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성 때문이리라. 영화를 보는 중간 〈비트〉(1997)와 〈태양은 없다〉(1999)가 떠올랐다. 특히 이주노동자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정우성이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휘청거리는 장면은, 〈태양은 없다〉에서 펀치드렁크증후군으로 괴로워하던 정우성을 상기시키는 의도적인 장면 같았다. 두 영화에서 정우성이 연기했던 민(〈비트〉)이나 도철(〈태양은 없다〉)은 모두 어둠의 세계 근처에 있다. 유혹을 계속 받으면서도 위험한 선을 넘지 않으려 애를 썼다. 그런 민이나 도철이 적당히 살아남아 결혼을 하고 나이를 먹고 ‘아저씨’가 된 세상이 〈아수라〉일까. 어느 순간 유혹에 넘어가, 선을 넘어가버린 후 다시 돌아오지 못한 채 악만 남은, 죽지 않으려 발버둥치지만 소용없는 세계 말이다.

한도경(정우성)은 악덕 시장 박성배(황정민)의 탐욕과 불의를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의 해결사 노릇을 기꺼이, 그것도 아주 열심히 한다. 일가친척 관계로 얽히기는 했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다. ‘먹고살아야 하니까’, 혹은 ‘병든 아내를 수발해야 하니까’는 핑계다. 한도경의 아내가 병이 든 건 이미 그가 악에 물든 후인 것 같다. 아내는 자신의 병에 대해 “당신이 저지른 나쁜 짓들의 벌을 내가 대신 받는 것”이라 잘라 말한다. 그는 이미 돈맛을 알고, 떨어지는 떡고물이 좋다. 동생 같은 문선모(주지훈)를 자기 대신 하수인 자리로 들여보내면서 문선모가 점점 자신에게 건방을 떠는 게 거슬린다. 그에게 선을 넘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은, 한도경이 “그럼에도 지켜야 할 최소한의 도덕” 따위를 믿어서가 아니다. 문선모가 자꾸 건방을 떨며 자신의 자존심을 긁기 때문이다. 또한 탐욕스러운 이의 하수인이란 언제든 비참하게 버림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한도경 자신이 그렇게 버림받고 모든 죄를 뒤집어쓸 위기에 놓여 있다.

영화 〈아수라〉의 배경이 된 가상 도시 안남은 지금 이 사회와 닮았다.
영화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한도경부터 이런 악당이니, (문선모를 제외하고) 영화 속 다른 주인공들에게 감정이입이나 이해의 여지가 전혀 없는 건 당연하다. 모든 악의 근원인 박성배 시장을 수사하며 한도경을 압박하는 검찰도 그리 깨끗하거나 정의롭지 못하다. 악당을 잡는다는 명목으로 온갖 불법 수사를 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김차인(곽도원) 검사도 결국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조직의 일원일 뿐이다. 더욱이 공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조직의 하수인에 불과하다. 그나마 문선모가 예외적으로 보이는 것도 그에게 선이 남아 있어서가 아니다. 다른 악당들에 비해 어리고 미숙하기 때문이다. 이제 막 악의 세계에 발을 들인 문선모가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이 돌아오지 못할 길을 걷고 있다거나 악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다. 능숙한 어른으로 보이지 못하는 것, 이 세계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다.

악에 기대거나 타협하다간 출구가 없을지니

이쯤에서 생각나는 영화는, 스타일도 분위기도 다르긴 하지만 류승완 감독의 〈부당거래〉다. 등장인물들이 대부분 악당이고 경찰이나 검찰 등 공권력에 몸담고 있으며, 정의나 옳은 일보다는 오로지 자신의 이익 때문에 싸우고 대결하고 권력을 동원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다만 〈부당거래〉에서 황정민이 연기하는 주인공은 자신이 타락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며 고뇌한다. 류승범이 연기한 검사 역시 순전히 자신의 이익을 지키고 적을 잡기 위해 결과적으로 옳은 일을 한다. 이로써, 민주주의 정치 체계가 삼권분립에 기초해 권력이 서로 감시하고 견제하는 시스템을 갖추는 이유를 씁쓸하게 되새기게 만든다.

영화 〈부당거래〉에서 최철기(황정민·오른쪽)는 자신이 타락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며 고뇌한다.
모두가 악당인 세계를 다룬다 해도 〈부당거래〉가 지향하는 세계는 악을 악이라 부를 수 있는 세상이다. 〈아수라〉가 〈부당거래〉와 결정적으로 갈리는 것은 이 지점이다. 〈아수라〉에서 악은 악 그 자체가 아니라 그저 생존 방식이다. 악을 행하면서 심적 갈등이나 죄책감을 느끼는 인물도 없다. 서로 아귀다툼을 하는 와중 선택하는 행위들의 기준은 모두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지 여부다. 의도가 옳거나 과정에서 옳은 행위를 하기는커녕 결과적으로 옳은 일을 하는 인물도 없다. 가장 끔찍한 악행들을 주저 없이 저지르면서, 그저 일이 꼬이는 것에 당황하거나 분노할 뿐이다. 문선모가 사람을 차로 깔아뭉개거나 차에서 떨어뜨려 죽이면서 떠는 것 역시, 죄책감보다는 미숙한 자의 두려움에 가깝다. 그 두려움은 후회나 죄책감이 아니라 익숙함을 지향한다.

〈아수라〉를 본 관객들의 호오가 극단적으로 갈리는 지점도, 어쩌면 여기에서 연유하는 것인지 모른다. 모든 인물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적극적으로 악을 선택하고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세상, 제목부터 지옥인 〈아수라〉의 세상에는 정의나 양심은 물론이고 아주 작은 선의 한 조각조차 발견할 수 없다. 권력의 하수인 노릇도 〈아수라〉에서는 능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런 능력으로 나보다 어리거나 약한 존재, 내가 아끼던 존재를 보호하고 돌보지 않는다. 남을 죽이면서 내 것을 불리려 광기를 부리고 내 죄마저 나보다 약한 이에게 떠넘기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가상의 도시 안남을 배경으로 하지만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신문과 뉴스, 인터넷을 통해 매일 마주하는 바로 그 사회다. 우리는 넘쳐나는 악에 둘러싸여 그 악에 기대거나 적극적으로, 혹은 소극적으로 타협하며 살고 있다. 영화 〈아수라〉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옥을 보여주고 “그렇게 살다가는 이 꼴 난다”라고 무섭게 경고하면서도, 조그마한 출구 하나, 돌이킬 수 있는 작은 기회 한 번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저 세상의 운명은 이미 정해졌으며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니 받아들이라며 ‘지옥에 발 디딘 자, 그대로 지옥의 끝에서 처참하게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지옥, 세상의 끝에 와 있다. 우리는 모두 망하고 죽을 것이다’라고 조롱한다.

나약하고 소심한 우리들, 즉 거창하게 정의를 수호하거나 손해를 봐가면서까지 옳은 일을 선택할 용기도 없지만 그렇다고 저렇게 극악을 떨면서까지 이익을 취할 뻔뻔함도 없는 관객에게는 공포 그 자체인 세상이다. 잘생긴 배우들과 스타일리시한 액션신이나 차량 추격신이 주는 시각적인 쾌감으로도 이 공포를 상쇄하진 못한다. 누군가는 그래서 이 영화를 끔찍해하고, 누군가는 그래서 이 영화에 열광한다.

기자명 김숙현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코디네이터)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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