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 소년을 만난 적이 있다. 아빠 없는 아이라고 놀림당하고, 일하느라 바쁜 엄마가 도시락 대신 사준 분식점 김밥이 부끄럽다고 소풍날 온종일 구석에 말없이 움츠리고 있던 아이. 있는 듯 없는 듯 교실 한구석에서 조용히 자리만 채우던 소극적인 소년은, 어느 방학을 기점으로 갑자기 ‘인기인’이 되었다. 딱 붙는 바지와 쇄골이 드러나는 티셔츠, 빈티지하게 물을 뺀 교복 재킷에 스타일을 위해 시야를 포기한 헤어스타일까지, 학교에서 옷 좀 입는다는 애들의 시선을 사로잡으며 등장한 것이다.

당신 눈엔 그깟 거 뭐 대단하냐 싶을 것이다. 학년마다 옷을 잘 입는다고, 춤을 잘 춘다고, 외모가 준수하다고 반짝 인기를 끌었다가 순식간에 별거 아닌 위치로 돌아가는 애들은 늘 한둘씩 있었잖아? 하지만 소년에게 패션은 자신을 세상의 환호성 안에 우뚝 서게 만든 인생 역전의 티켓 같았다. 잘나가는 일진 애들이 자신을 대우해주기 시작했고, 팬레터라는 것도 받아보게 되었으며, 무엇보다 좋아했던 여자애에게 허튼 수작이라도 부려볼 기회를 얻게 됐으니까.

소년은 빠른 속도로 공부와 담을 쌓기 시작했다. 어차피 공부에 대단한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니 공부로 대성하기는 애당초 글렀고, 엄마가 혼자서 간신히 꾸려나가는 집안 형편으로는 이렇다 할 답도 없는 청춘이었으므로, 차라리 본격적으로 패션의 길을 걸어보는 게 낫지 않나? 소년은 장래 희망이 뭐냐는 교사의 질문에 자기는 패션왕이 될 남자라고 이야기했다. 그땐 정말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각자의 멋짐을 뽐내는 경연대회, 소년은 누구보다 빼어났다. 제 안의 야성미를 꺼내다 못해 종의 한계를 넘어 늑대인간이 되는 지경에 이를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도 그때뿐. 콤플렉스 덩어리인 그는 늘 친구의 뒤, 선배의 뒤, 라이벌의 뒤를 쫓다가 버거워지면 흐지부지 제자리로 돌아왔다. 어중간하게 하던 공부도, 있는 듯 없는 듯한 조용한 삶도 모두 내려놨으니 제자리라고 할 만한 건 바닥밖에 없었다.

승부를 걸어보려 했던 패션의 길도 어영부영하다가 접어버렸다. 병을 숨겨가며 혼자 돈을 벌던 엄마에게 자신이 도움이 되기는커녕 짐만 된다는 사실을 알고 그만둔 건지, 첫 연애의 달콤함이 주는 나른함에 모든 걸 놓아버리고 게을러진 탓에 접은 건지 정확하지 않다. 현실이 버거운 만큼이나 핑곗거리도 많았으므로 그는 언젠가 자신이 “저런 깡촌에도 대학이 있느냐”라고 비웃었던 대학교에 들어갔고, 자신이 욕했던 선배들을 고스란히 본받아 후배들 ‘똥군기’나 잡는 시시한 인간이 되었다.

지금은 가진 거 없고, 별 볼 일 없지만…

소년을 한심하다고 비웃는 건 쉬운 일이다. 첫사랑의 결혼식에 가서 축의금이랍시고 달랑 2만원을 내고는 어색하게 서 있다가, 처지가 비슷한 루저들과 함께 잘나가던 옛 추억이나 더듬고 있는 조로의 20대. 신기루만 좇다가 제 자신을 사막 한가운데로 몰고 간 무책임한 사내아이라니 비웃기 얼마나 좋은가? 그러나 소년을 끝내 외면하진 못해 자꾸만 힐끔힐끔 보게 되리라. 내세울 게 없어서, 인기도 성적도 아버지도, 심지어 그 흔한 노스페이스 패딩점퍼 하나가 없어서 있는 듯 없는 듯 살아야 했던 소년. 그래서 뭐가 됐든 제 자존을 세워줄 것이라면 그게 뻔하고 얄팍한 신기루라 해도 일단 간절히 좇고 보는 그의 지친 어깨를 본 적 있을 것이다. 학교 복도에서든, 동네 주점 앞에서든, 아니면 거울 안에서든.

인생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붙잡고 일러줄 어른 하나 없었고, 변두리를 벗어나려 발버둥 칠수록 더 변방으로 밀려나가는 그의 나이 이제 고작 스물셋. 그와 그의 친구들이 행복해질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교수가 패션영업 계통이라고 소개해준 일자리는 신발가게 아르바이트였고, 오랜 시간을 돌고 돌아 만난 짝 봉지은과의 연애도 언제까지 지속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학회장 선배가 그랬듯 군기나 잡고 교수에게 충성하며 버틴다 해도 졸업 무렵엔 빚만 3000만원이라 막일을 뛰어야 하나 고민하는 삶으로 굴러떨어질 공산이 크다.

그 어떤 운도 바랄 수 없을 때 기댈 것은 제 능력밖에 없는 법. 그러니 지금으로선, 그저 그가 무너지지 않고 자신을 지키며 행복해지는 법을 스스로 깨우칠 수 있길 바라는 수밖에 없다. 택배 상·하차 아르바이트로 번 돈으로 엄마에게 산악 패딩을 사주며 느낀 소소한 기쁨 같은 걸 징검다리 삼아가며 무너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웹툰 작가 기안84가 창조한 〈패션왕〉과 〈복학왕〉의 주인공, 한때나마 패션왕이 될 운명이었던 소년 우기명이 1994년 10월11일 태어났다.

기자명 중림로 새우젓 (팀명)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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