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 “10월4일이요. 일.공.공.사.” “천사(1004)네, 천사.” 1997년 여름, 부산의 한 레코드점에서 H.O.T. 2집을 구입하는 말간 얼굴의 소년. 바로 드라마 〈응답하라 1997〉 속 강준희(호야)다.  같은 반 친구 윤윤제(서인국)와 전교 1, 2등을 다투지만 운동이며 춤과 노래까지 빠지는 구석이 없다. 예의 바르고 사려 깊은 성격으로 친구들에게도 어르신들에게도 인기 만점이다. 인터넷 소설에나 등장할 법한 ‘사기 캐릭터’이지만 해마다 10월4일이면 준희가 떠오르고 가슴 한구석이 짜르르해진다. 미련할 정도로 아련했던 준희의 첫사랑 때문이다.

준희는 윤제에게 한눈에 반했지만 윤제의 관심은 오로지 성시원(정은지)뿐. 게다가 윤제는 준희가 자신의 생일인 ‘1004’ 번호로 삐삐 음악 선물을 보내도 발신자가 누군지 짐작조차 못하는 둔하디 둔한 녀석이다. 오히려 준희도 시원이를 좋아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고, 준희의 고백마저 농담으로 여기고 웃어넘긴다. 답답한 윤제 탓에 시청자가 더 가슴치게 되는 이 짝사랑은 1997년부터 2005년까지, 고향 부산에서 대학 진학 후 서울까지 이어진다. 윤제와 시원이의 사랑을 위해 자신의 마음을 정리하기로 결심한 준희에게 윤제는 백허그로 마지막 인사를 대신했다. 그동안 윤제도 뒤늦게나마 준희의 마음을 짐작하고 있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우일 그림
시청자의 기억 속에서는 준희의 비중이 주연 못지않았던 듯하다. tvN이 개국 10주년을 맞아 실시한  ‘베스트 케미’를 뽑는 누리꾼 투표에서 10위권 내에 이름을 올린 것은 윤제·시원 커플이 아닌, 바로 윤제·준희 커플이었다. 후속작 〈응답하라 1994〉에서도 준희는 친구들과 함께 카메오로 출연했다. ‘쓰레기’가 등굣길 버스에 오르는 준희를 보자마자 ‘천사같이 생겼네’라고 생각하는 장면은 〈응답하라 1997〉을 사랑했던 시청자에게 ‘1004’ 준희의 추억을 곱씹게 하기에 충분했다.

‘알고 보니 남장 여자’라며 얼버무리지 않고

준희 캐릭터가 받은 사랑만큼이나 논란도 적지 않았다. 청소년 성 소수자로서 준희가 현실 속에서 마주했을 혐오와 차별을 건너뛴 채, 그저 피상적으로만 성 소수자 캐릭터를 소비했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응답하라 1997〉이 종영하고 4년여가 흐른 지금까지도 여전히 텔레비전 속에서 성 소수자의 존재는 지워지기에 급급하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지난해 11월 여고생 간의 키스신을 방송했다는 이유로 JTBC 드라마 〈선암여고 탐정단〉에 ‘경고’를 내렸다. 남자에게 이끌리는 감정을 깨달은 남자 주인공이 잠시 혼란에 휩싸였다가, 상대가 남장 여자임이 밝혀진 뒤부터는 안도하는 등 엇비슷한 멜로 드라마의 포맷을 답습해버리고 마는 드라마도 부지기수다.

하지만 준희가 동성인 윤제에게 느끼는 감정은 사춘기의 일시적인 혼란이나 친구를 향한 동경 따위로 에둘러 얼버무려지지 않았다. 분명한 ‘사랑’의 감정을 일관되고 명징하게 제시한 것만으로도 준희는 기존 드라마의 성 소수자 캐릭터보다 한층 진일보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준희가 윤제와 살던 집을 떠나는 회차의 제목은 ‘첫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다).

〈응답하라 1997〉의 마지막 회에서 2012년의 준희는 고교 동창회가 끝난 뒤, “데리러 올 사람이 있다”는 말과 함께 누군가가 몰고 온 빨간 스포츠카를 타고 사라졌다. 드라마 속 시간대로라면 준희는 1980년생, 올해 10월4일이면 37번째 생일을 맞는다. 서른일곱의 준희는 지금 행복할까. 아마 그럴 것이다. “불편함을 껴안지 않으면 우린 평생 가짜를 진짜로 오해하며 살아가야만 한다”라며 자신의 감정 앞에서 도망치지 않은 채 열여덟을 통과한 강준희니까.

기자명 중림로 새우젓 (팀명)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