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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피망을 먹고 있다

김진영 (식품 MD) webmaster@sisain.co.kr 2016년 10월 21일 금요일 제4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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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반찬을 기획한다. 마치 중요한 프로젝트 보고서를 작성하듯 말이다. 보고서 쓸 때 첫마디가 풀리면 그다음이 저절로 풀리는 것처럼 반찬도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도 한 가지 메뉴가 결정되면 그 뒤부터는 일사천리다.

오늘은 카레라이스(카레)다. 다른 반찬도 필요 없고, 잘 익은 깍두기만 있으면 된다. “아빠 기억나?” “뭐?” “거기 있잖아? 우리 일본에서 카레 먹었던 곳.” “후쿠오카 하카타역 백화점 지하 말하는 거야?” “응.”

카레를 하면 윤희는 꼭 일본 여행에서 먹었던 카레 이야기를 한다. 자기 평생이라고 해봤자 14년이지만 “평생 그렇게 맛있는 카레는 처음이었고, 그 이후로 먹어보지 못했다”라고. 아빠가 해주는 것도 맛있지만, 그 카레와는 비교 불가란다. 윤희가 ‘넘사벽’ 카레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으니 집에서 카레를 만들 때마다 은근히 긴장된다.

ⓒ김진영 제공
카레를 할 땐 먼저 양파를 볶는다. 그리고 믹서에 간다. 피망도 갈고, 감자도 간다. 조금이라도 덩어리가 있으면 윤희가 잘 안 먹는다. 한동안 그렇게 해서 카레를 만들다 채소가 입에 좀 익숙해졌나 싶어서 믹서 대신 칼로 다져서 만들었더니 잘 먹었다. 그다음 번에는 조금 더 욕심을 내 듬성듬성하게 채소를 다졌더니만 믹서에 갈아서 해달라는 ‘오더’가 내려왔다. 2년 가까이 애써 채소에 익숙하게 하려던 계획이 한 방에 무너졌다.

초심으로 돌아가 카레를 다시 만들었다. 내가 카레를 만들 때 신경 쓰는 포인트는 육수다. 카레 가루 안에 고기 육수 맛을 내는 재료가 있지만, 육수에 따라 맛의 깊이가 달라진다. 보통은 닭백숙이나 돼지고기 수육을 만들면 항상 국물이 남는다. 이때 남은 국물을 버리지 않고 지퍼백이나 밀폐용기에 담아서 냉동 보관한다. 나중에 육수로 사용하면 화학조미료 없이도 요리 맛이 좋아진다.

닭백숙·돼지고기 수육 국물을 활용하라

미리 만들어놓은 육수가 없을 때는 급조한다. 고기 볶을 때 약간의 요령만 피우면 꽤 괜찮은 육수를 만들 수 있다. 방법은 이렇다. 채소를 믹서에 가는 사이 프라이팬에 돼지고기를 가장 약한 불에서 굽는다. 조금이라도 온도가 높으면 채소를 가는 사이에 타기 때문이다. 고기에서 기름과 육즙이 나오기 시작한 뒤 시간이 조금 지나면 팬 바닥에 수분이 증발하고 기름과 육즙이 갈색으로 달라붙는다. 바로 그 타이밍에 불을 올려 온도를 높이고 뜨거운 물을 부으면 훌륭한 육수가 된다. 물로 끓이는 것보다 향과 맛이 훨씬 깊어진다. 그다음은 똑같다. 육수가 끓고 있는 팬에 채소 간 것과 카레 가루만 넣으면 끝이다.

이번에 카레를 만들 때는 윤희가 안 먹는 채소 하나를 넣었다. 아무리 꾀어도 먹지 않던 피망이다. 채 썰고 양파랑 같이 볶은 후 피망 조각이 안 보이도록 갈았다. 예전에 표고버섯을 갈아서 넣었는데 귀신같이 알아챈 적이 있었다. 아무리 잘 갈아도 표고의 향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깜박한 실수였다. 전적이 있다 보니 밥 먹을 때 조마조마했다.

“윤, 카레 맛 어때?” “응, 괜찮아. 요번엔 다 갈아서 먹기 편하네.” “근데, 아빠 뭐 뭐 넣었어?” “음… 돼지고기, 양파, 감자, 그리고 피망.” “헉, 피~망!’ 소리를 내고는 그냥 먹는다. 보이지 않으니 상관없다면서 잘 먹는다. 작전 성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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