화해 제스처를 보냈다. 왈리드 무알렘 시리아 외무장관은 “미국이 IS 세력을 공습하려면 시리아 정부와 조율을 거쳐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이는 침략 행위이자 주권 침해가 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시리아는 테러리즘과 싸우기 위해 지역 및 국제적 수준에서 협력과 조율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라며 유화적인 태도를 동시에 표명했다.

IS의 미국인 인질 사건으로 시리아 반군의 처지도 많이 변했다. 2013년 시리아 정부의 민간인 화학무기 공격 사건이 터졌을 때 시리아 반군은 쾌재를 불렀다. 미국이 시리아 정부를 군사적으로 공격해 알아사드를 축출하리라고 확신했다. 반군 연합체인 시리아국민위원회(SNC)는 차기 시리아 정부를 세울 준비를 했다. 국장급까지 정하고 당당히 수도 다마스쿠스로 입성할 날만 기다렸다. 하지만 러시아의 중재로 미국이 시리아에 대한 군사 개입을 포기했다. 반군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13년 12월부터 미국 정부는 시리아 반군에 대한 일반 원조를 중단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IS 등 이슬람 그룹이 시리아 반군의 원조 물품 보관창고를 장악했기 때문이다. 식량과 의료 구호품, 트럭과 통신수단의 공급이 중단되자 반군은 휘청거렸다. 점점 더 많은 분파가 생겨났다. 아랍 국가의 관대한 지원을 더 원하게 되었다. 아랍 국가와 반군이 가까워지면서 부작용도 커졌다. IS뿐만 아니라 알누스라 등 과격한 이슬람 그룹 반군이 시리아에서 맹활약하게 됐다. IS의 힘은 더 커지고 온건 반군은 거의 와해 직전까지 몰렸다.

미국은 2014년 6월부터 부랴부랴 다시 시리아 반군 지원을 위해 5억 달러에 이르는 예산안을 의회에 요청했다. 하지만 이미 시리아 반군은 미국의 신뢰를 잃은 뒤였다. 한번 줄이 닿은 이슬람 급진세력과의 결별이 쉽지도 않았다. 그런 와중에 미국인 인질 참수 사건이 터졌다. 마틴 뎀프시 미국 합참의장은 척 헤이글 국방장관과 함께한 기자회견에서 “IS는 파괴적이고 종말적인 테러 조직인 만큼 반드시 뿌리를 뽑아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미국의 군사 개입은 시간문제였으나 어떤 수준인지가 문제였다. IS는 시리아와 이라크 국경을 넘나들며 게릴라 전술을 펴왔다. 이라크에 웅크린 IS를 제한적으로 공습하는 게 효과가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오바마 대통령은 지상군 투입 없는 공습을 결정했다. 다시 이라크 전쟁에, 덤으로 시리아 전쟁까지 또 떠안기 싫었던 것이다. 2014년 아프간에서도 무려 12년 만에 전쟁을 끝낸 참이었다. 군사 개입은 하되 내전에는 뛰어들지 않겠다는 것이 미국의 방침이었다. 반군은 다시 실망했다. 자유시리아군(FSA) 내부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이번에도 미국에게 배신당했다는 의견이 팽배했다. 자유시리아군의 살린 중령은 “IS 전사 한 명 죽이려고 시리아 주민 100명이 같이 죽어나간다. 나는 공습을 명백히 반대했다. 하지만 미국은 말을 듣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그의 보좌관인 무스타파 중위는 “미국은 이미 아프간과 이라크에서 민간인 오폭으로 악명을 떨쳤다. 그 비극이 시리아에서도 벌어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2014년 9월22일 미국이 시리아에 대한 공습을 시작했다. 미국의 첫 타격 목표는 라카였다. IS 본부의 무력화를 노렸다. 게다가 원래 라카는 시리아 공군의 핵심 거점이었다. 미국으로서는 IS로부터 공군 기지를 탈환해줘 ‘미국이 정권을 무너뜨릴지도 모른다’는 시리아 정부의 걱정을 씻어주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화력은 막강했다. IS 사령부와 보급시설 등 목표물 50여 곳을 타격했다. 현재 최강의 전투기로 꼽히는 F22 랩터 스텔스 전투기까지 공습에 나섰다. IS는 공군이 없었다. 공대공 방어를 전혀 할 수가 없었는데도 레이더에 탐지되지 않는다는 스텔스기까지 동원한 것이다. 공습은 미국의 권위를 과시하려는 화려한 공중쇼처럼 보였지만 라카는 초토화되었다.

라카 주민 이스마엘과의 마지막 통화

라카 주민 이브라힘 씨(47)는 “IS 전사뿐 아니라 동네 주민도 여럿 사망했다.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친구도, 시장에서 양고기 팔던 정육점 주인도 죽었다. 극악한 IS도 견뎠는데 이제 미국이 여기를 불바다로 만들고 있다. 우리 목숨은 보장받을 수 있나?”라고 되물었다. 미국의 첫 공습 이후 이브라힘처럼 두려움에 떠는 라카 주민들은 서둘러 피란길에 나섰다. 이스마엘 씨(24)도 동이 틀 때까지 기다렸다 가족과 함께 떠났다. 그들은 천신만고 끝에 터키 국경을 넘었다. 국경을 넘자마자 필자와의 통화에서 “미국이 공습하지 않았다면 내 고향 라카에 머물렀을 것이다. IS 때문에 주민이 피란 갈 때도 어머니는 반대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머니가 먼저 짐을 꾸렸다”라고 말했다. 터키 국경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터키 정부로서는 난감했다. 3년 반에 이르는 시리아 내전 동안 받아들인 난민 수가 이미 100만명이 넘었다. 터키 정부가 감당하지 못하자 많은 난민이 유럽으로 향했다. 이스마엘 가족과는 국경에서 통화한 이후 연락이 끊겼다. 그들이 탄 배가 그리스 인근 해역에서 뒤집혀 몰살되었기 때문이다. 시리아 비극 2막이 시작되었다.

기자명 김영미 국제문제 전문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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