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10월에도 부산에 갈 수 있을까. 제21회 부산국제영화제를 앞두고 많은 이들이 우려했다. 2014년 영화 〈다이빙벨〉을 상영한 이후 2년, 부산시와의 갈등이 극에 달했다. 일련의 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이 길어지면서 올해는 영화제의 개최 여부가 불투명한 상황까지 치달았다. 그 와중에도 외적·내적으로 부족한 부분들을 끌어안고 영화제가 또 한 발짝 내디뎠다.

부산국제영화제가 수행하는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신인 감독의 발굴이다. 매년 ‘한국 영화의 오늘-비전’이라는 이름으로 한국 독립영화계가 기억해야 할 이름을 추린다. 올해는 11편이 이름을 올렸다. 역시 11편을 선정하는 뉴 커런츠는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 영화로 범위를 확장해 신인 감독들의 이름을 알린다. 이 두 부문에 초청된 영화 22편 중에서 세 편을 골라 소개한다. 〈용순〉(신준 감독), 〈환절기〉(이동은 감독), 〈꿈의 제인〉(조현훈 감독)이다. 이들 작품은 이르면 내년 상반기 중에 극장에서 만나볼 수 있다.

ⓒ시사IN 이명익신준·이동은·조현훈(왼쪽부터 차례대로) 감독의 영화 〈용순〉 〈환절기〉 〈꿈의 제인〉은 주목할 만한 독립영화다. 이들 작품은 이르면 내년 상반기 중에 극장에서 만나볼 수 있다.
이토록 소란스러운 첫사랑, 〈용순〉

‘열여덟 살 여고생 용순, 육상부 담당 체육 선생님과 사랑에 빠진다.’ 〈용순〉의 소개글 첫 문장은 지루했다. ‘시간도 많이 없는데 망한 예매면 어쩌지…’라는 생각 끝에 궁금함이 찾아왔다. 그렇고 그런 영화가 부산국제영화제 ‘한국 영화의 오늘-비전’ 섹션에서 상영될 리 없지 않은가, 라는 어떤 믿음이었다.

상영이 끝난 후에는 얼마 전 한 영화 관계자로부터 들었던 푸념이 떠올랐다. 영화 〈파수꾼〉(윤성현 감독, 2010) 이후 영화감독 지망생들이 들고 오는 시나리오가 다 비슷하다는 내용이었다. ‘아류가 되고 싶냐’라는 쓴소리를 해댄 게 벌써 5년째라고 했다. 그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청소년물도 남성 위주로군.’ 사춘기를 남성만 겪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러니까 〈용순〉은 ‘여성 청소년물’이다. 대중매체가 흔히 소비하는 여고생과는 어딘가 좀 다른, 그런데 사실 알고 보면 어디에나 있는 그런 여고생이 주인공이다. 용순(이수경 분)은 달리고, 던지고, 화내고, 소리 지른다. 사랑을 수동적으로 기대하거나 기다리지 않는다. 성패를 떠나 끝까지 가본 사람만이 경험할 수 있는 게 ‘성장한다’라는 감각이라면, 용순은 그 요란한 첫사랑을 통해 한 뼘 자란다.

친구들이 농구나 축구를 한답시고 운동장에서 먼지를 피우고 놀 때 신준 감독(30)은 그저 땀 흘리는 게 싫어서 등나무 벤치에 누워 있던 청소년이었다. 그런 자신의 손을 붙잡고 일부러 들로 산으로 다녔던 부모님은 ‘과학자가 될래’ ‘아나운서가 될래’라고 매번 장래희망을 바꿔 이야기하는 신 감독의 꿈이 뭐든 지지했다. 단 한 순간만이 예외였다. 〈살인의 추억〉과 〈장화, 홍련〉을 연달아 보고 난 고등학교 2학년의 어느 날, “엄마 나 영화감독 해야겠어”라고 무심코 말하던 그에게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거 아무나 하는 거 아니야.” 그 대답이 차라리 “안 돼”였으면 그냥 지나갈 수도 있었을 것 같았다. 신 감독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니?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꼭 해야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공대에 진학했지만 학교에 있기보다는 이런저런 영화 현장에 나가 일손을 보태고 있을 때가 더 많았다. 사람들을 모아 영화를 만들어보자 했던 적도 있지만 비전공자들끼리 쉽지 않았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 가고 싶었다. 군대를 제대하고 한국예술종합대학 영상원에 1학년으로 다시 들어갔다. 한 번도 휴학하지 않고 학교를 다녔다. 사이사이 수학 강사로 일하며 용돈을 벌었다.

ⓒBIFF 제공
ⓒBIFF 제공〈용순〉은 여성 청소년의 사춘기를, 〈환절기〉는 동성애를 다루면서 극단적인 감정 표현을 절제했다는 평을 얻었다.


“기존 청소년물이라는 게 어둡거나, 일탈하거나, 방황하는 이야기 위주로 다뤄지는데, 그게 실제 청소년의 모습이라기보다 어른들이 생각하는 사춘기의 모습 같았어요. 아이와 어른 사이에서 겪는 느낌과 갈등, 생기를 보여주고 싶었고 그런 이야기를 잘 전달할 수 있는 캐릭터를 만든 거죠.”

시나리오를 완성하고도 장편영화가 될 수 있을까 의심했다. 새롭다거나 충격적이지 않은, 다만 용순이라는 캐릭터가 가진 의외성을 통해 차근차근 쌓아올리는 이야기를 선뜻 제작할 영화사가 있을까. 그때 만난 곳이 〈우리들〉(윤가은 감독, 2016)을 만든 제작사 아토였다. 〈용순〉은 아토의 두 번째 작품이다. 2015년 영화진흥위원회 독립영화 제작지원작에 선정되어 지원받은 1억원으로 완성했다. 저예산에 빡빡한 일정으로 영화를 찍는 동안 60㎏대 초반이었던 신 감독의 몸무게는 10㎏ 이상 줄기도 했다.

용 용, 순할 순. 엄마가 낳을 때 용쓰며 낳아서, 용순. 영화 속 용순의 대사처럼 “한숨만 나오는 이름”은 실제 신 감독이 좋아하는 이름이다. 시대와 성별을 가늠하기 어렵다는 점, 센 이미지의 앞 글자 뒤에 오는 연한 글자의 느낌이 마음에 들었다. 용순의 뾰족한 얼굴 뒤에 담긴 진심, 근사한 성장담 한 편이 한국 영화에 도착했다.

네 옆에 똑같이 서고 싶었어, 〈환절기〉

영화가 공개된 뒤 이동은 감독(38)은 여러 차례 비슷한 질문 앞에 서야 했다. “감독님의 아들이 게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나요?” “동성애에 대한 감독님의 견해가 궁금합니다.” “감독님 게이예요?” 배우에게도 예외는 없었다. “동성애 연기라 몰입하기 어렵지 않았나요?”

어떤 질문 앞에서는 노코멘트로, 어떤 질문 앞에서는 조금 목소리가 높아지기도 했다. “동성애에 대한 견해는 없습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것이니까요.” 만약 아들이 게이라고 해도 자신이 받아들이고 말고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사회적으로 존재하는 차별은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답할 뿐이었다.

정답을 내리기보다 질문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이 감독이 그래픽노블로 먼저 선보인 〈환절기〉(이숲, 2013)는 엄마 미경(배종옥)이 아들 수현(지윤호)과 그의 친구 용준(이원근)이 당한 교통사고를 통해 동성 연인인 두 사람의 관계를 알아가는 내용이다. 영화를 염두에 두고 써내려간 작품이 결국 영화가 되었다. 〈환절기〉는 부산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인 뉴 커런츠에 초청된 11편 중 한 편으로, 이 부문에 초청된 한국 작품은 〈환절기〉와 〈메리크리스마스 미스터 모〉 두 편뿐이다. 첫 영화로 아시아 영화의 미래를 이끌 신인 감독 11명의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단지 영화를 만들고 싶었을 뿐인데 살면서 참 많이도 넘어졌다. 몇 차례 단편을 만들어 여러 영화제에 출품한 영화는 단 한 번을 빼고는 모두 거절당했고, 생계는 번번이 발목을 잡았다. 연출 말고 제작 쪽으로라도 일하고 싶어서 영화계 관련 회사에 다니기도 하고, 연출을 제대로 배우기 위해 영화과 재입학도 시도해봤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도 시나리오는 계속 써왔다. 영화 관련 모임에서 만난 정이용씨와 함께 그래픽노블을 출판했다. 책의 꼴로 세상에 먼저 나오긴 했지만 〈환절기〉 〈당신의 부탁〉 〈니나 내나〉 모두 영화를 염두에 두고 쓴 작품이다. 여러 차례 거절당한 탓일까. 자신의 작품을 영화로 만들겠다고 할 제작사는 없을 거 같았다. 그때 이 감독의 손을 잡아준 게 명필름영화학교였다. 2014년 명필름영화학교 1기로 뽑힌 덕분에 〈환절기〉를 완성할 수 있었다.

제작 과정에서 어려움이 없었던 건 아니다. 시나리오와 그래픽노블은 다른 장르지만, 이미 책으로 세상에 공개돼 있는 내용이다 보니 영화에 관계된 사람들 각자가 생각하는 영화의 모양이 조금씩 달랐다. 이 감독이 “너무 온건한 내용 아닌가”라고 고민할 때 “너무 급진적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혹은 더 극적으로 밀어붙이기를 바라는 의견도 있었다. 이를테면 이 감독은 미경이 아들의 동성 연인인 용준을 극적으로 받아들이기를 원치 않았다. 둘의 관계가 시혜적이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용준이 미경에게 전화해 ‘제가 죽었어야 하는데’라고 할 때 빨리 컷을 해버렸어요. 저는 여기서 관객이 울면 안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소수자라는 이유로 품어주고 받아들이고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동등한 모습으로 비치길 바랐어요.”

용준은 늘 “괜찮다”라고 말하는 아이다. 그랬던 용준이 처음으로 “안 괜찮다”라고 말하는 장면이야말로 포스터 카피처럼 ‘마음의 계절이 바뀌는 순간’이다. 후반 작업을 끝내고 내년 상반기 중 개봉을 계획하고 있다. 2월과 3월 사이면 좋겠다는 감독의 바람이 이뤄진다면 겨울의 끝과 봄의 시작 사이, 〈환절기〉가 시작된다.

일상의 불행을 견디는 법, 〈꿈의 제인〉

서울이나 인천의 변두리 동네를 어슬렁거리다 보면 학교 갈 시간인데도 거리에 나와 있는 아이들이 자꾸 눈에 띄었다. “뭐 하고 있냐?” “나랑 아무 얘기나 좀 하자.” “밥 먹을까?” 무턱대고 옆에 가서 들이대는 조현훈 감독(30)을 아이들은 의외로 피하거나 경계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존재를 궁금해한다는 것만으로도 호의적인 태도와 호기심을 보여주는 아이들을 보면서 이들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고 싶어졌다.

조 감독은 영화과를 졸업하고 몇 개의 단편 영화를 만들면서 20대의 시간을 통과하는 동안, 더는 개인적이거나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내용으로만 영화를 만들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조 감독이 외부로 관심과 시선을 돌려야겠다고 다짐했을 때 만난 게 길 위의 아이들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주인공이 아닌 사람들, ‘소수자’조차 되지 못하는 입 없는 사람들이 거기 있었다. 길 위에서, 쉼터에서 수년에 걸쳐 아이들을 만나면서 외롭고 불행해서 자꾸만 영화 속으로 도망갔던 자신의 청소년 시절을 떠올렸다. “가출 청소년들이 모여 산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그 결정이 어디서 온 걸까 오래 골몰했어요. 제가 내린 답은 외로움이고요.”

ⓒBIFF 제공〈꿈의 제인〉은 가출 청소년과 트랜스젠더를 다루면서 관객이 이들의 외로움에 이입하도록 만들었다.
‘한국 영화의 오늘-비전’ 부문 초청작 11편 중 하나인 조현훈 감독의 첫 장편영화 〈꿈의 제인〉을 이끌어가는 두 축은 가출 청소년들이 만든 가출팸(가출한 청소년들이 가족을 구성해서 사는 것)을 들락거리는 소현(이민지)과 트랜스젠더 제인(구교환)이다. 다큐멘터리가 아닌 극영화임에도 꼼꼼한 취재 위에 쌓아올린 사실적인 이야기들이 돋보인다. 〈꿈의 제인〉은 아시아영화펀드 후반작업지원펀드에 선정된 작품 5편 중 한 편이기도 하다.

“우리 죽지 말고 불행하게 오래오래 살아요. 그리고 또 만나요, 불행한 얼굴로.” 영화 속 제인의 대사는 외롭고 불행한 사람들을 위한 감독의 대답이다. 참혹한 세상에서 그럼에도 계속 살아가야 하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해주고 싶었다. 극 중 소현이 왜 집 밖으로 몰리게 됐는지, 왜 이런저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역사’를 조금은 과감하게 삭제한 까닭이기도 하다. 조 감독은 가출 청소년들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어려운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들의 삶을 전시하는 방향으로 극을 이끌어나가고 싶지 않았다.

영화의 프리프로덕션 단계에서 1인 제작사 ‘서울집’을 만들었다. 자신의 단편영화 제목을 따서 지은 이름이다. 외부의 간섭 없이, 혹은 누군가가 정해둔 제약 없이 온전히 자신의 결정으로 만들고 싶은 영화였다. 조금은 고집스럽게 보일 수 있지만, 그게 영화의 ‘개성’을 지키는 방법이라고 믿었다. 〈꿈의 제인〉은 조 감독 홀로 떠안고 3년을 끙끙대며 끌어온 영화다. “이 작품을 끝낼 수 있을까” “이 작품을 끝내고 다음 작품을 할 에너지가 남아 있을까” 걱정했던 마음은 영화제 관객들을 만나면서 조금 해소됐다.

현실은 영화보다 더 나쁘다. 삶의 크고 작은 불행을 받아들이면서 가끔의 행복을 즐기는 것에 대해 영화는 묵직한 펀치를 날린다. 그래서 아마도 ‘별 세 개’짜리 평가는 없을 것 같은 영화. 누군가는 이 영화에 열광하고, 누군    이 영화를 매우 싫어하리라.

기자명 장일호 기자 다른기사 보기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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