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통. 테니스공이 튀어나가자 한 남자가 공을 쫓아간다. 효과음도 없는데 마치 공 튀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다. 빨간 모자와 빨간 스웨터로 멋을 낸 새침한 엘제는 이제 더는 테니스를 못 치겠다며 호텔로 돌아가겠다고 한다. 엘제와 대조적으로 파란 모자와 파란 스웨터를 입은 시시는 사실 엘제와 테니스를 치고 싶지 않지만 엘제를 붙잡는다. 반대로 더 함께 있고 싶은 남자 파울은 그만 들어가라고 말한다. 테니스공 하나와 짧은 대화, 인물 간의 사소한 승강이만으로 〈엘제 양〉은 우리를 20세기 초 부르주아지의 매력적이지만 뒤틀린 세계로 안내한다.

엘제는 자기 방으로 돌아가는 짧은 시간에도 파울, 입구에서 마주친 노신사, 로비의 잘생긴 청년까지 여러 남자가 자신을 탐하는 시선을 느낀다. 그럴수록 엘제는 마음속으로 속삭인다. ‘전 누구에게도 마음이 없어요. 난 아무도 사랑하지 않아.’ 그러나 엄마가 보낸 속달 편지 한 장에 엘제의 도도한 세계는 무너져 내린다.

소송에 휘말린 아버지에게 급히 돈이 필요하다. 무려 3만 굴덴(옛날 금 및 은 화폐의 이름. 2002년까지 네덜란드 화폐 단위). 엄마는 엘제에게 마침 같은 호텔에 머물고 있는 그림상 폰 도르스데이 씨에게 돈을 부탁해보라고 한다. 그는 바로 엘제가 입구에서 마주친 재미도 없고 능글맞은, 그렇지만 그걸 교양으로 포장한 늙은이다. 부탁은커녕 마주치기도, 말을 섞기도 싫은 탐욕스러운 영감탱이. 하지만 돈을 구하지 못하면 아버지는 구속된다. 절망에 싸인 엘제. 창밖에는 알프스의 저녁노을이 보랏빛으로 지고 있다.
 

마침내 결심한 엘제는 가장 매혹적인 옷을 고른다. 깊이 파인 검은색 드레스에, 마지막 두 켤레 남은 살짝 찢어진 짙은 실크 스타킹을 신고, 하얀 숄을 어깨에 두른다. 어떤 남자도 만면에 미소를 띨 아름다운 복장으로 로비에 나선다. 엘제는 자신의 주변을 맴도는 폰 도르스데이의 시선을 느낀다. 어둠이 깔린 산책길에서 도르스데이는 탐욕의 정체를 드러낸다. 엘제의 생각보다 더 끔찍한 제안이었다. “3만 굴덴을 주겠다. 갚지 않아도 상관없다. 대신 나의 호텔 방에서 15분만 너의 아름다운 육체를 감상하게 해달라!”

값비싼 옷과 고상한 교양으로 휘감았지만 젊음과 육체를 돈으로 거머쥐려는 도르스데이의 시커먼 얼굴과 얼어붙어 시체처럼 새하얀 엘제의 얼굴이 대비된다. 과장된 예의와 낭만으로 치장된 시대, 도도하게 순수한 사랑을 꿈꾸는 한 젊은 여성의 몸과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결국 엘제는 자신을 향한 세상의 폭력과 욕망, 그리고 위선 앞에 자기가 가진 가장 아름다운 것을 내던진다.

소녀와 세상 간의 추악한 결투

이탈리아 작가 마누엘레 피오르는 이 짧지만 아름답고 비극적인 이야기를 무겁고 탁한 수채화로 그렸다. 흔히 수채화라고 하면 색이 은은하게 번지는 맑은 그림을 연상한다. 그렇지만 피오르는 아름다운 이탈리아 휴양지에서 벌어지는 한 소녀와 세상 간의 추악한 결투를 낮은 채도의 어둑어둑한 그림으로 표현했다. 상대적으로 밝은 전반부조차 어둠의 전조가 드문드문 드리운다. 그 속에서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엘제의 아름다움은 더욱 빛나고 그래서 슬프다.
 

〈엘제 양〉 아르투어 슈니츨러·마누엘레 피오르 지음, 마누엘레 피오르 그림, 김희진 옮김, 미메시스 펴냄

그래픽 노블 〈엘제 양〉은 오스트리아 작가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소설 〈엘제 아씨〉를 마누엘레 피오르가 자신의 스타일로 재해석한 것이다. 피오르는 아름답지만 씁쓸한 사랑 이야기 〈초속 5000킬로미터〉를 통해 2011년 앙굴렘 국제 만화 페스티벌에서 대상을 받을 만큼 자신의 스타일이 확고한 작가다. 멋진 그래픽 노블을 소개하는 출판사 미메시스에서 〈엘제 양〉을 작품 분위기에 어울리는 폰트까지 세심하게 신경 써서 완성도 있게 만들었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가을 저녁 어스름에 어울리는 그래픽 노블이다.

기자명 박성표 (월간 〈그래픽노블〉 편집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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