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정치적인 것을 소재로 삼거나 정치성을 드러내기 위한 전제 조건은 정치적 자유다. 히틀러·스탈린·김정일 같은 독재자들은 하나같이 영화의 정치적 중요성을 강조했으나, 정치적 자유가 없는 나라에서는 선전 영화만 있을 뿐 정치 영화는 불가능하다. 이런 정리(定理)는 노골적인 선전에는 정치가 없고, 오히려 오락 영화가 더 정치적일 수 있다는 역설로 우리를 이끈다. 영화 산업 초창기부터 미국의 긍정적인 이미지와 미국적 삶의 방식을 사회주의보다 우월한 것으로 광고해온 할리우드 영화는 그런 역설을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영화의 정치성을 항상 부정하면서 ‘그저 오락으로 즐겨달라’는 당부를 그치지 않았다. 하지만 프랑스의 미디어 학자 이냐시오 라모네는 할리우드 영화를 “소리 없는 프로파간다”라면서 “오락 영화는 눈으로 씹는 추잉 껌이자, 무의식까지 파고드는 이데올로기다”라고 일갈했다.

문학 평론은 오랫동안 베스트셀러를 기피해왔고, 대중성을 낮추어보는 문학계의 관습은 지금도 여전하다. 하지만 영화계는 그런 금기를 벗은 지 오래다. 영화평론가 김경욱은 올해 초에 나온 〈한국 영화는 무엇을 보는가〉 (강, 2016)를 1000만 관객이 든 영화를 분석하는 데 통째 바쳤고, 가장 젊은 영화평론가 가운데 한 명인 윤광은과 역시 젊은 문화연구자 김성윤도 각기 자신의 첫 책 〈비평의 흔적〉(부크크, 2015)과 〈덕후감〉(북인더갭, 2016)에서 1000만 관객이 든 영화 몇 편을 공들여 분석했다. 여기에 정치학자 정병기가 〈천만 관객의 영화 천만 표의 정치〉(갈무리, 2016)를 들고 합세했다.

ⓒ이지영 그림
2003년 〈실미도〉가 1000만 관객을 처음 동원한 이래, 한국 영화는 현재까지 도합 13편의 1000만 관객이 든 작품을 낳았다. 〈해운대〉 〈7번방의 선물〉 〈명량〉 같은 영화를 놓고 “형편없는 1000만 영화”라느니, “어떻게 이런 영화를 1000만명씩이나 볼 수 있느냐”라는 인터넷 커뮤니티의 냉소적인 반응도 없지 않지만, 정병기는 1000만 관객 영화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변호한다.

“한국 정치에서 1000만이라는 숫자는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2012년 제18대 대선을 제외하면 1997년 제15대 대선 이후 역대 대선에서 1위 후보는 대개 1000만을 조금 넘는 표를 얻었기 때문이다. 대선에서 1000만이라는 숫자는 유효 투표의 약 3분의 1에 해당해 당선 확정에 근사한 수치다. 2005년 이후 1000만 관객을 넘은 한국 영화들은 권력과 관련되는 내용을 다루었거나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사회 부조리와 관련된 이슈들을 주로 다루었다. 이것은 정치적으로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1000만 관객 영화를, 정치적 의미가 발생하고 정치적 실현을 예비하는 장으로 떠받드는 저자의 시각은 아날학파의 창시자 가운데 한 명이었던 마르크 블로크의 논리를 새삼 떠올려준다. 그는 1924년에 출간한 〈기적을 행하는 왕〉(한길사, 2015)에서 “위대한 일류 사상가를 참조하는 것보다, 이류 작가들을 들여다보는 것이 더 도움이 될 수도 있다”라면서 역사가들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이 작품들은 대개 사상적 수준이 매우 낮은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격의 저작들은 평범함과 조잡함으로 공통의 관념에 매우 근접해 있다는 장점이 있다. 민중의 감정을 생생하게 파악하기를 원하는 우리에게는 그것이 훨씬 좋다.” 문화 연구가 생겨나기 훨씬 이전에 역사학자가 한 말이지만, 어느덧 이것은 고급 예술이나 작가주의를 특별히 배려하지 않는 문화 연구의 전통이 되었다.

〈천만 관객의 영화
천만 표의 정치〉
정병기 지음
갈무리 펴냄
〈변호인〉은 좌파 영화? 〈국제시장〉은 우파 영화?

영화 텍스트를 통해 정치 현상을 분석할 수 있으려면 적어도 편짓기를 넘어서야 한다. 나는 한국 영화평론가들, 특히 영화에 ‘입질’하는 논객들이 얼마나 진영 논리로부터 자유로운지 의심스럽다. 이를테면 〈변호인〉은 좌파 영화로, 〈국제시장〉은 우파 영화로 규정한 것도 이들의 공로다. 하지만 정병기는 다르게 말한다. ‘깨시민’의 찬사 속에 상영된 〈변호인〉은 헌법과 인권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기를 바라는 주변부 기득권층의 열망을 중심에 놓고 노동운동과 사회주의를 배격한다는 점에서 보수적이며, 진보 논객들에게 우익 국가주의 영화로 난도질당한 〈국제시장〉은 국가보다 개인의 자력 구제를 예찬하면서 국가의 부재를 줄기차게 암시한다는 점에서 박정희 시대에 대한 향수보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더 부합한다.

정병기는 개별 영화 분석에 집중하느라 한국에서 1000만 영화가 줄지어 탄생하게 된 사회현상 분석을 생략했다. 〈한국 영화는 무엇을 보는가〉에서 김경욱은 2008년 촛불시위의 좌절로 시작된 감정의 탈수가 노무현의 자살과 세월호 참사로 더욱 심화되면서, 한국 사회 전체가 탈감정 사회로 변했다고 말한다. 현실을 향해 분출되어야 할 정당한 감정의 배출이 가로막히면서 더는 감정이 재생되지 않는 메마른 사회의 동공(洞空·빈 곳)으로 희생(〈7번방의 선물〉)·용기(〈변호인〉)·책임감(〈명량〉)·눈물(〈국제시장〉)·정의감(〈암살〉〈베테랑〉)과 같은, 스크린이 조작한 ‘유사 감정’이 들어섰다. 그것이 1000만 관객을 가능케 한 비밀이다. 이런 설명은 1000만 관객을 시민의 능동적인 정치적 의사 표현으로 읽으려고 하는 정병기의 해석과 상충한다.

한편 윤광은은 저출산·고령화 경향과 맞물린 40~50대의 티켓 파워가 강화되면서, 가족 전체가 볼 수 있는 취향을 반영한 것이 신파와 희생을 기저로 한 1000만 관객 영화라고 주장한다. 정병기·김경욱을 비롯한 많은 평자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1000만 관객 영화는 아버지·남성의 희생을 내놓고 미화하면서 가부장제를 당당히 불러들인다. 1000만 관객 영화에서 여성은 아예 보이지 않거나, 독립적인 여성에 대한 혐오와 더불어 보호받아야 할 전통적인 여성상은 더욱 강화된다. 1000만 관객 영화는 노동자·청(소)년·이주민·성 소수자·여성·고령자의 삶을 재현하는 데 인색하다. 이런 배제가 오락 영화의 정치성을 완성시킨다.

한국 영화 13편과 외화 4편을 포함해, 한국에서는 총 17편의 1000만 관객 영화가 나왔다. 나는 그 가운데 두 편을 보았다(〈변호인〉은 영화관에서, 〈왕의 남자〉는 집에서 인터넷으로). 맹세컨대 다시는 내 인생에서 이런 실수를 범하지 않겠다. 여기서 슬그머니 꺼낼 말은 아니지만, 나는 지난 4월 총선에 처음으로 투표를 하지 않았다. 그것을 시작으로 나는 앞으로 영영 국민투표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1000만 관객의 영화도, 1000만 표의 정치도 다 거부한다. 이런 구태의연한 것과 결별하지 못하면 동물이 되는 수밖에 없다.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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