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6일 서울 중구의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싱크탱크 ‘정책공간 국민성장’ 발족식이 열렸다. 야권의 유력 대선 주자인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주도해 만들고, 학자와 전문가 500여 명이 초기 멤버로 참여했다. 사실상 ‘문재인 대권 출정식’이나 다름없는 자리였다.

연구소장을 맡은 조윤제 교수(서강대 국제대학원)의 인사말에 이어, 자문위원장을 맡은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80)가 축사에 나섰다. 청중 대부분은 다음 순서인 문재인 전 대표 연설을 기다리던 참이었고, 경제계 원로인 박승 전 총재의 축사에 관심을 갖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기류는 순식간에 반전된다.

“여러분(한숨), 지금 우리나라가 대단히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습니다!” 흔한 인사말도 없었다. ‘참석해주신 내·외빈 여러분’을 찾는 전형적인 축사 도입부를 뭉텅 덜어내고, 박 전 총재는 곧바로 본론으로 치고 들어갔다. 한숨 한 번으로 느슨하던 좌중을 단번에 집중시키며 분위기를 쥐락펴락했다. 호흡, 성량, 발음, 제스처, 고저장단 모두 80세 원로 ‘한은맨’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전문 연설가의 그것이었다. 연설 중간 중간에는 “여러분 동의하지 않습니까?”라고 되물으며 환호를 유도하는 ‘고급 기술’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연합뉴스
직접 썼다는 연설문도 ‘한은맨’답지 않게 대중적인 비유로 전개했다. 남북관계와 핵 위기를 다루면서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이른바 ‘대북 퍼주기론’을 맞받아칠 때는 구체적 수치를 열거하는 대신 “그때 우리나라가 퍼준 것이 1000만원 월급을 받는 형이 동생을 매년 6000원 도와주는 것이었습니다”라고 알기 쉽게 전달한다.

박승 전 총재는 1961년 한국은행에서 경력을 시작해 학계와 정부와 공기업을 두루 거친 후, 2002년부터 2006년까지 한국은행 총재를 지냈다. 한은법 개정안을 이끌어내 중앙은행 독립성을 크게 진전시킨 총재로 평가받는다. 중앙은행 수장으로서는 이례적인 거침없고 자유분방한 발언으로 몇 차례 구설에 올랐고, 시장에 혼란스러운 신호를 보낸 탓에 여당(당시 열린우리당)으로부터 사퇴 요구를 받기도 했다. 평생 정치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지켜왔다는 이 경제계 원로는, 유력 대선 주자 싱크탱크 출범식이라는 정치의 한복판에서 연설가 데뷔전을 인상적으로 치러냈다.

‘원로’와 ‘경제’라는 두 코드를 갖춘 연설가가 등장하자 문재인 전 대표의 참모들도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한 참모는 김종인 전 더불어민주당 비대위 대표와 박승 전 총재의 프로필을 번갈아 검색하며 나이를 비교해보기도 했다. 김 전 대표는 1940년생, 박 전 총재는 1936년생이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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