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에 이미 〈미쉐린 가이드〉 한국판(한국어판이 아니라)이 나온 적이 있다. 여행지 소개 위주인 미쉐린 ‘그린 가이드’였다. 이 그린가이드에 벽제갈비, 동대문 닭한마리집 등 한국 식당 100여 곳이 소개된 바 있지만, 여기에는 이른바 ‘별점’이 없었다. 11월에 발표되는 서울 편이 별점으로 식당을 쥐락펴락한다는 진짜배기 〈미쉐린 가이드〉다. 표지가 빨간색이어서 ‘레드 가이드’라고도 불린다.
〈미쉐린 가이드〉는 우리가 잘 아는 프랑스의 타이어 회사 미쉐린이 만든다. 1900년 처음 세상에 선보였으니 100년도 넘었다. 원래 타이어 교체법 같은 정보가 담긴 책이었다가 자동차 여행자를 위한 식당 정보서로 특화했다. ‘암행어사식’ 식당 방문과 별점 부여로 막강한 권위를 누리면서 116년 동안 유지돼왔다. ‘미식계의 바이블’로 통하면서 국내 미식가 사이에서도 모르는 이가 없다.
막상 실물을 접하면 별것 아닐지도 모른다. 굉장한 ‘미식 리뷰’가 있으리라 기대하면 오산이다. 책 속에는 식당 사진, 간단한 소개, 전화번호, 영업 시간 따위만 들어간다. 최근 식당에 대한 코멘트가 늘어나는 추세지만, 책 구성 자체만 보면 흔하디 흔한 음식 소개 책자다.
하지만 이 가이드북이 비밀의 봉인을 풀 때마다 그 나라의 미식 지형이 흔들렸다. 2007년 아시아 최초로 도쿄 편이 발간됐을 때 일본 전체가 들썩들썩했다. 〈미쉐린 가이드〉는 도쿄 식당 8곳에 최고 등급인 별 세 개를 주었다. 별 세 개는 ‘이 식당의 음식 맛을 보기 위해 여행을 떠날 가치가 있다’라는 의미다. 당시 별 세 개를 받은 식당은 파리 10곳, 뉴욕 3곳, 런던 1곳에 불과했다.
당시 일본은 이미 나름대로 레스토랑 비평 문화가 탄탄히 자리 잡은 나라였다. 각종 매체에서 앞다투어 식당 비평을 쏟아냈고, 미식 서적 영화 등이 큰 인기를 끌었다. ‘레스토랑 순위 매기기’는 오히려 일본인들의 장기였다. 그러나 〈미쉐린 가이드〉가 등장하면서 일순간 일본 미식계가 평정됐다. 일본 미식 비평가 사이에서도 “프랑스인의 잣대로 일본 문화를 평가했다”라는 반발이 터져 나왔다.
〈미쉐린 가이드〉의 본국인 프랑스에서도 논란은 있었다. 2003년 별점이 3개에서 2개로 강등될 거라는 소문이 돌던 프랑스 음식점의 스타 요리사가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가이드북의 평가로 인한 압박이 자살 원인으로 지목됐다. 한때 ‘안티 〈미쉐린 가이드〉’ 움직임이 일기도 했다.
“〈수요미식회〉 확인 수준 아니겠나”
지난 9월 〈미쉐린 가이드〉가 출간된 중국 상하이에서도 사고가 있었다. 별 한 개를 받은 퓨전 레스토랑 ‘타이안 테이블(泰安門)’이 주변 음식점들의 신고로 영업이 정지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 식당은 주택 밀집 지역에서 식당 영업 허가를 받지 못하자 일종의 ‘프라이빗 클럽’ 형태로 운영해왔다. 고객이 벨을 울려야 문을 열어주고, 인터넷 사이트로만 예약을 받는 방식이었다. 메뉴는 1인당 988위안(약 16만4000원), 1288위안(약 21만4000원)짜리 두 가지였다. 한국인 블로거가 올린 방문기가 있을 정도로 촉망받는 식당이었지만, 결국 가이드에 등재된 지 이틀 만에 문을 닫고 이전 개업을 준비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서울 편 발간을 앞두고 국내 미식계의 반응은 엇갈린다. 황교익 맛 칼럼니스트는 “상업회사의 평가서에 불과하다. 〈미쉐린 가이드〉 덕에 한국의 외식 문화가 발전할 것이라는 이야기는 문화 사대주의다”라고 비판했다. 프랑스의 미식 기준으로 한국의 독특한 음식 문화를 평가할 수 없으리라는 지적이다. 반면 박정배 음식 칼럼니스트는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한식을 프랑스인의 미식 기준으로 평가받아보는 것도 괜찮다”라고 본다. 유럽·미국의 ‘미쉐린 스타 셰프’ 밑에서 수련한 한국인 요리사가 국내에도 많이 활동하고 있는 만큼 우리 외식 산업의 파이를 키울 수 있는 기회라는 이야기다.
식당 평가서가 자리 잡을 수 있는 전제는 외식업의 규모가 아니다. ‘음식 비평 인프라’의 질이다. 얼마나 많은 비평가들이 얼마나 다양한 잣대로 한 사회의 음식 문화를 논하고 있느냐가 핵심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은 걸음마 수준이다. 20세기에 비해 폭이 넓어졌다고는 하지만, 음식 비평의 주류는 여전히 ‘맛집 소개’에 머물러 있다. 블루리본 서베이, 코릿(koreat) 같은 레스토랑 평가 시스템도 이미 충분하다 싶을 정도로 활성화되어 있다. 식당 평가는 이미 차고 넘친다는 이야기다.
여기에 미식계의 바이블까지 들어온다면? 한 방송사의 음식 전문 PD는 이렇게 말한다. “〈미쉐린 가이드〉가 우리도 몰랐던 훌륭한 식당을 소개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그들 역시 우리 사회의 음식 비평 콘텐츠에 기대어 식당을 선별할 것이기 때문이다. 〈수요미식회〉 같은 데 나온 유명한 식당을 다시 확인하는 수준에 머무를 것이다. 우리 음식 비평의 지형이 고만고만하기 때문이다.”
일본인 야기 나오코가 쓴 책 〈레스토랑의 탄생에서 미슐랭 가이드까지〉는 프랑스의 음식 비평 문화가 어떻게 흘러왔는지 설명한다. “이전과 다른 각도에서 먹는 것을 고찰하고 이를 글로 남김으로써 비옥한 음식 문화를 키우는 것”이 음식 비평의 요체라는 지적이다. 〈미쉐린 가이드〉 출간을 계기로 우리는 음식 문화의 ‘양질 전환’을 이룰 수 있을까. 순서가 바뀐 것 같아 좀 찜찜하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