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도경(정우성)은 악덕 시장 박성배(황정민)의 탐욕과 불의를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의 해결사 노릇을 기꺼이, 그것도 아주 열심히 한다. 일가친척 관계로 얽히기는 했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다. ‘먹고살아야 하니까’, 혹은 ‘병든 아내를 수발해야 하니까’는 핑계다. 한도경의 아내가 병이 든 건 이미 그가 악에 물든 후인 것 같다. 아내는 자신의 병에 대해 “당신이 저지른 나쁜 짓들의 벌을 내가 대신 받는 것”이라 잘라 말한다. 그는 이미 돈맛을 알고, 떨어지는 떡고물이 좋다. 동생 같은 문선모(주지훈)를 자기 대신 하수인 자리로 들여보내면서 문선모가 점점 자신에게 건방을 떠는 게 거슬린다. 그에게 선을 넘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은, 한도경이 “그럼에도 지켜야 할 최소한의 도덕” 따위를 믿어서가 아니다. 문선모가 자꾸 건방을 떨며 자신의 자존심을 긁기 때문이다. 또한 탐욕스러운 이의 하수인이란 언제든 비참하게 버림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한도경 자신이 그렇게 버림받고 모든 죄를 뒤집어쓸 위기에 놓여 있다.
악에 기대거나 타협하다간 출구가 없을지니
이쯤에서 생각나는 영화는, 스타일도 분위기도 다르긴 하지만 류승완 감독의 〈부당거래〉다. 등장인물들이 대부분 악당이고 경찰이나 검찰 등 공권력에 몸담고 있으며, 정의나 옳은 일보다는 오로지 자신의 이익 때문에 싸우고 대결하고 권력을 동원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다만 〈부당거래〉에서 황정민이 연기하는 주인공은 자신이 타락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며 고뇌한다. 류승범이 연기한 검사 역시 순전히 자신의 이익을 지키고 적을 잡기 위해 결과적으로 옳은 일을 한다. 이로써, 민주주의 정치 체계가 삼권분립에 기초해 권력이 서로 감시하고 견제하는 시스템을 갖추는 이유를 씁쓸하게 되새기게 만든다.
〈아수라〉를 본 관객들의 호오가 극단적으로 갈리는 지점도, 어쩌면 여기에서 연유하는 것인지 모른다. 모든 인물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적극적으로 악을 선택하고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세상, 제목부터 지옥인 〈아수라〉의 세상에는 정의나 양심은 물론이고 아주 작은 선의 한 조각조차 발견할 수 없다. 권력의 하수인 노릇도 〈아수라〉에서는 능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런 능력으로 나보다 어리거나 약한 존재, 내가 아끼던 존재를 보호하고 돌보지 않는다. 남을 죽이면서 내 것을 불리려 광기를 부리고 내 죄마저 나보다 약한 이에게 떠넘기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가상의 도시 안남을 배경으로 하지만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신문과 뉴스, 인터넷을 통해 매일 마주하는 바로 그 사회다. 우리는 넘쳐나는 악에 둘러싸여 그 악에 기대거나 적극적으로, 혹은 소극적으로 타협하며 살고 있다. 영화 〈아수라〉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옥을 보여주고 “그렇게 살다가는 이 꼴 난다”라고 무섭게 경고하면서도, 조그마한 출구 하나, 돌이킬 수 있는 작은 기회 한 번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저 세상의 운명은 이미 정해졌으며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니 받아들이라며 ‘지옥에 발 디딘 자, 그대로 지옥의 끝에서 처참하게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지옥, 세상의 끝에 와 있다. 우리는 모두 망하고 죽을 것이다’라고 조롱한다.
나약하고 소심한 우리들, 즉 거창하게 정의를 수호하거나 손해를 봐가면서까지 옳은 일을 선택할 용기도 없지만 그렇다고 저렇게 극악을 떨면서까지 이익을 취할 뻔뻔함도 없는 관객에게는 공포 그 자체인 세상이다. 잘생긴 배우들과 스타일리시한 액션신이나 차량 추격신이 주는 시각적인 쾌감으로도 이 공포를 상쇄하진 못한다. 누군가는 그래서 이 영화를 끔찍해하고, 누군가는 그래서 이 영화에 열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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