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밖에서 이름을 애타게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학습지 선생님이 오기로 한 날이다. 일주일은 왜 이렇게 빨리 돌아오는 걸까. 아직 숙제를 다 못했는데…. 재빨리 장롱 안으로 들어가 숨을 죽인다. ‘집에 아무도 없으니까 빨리 가주세요.’ 간절히 빌면서.

양정현씨(29·가명)는 방문 학습지 선생님을 ‘극혐’하던 어린이 중 한 명이었다. 집에 없는 척하기 일쑤였고, 학습지를 몰래 찢어버리고선 모른 척했다. 잃어버렸다고 한 적도 있었다. ‘고자질쟁이’ 선생님이 다녀간 후에는 부모에게 눈물 쏙 빠지게 혼나는 날이 부지기수였다.

그런 양씨는 요즘 일주일에 한 번 회사 근처 카페로 방문해주는 학습지 선생님을 기다린다. 어린 시절 울면서 하던 학습지를 제 손으로 직접 신청하고, 스스로 번 돈을 매달 낸다. 물론 숙제를 미루던 버릇은 쉽게 없어지는 게 아니라서 요즘도 벼락치기를 하곤 한다.

양씨처럼 학습지를 하는 성인이 꾸준히 늘고 있다. 유아나 초·중·고교생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학습지 시장의 새로운 풍경이다. 출산율 저하에 따른 학령인구 감소로 침체가 예상됐던 학습지 업계가 예상치 못한 새로운 시장을 만났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0년 868만명이던 학령인구는 2030년 663만명으로 급감한다. 학습지 업체 처지에서는 새로운 시장 개발이 간절했다. 그런 점에서 성인 회원은 ‘굴러들어온 복’이다. 학습지를 통한 성인 평생학습 시장은 업체들의 마케팅 성과라기보다 소비자들의 자발적 참여로 만들어진 시장에 가깝다.

ⓒ시사IN 윤무영방문 학습지 선생님이 머무는 시간은 10분 정도. 수업이라기보다는 진도 체크에 가깝다. 하지만 ‘내가 원해서’ 시작했기에 성인 학생의 열의는 높을 수밖에 없다.
물론 학습지 시장의 ‘전통 고객’이 학생인 만큼, 회원 비율을 따져보면 여전히 학생 회원 비율이 월등히 높다. 그러나 성인 회원의 증가세는 업계 관계자들도 놀랄 정도로 눈에 띈다. 교원그룹 커뮤니케이션팀 김건희 과장은 “전체적인 숫자만 놓고 봤을 때 성인 회원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아니지만, 증가폭이 확실히 눈에 띄긴 한다. 홈페이지에 ‘어른도 학습하는 구몬’이라는 별도 코너를 만드는 등 내부에서도 대응 전략을 논의하는 중이다”라고 말했다.

구몬학습의 경우 성인 회원 집계를 시작한 3년 사이에만도 회원 증가율이 77%가 넘는다. 성인 회원 대부분은 중국어·일본어·영어 등 외국어 분야 수강에 집중돼 있다. 대교의 경우 교원에 비해 성인 시장 개발에 훨씬 적극적이다. 대교가 내놓은 성인용 중국어 학습지 ‘차이홍 비즈’는 비즈니스 시장을 타깃으로 원어민 강사가 학습 내용을 관리해준다. 기존 학습지보다 비싼 가격으로 운영되는데도 2015년 영업이익만 12억원을 거뒀다. 2014년에 비해 144% 이상 성장한 수치다.

성인들이 학습지를 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양씨처럼 방문 학습지에 대한 ‘추억담’ 하나쯤 있는 2030 세대뿐 아니라 중장년층도 그 수가 꽤 된다. 다만 학습지를 하려는 목표 자체는 다소 다르다. 중장년층의 경우 승진·이직 등 자기계발에 중점을 둔 경우가 많고, 2030 세대는 그보다는 취향의 확대에 더 방점을 두고 있다. 외국 드라마를 자막 없이 보고 싶다거나, 좋아하는 연예인의 말을 통역 없이 알아듣고 싶다거나, 취미와 관련한 정보를 번역을 거치지 않고 읽고 싶다거나 하는 식이다. 드물긴 하지만 노인의 경우 치매 예방을 목적으로, 임신부의 경우 태교를 목적으로 학습지를 푸는 사례도 있다.

‘미식’ ‘덕질’ ‘피규어 구매’ 등 매년 다양한 테마를 정해 일본 여행을 즐기는 회사원 강승희씨(32·가명)는 학습지의 장점으로 사소한 성취감을 꼽는다. “새벽 시간과 퇴근 시간을 이용해 학원을 다녀본 적도 있는데 야근이나 회식, 집안 행사가 겹치다 보면 못 가는 날이 더 많았다. 학원은 수업 시간도 맞춰야 하고, 이동하는 시간도 있고…. 그러다가 점점 안 가게 된다. 인터넷 강의도 들어봤는데 집중하기 어렵더라. 그런데 학습지 분량은 부담스럽지도 않고, 짧은 시간이지만 선생님이 내가 원하는 시간과 장소로 직접 와서 진도 체크를 해준다. ‘내가 바쁜 와중에도 이 정도는 했다’ 하는 작은 성취감이랄까. 사회생활하다 보면 그런 감정을 느끼기 어렵지 않나.”

진입 장벽이 낮다는 것도 장점이다. 기초가 너무 없을 경우 학원을 다니는 것도, 독학을 하는 것도 막막하다.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나만 모르는 건 아닐까’ 하는 부끄러움까지 더해지면 학원을 찾아가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학습지는 기초가 전혀 없어도 상관없다. 학습지 자체가 학년이나 나이가 아닌 개인 학습능력에 맞춰 공부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인용이 따로 없다. 레벨 테스트를 거쳐 유아부터 성인까지 자신의 수준에 맞춰 단계를 정하고 공부할 수 있다.

한 달 수강료가 10만원 이상인 학원비나, 몇십 만원의 최초 투자비용이 드는 온라인 강의에 비해 훨씬 저렴한 가격도 학습지에 대한 진입 장벽을 낮추는 데 일조한다. 어떤 과목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월 3만원대면 학습지를 받아볼 수 있다.

물론 주 타깃이 학생인 만큼 큰 글씨와 알록달록한 교재를 ‘견뎌야’ 한다. 그러나 교재를 넘기다 보면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소소한 즐거움이 있다. 이주경씨(28)는 학습지 맨 첫 장의 학습 통신문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이런 거 오랜만에 받아보니까 기분이 새롭더라. 어렸을 때는 여기에 엄마 확인 받는 게 그렇게 싫었는데, 이제는 다 풀고 나면 엄마한테 서명해달라고 하고 싶다.”

치매 예방·태교를 위한 학습지 풀이도

그래서 기자도 직접 해봤다. 먼저 서너 군데 학습지 홈페이지를 통해 나에게 필요한 학습지를 찾아본 후 한 곳을 정해 온라인으로 상담 신청을 했다. 몇 시간 뒤 관할 지역 담당자에게 전화가 왔다. 이튿날 학습지 선생님이 레벨 테스트지를 들고 사무실로 왔다.

통화 당시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일본어를 배웠다는 이야기는 왜 했을까. 일본어 성적표의 처참함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레벨 테스트지를 앞에 놓고 한숨이 절로 나왔다. 선생님이 건넨 테스트지에는 채소와 강아지, 꽃 등이 알록달록 그려져 있고 그 밑에는 일본어만 적혀 있었다. 한글이라고는 ‘읽어보세요’라는 지문뿐이었다. 20년 전 수업 시간에 ‘그렸던’ 히라가나에 대한 기억을 쥐어짜내 더듬더듬 몇 글자를 읽었다. 물론 선생님의 답은 예상대로였다. “기초부터 합시다. 다른 사람들도 다 비슷해요. 하다 보면 다시 기억 날 거예요.”

선생님이 기초 단계 학습지 스무 장(일주일치)과 히라가나·가타카나 쓰기 노트를 링으로 묶어 건넸다. 깍두기 노트(칸 공책)는 오랜만이었다. 노트를 들춰보는 동안 선생님은 학습지를 넘기며 빨간 색연필로 ‘월·화·수…’를 적어줬다. “이제부터 ‘나는 아기다’라고 생각하면서 하면 돼요. 밀리면 제가 혼내야 할 일이 생길 수도 있겠네요. 너무 무서워하지 마세요(웃음).”

방문 학습지 선생님이 머무는 시간은 10분 정도. 수업이라기보다는 진도 체크에 가깝다. 방문 선생님은 일주일 동안 공부한 내용을 점검해주고, 앞으로 공부할 내용과 분량을 정해준다. 서울 중구지사에서 일하는 고숙영 선생님의 경우, 자신이 담당하는 40여 명 중 7명이 성인 학생이다. “어른의 경우 공부에 대한 동기 부여도 확실하고,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서 그런지 더 열심히 해요.”

진도표에 따르면 1년6개월에서 2년 정도 꾸준히 하면 원서를 읽을 정도의 수준이 된다. 물론 이후 회화까지 원한다면 학습지 이외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학습지 선생님이 방문하면 문을 걸어 잠그고 숨던 어린이들이 ‘어른이’로 자라 다시 학습지 선생님을 기다린다. 평생직장의 개념이 사라지고, 평생 공부가 화두가 된 시대가 만들어낸 풍경이다.

기자명 장일호 기자 다른기사 보기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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