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익 사진기자는 ‘현장파’다. “만약 당신의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충분히 다가가지 않았기 때문이다”라는 어느 사진가의 말은 그에게도 적용된다. 2009년 쌍용자동차 옥쇄파업 때도 그랬다. 옥쇄파업 현장이 경찰에 진압될 때, 공장 안에 남은 유일한 사진기자였다. 이 기자는 2014년 4월, 팽목항에 있었다. 이때만은 예외였다. 현장파인 그는 가족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었다. 좀 떨어져서도 취재할 수 있는 70~200㎜ 렌즈를 챙겨 갔다. 아이들 시신이 올라올 때마다 인상착의가 방송되었고 부모들은 시신 안치소에서 아이들을 확인했다. 부모들은 오열했다. 가슴을 후벼 파는 그 소리를 이 기자는 카메라에 담았다. 가슴에도 담았다. 이 기자도 눈가를 훔쳤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팽목항 현장을 떠난 뒤에도 그 소리를 잊을 수 없었다. 다른 사진가들과 의기투합했다. 4·16 가족협의회 요청으로 기록 작업에 나섰다. 주말에도 쉬지 않고 안산으로 향했다. 어떨 때는 회사에 연차도 냈다. 한 번 작업 나갈 때마다 적게는 4시간, 길게는 8시간 가까이 사진을 찍었다. 고 김현정 학생 어머니는 현정이가 초등학교 때부터 쓴 일기장을 꺼냈다. 현정이의 해진 운동화도, 유품도 하나도 버리지 못했다. 현정이의 방에는 교복이 걸려 있었다(사진). 이 기자는 아이들의 방을, 유품을, 부모들의 한을 카메라에 담았다. 어찌 보면 이 사진 작업은 치유의 과정이었다. 2015년 4월16일 이명익 기자를 포함해 사진작가 16명이 작업한 ‘아이들의 방’이 전시되었다. 이 기자는 2015년 5월 문화예술인들이 낸 ‘세월호 정부시행령 폐기 촉구 선언’에도 동참했다. 그렇게 청와대와 문체부가 관리했다는 블랙리스트에 ‘이명익(사진가)’ 이름이 올라갔다. 


청와대와 문체부는 블랙리스트를 관리하며 한편으로는 우군화 작업에 나섰다. 문화예술계의 ‘황태자’로 불린 차은택 감독에게 정부 프로젝트가 몰렸다. 차 감독도, 청와대도, 문체부도 부인한다. 차 감독은 박 대통령을 행사 때 먼 거리에서만 보았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청와대에 들어가 박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했다는 증언을 〈시사IN〉이 확보했다(48~50쪽 기사 참조). 이명익 사진기자가 그랬듯 우리는 기록의 힘을 믿는다. 취재하고 확인하고 세상에 알릴 것이다.

기자명 고제규 편집국장 다른기사 보기 unjusa@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