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는 거의 매일 재판정에서 “억울하다”라는 말을 들었다. 원고·피고·피고인 할 것 없이 법정에 선 사람은 제각각 억울함을 호소했다. 무고하고 선량한 사람만 그런 게 아니었다. 중범죄자도 제 나름의 사연을 털어놓았다. ‘왜 억울한가’를 되새기는 시간이 몇 년째 쌓이던 때, 어느새 그 말이 법원 밖에서도 유행처럼 번졌다. 법원까지 오지 않더라도 억울하다는 소리는 여기저기서 들리기 시작했다.

책을 뒤적였지만 명쾌한 게 없었다. 그래서 자신이 겪고 느낀 ‘한국 사회의 억울함’에 대해 법률가의 시선을 담아 글을 썼다. 〈우리는 왜 억울한가〉라는 책을 출판했다. 서울고등법원 판사, 대법원 재판연구관 등을 거쳐 현재 수원지방법원 성남지원에서 근무하는 유영근 부장판사가 저자다.

판사가 사회 저변의 현상을 포착하고 분석하는 건 드문 일이라 눈길을 끌었다. 그의 분석은 억울함의 원인과 타당성 여부를 따지며, 개인이 느끼는 억울함과 사회 안에서 받아들여지는 억울함의 차이가 무엇인지 들여다본다.

ⓒ시사IN 윤무영사건에는 이유가 있고 사람에게는 사연이 있다. 유영근 부장판사는 피고의 사연을 들어주고 판결의 과정을 납득시키면 억울함을 줄일 수 있다고 말한다.

왜 ‘억울함’에 주목했나?

모든 판사는 억울함에 관심이 있다. 판사는 억울함을 가리는 직업이다. 다들 억울해서 법원에 온다. 형사 고소나 민사소송을 할 정도면 이미 억울함이 하늘을 찌르는 사람이다. 소송이나 기소를 당한 사람도 마찬가지다. 잘못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다투는 경우도 많지만, 인정해도 상대방의 과한 대응이나 세상의 매몰찬 대우에 불만을 갖는다. 그러니 다들 법정에 와서 억울하다고 한다. 당사자는 다 ‘내가 사회적 약자인데 왜 내 편을 안 들어주느냐’ ‘왜 내 편을 안 들어주고 중립을 가장해서 강자 편을 드느냐’고 호소한다. 판사는 당사자를 보자마자 누가 강자고 약자인지 알 수 없다. 증거를 보며 억울함을 구제한다.

관심이 출판으로까지 이어지기는 쉽지 않은데.

억울함이 사회 이슈가 되고 유행어로까지 번지는 것을 보며 정리해보고 싶었다. 억울함은 기본적으로 잘못된 일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많은 사람이 늘 억울해하고 불만스러운 상황이 자기 책임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개인 문제가 아니다. 사회 전체의 큰 불안 요인이다. 기존 인문·사회과학 책에서는 체계적인 자료를 찾기 어려웠다. 그래서 재판 경험을 살려 문제 제기하는 형식으로 나름의 이론을 구성해보았다. 억울함의 원인과 타당성 여부를 따져보며, 관련 논의에 물꼬를 트고 싶었다.

‘억울함’을 판단과 감정의 중간 영역인 심정(心情)이라고 봤다.

서양 학문에 연원을 둔 심리학·정신의학 책에는 억울함이라는 감정에 대한 설명이 없었다. 대부분 병리적 심리 현상의 원인 중 하나로 들었다. 그러나 억울함을 판단 내지 인식으로, 사람의 ‘이성적 부분’이 주로 작용한 결과라고만 보는 게 맞을까? 내 경험상 아니다. 영어로 표현해보자면 ‘unfair+feel’이랄까. 한국말로 옮기면, 뭔가 불합리한 것에 대한 감정이다. ‘unfair(부당한·불공정한)’는 객관적 상황에 대해 권력을 가진 사람이 판단한다. ‘feel’은 개인이 느끼는 감정이다. 〈한국인의 심리학〉에서 최상진 교수가 ‘심정’이라는 단어로 한국인의 독특한 심리 현상을 분석했던데, 억울함도 심정의 일종이라고 본다. 이성적 생각과 내밀한 감정의 중간 영역이다.

억울함은 객관적 상황이 문제일 때도, 개인이 과하게 느껴서 문제일 때도 있다?

‘unfair’는 달걀의 노른자, ‘feel’은 흰자라고 비유해보자. 노른자와 흰자의 간격이 좁을수록 좋은 사회다. 간격이 있다는 건 둘 중 하나가 잘못했다는 뜻이다. 사회가 불공정하든지, 개인이 과도하게 느끼든지. 노른자가 잘못되었다면 법이나 판결이 잘못되는 등 구조적 문제다. 책에도 인용했지만, 대법원이 잘못된 판결임을 고백한 1975년 민청학련·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대표적이다. 흰자가 잘못되어온 데도 권위주의 시대가 끼친 영향이 많다. 우리는 권력이 잘못 형성되었다는 의구심이 크다. 압축 성장하면서 시민의식이 따라가지 못한 점도 있지만, 그동안 권력이 정당하지 못한 권위를 강요해왔다.

ⓒ연합뉴스556만원을 훔치고 징역 7년 보호감호 10년을 선고받았던 탈주범 지강헌(왼쪽)은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을 남겼다. 보호감호 제도가 폐지되는 계기가 되었다.
계속해서 터지는 법조 비리가 ‘unfair’에 대한 인식을 더 강하게 만드는 것 같다.

판사로 살면서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 두 가지다. “전관예우가 있느냐”와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맞느냐”다. 기본적으로 법률가를 믿지 않는다는 전제가 깔려 있어서 씁쓸하다. 전관예우 의혹은 법률가가 국민 앞에 감히 자신의 의견을 내놓고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판단을 받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국민이 법률가를 평가하고 개혁할 만한 성질의 것일 뿐이다. ‘지강헌 사건’은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는 이에게도 공감할 만한 억울한 구석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법률가에게 씌워진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냉소적 이미지를 없앨 방법을 궁리하게 했다.

1988년, 556만원을 훔친 지강헌은 징역 7년 보호감호 10년을 선고받았다. 상습범이라는 이유로 가중처벌을 받았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동생 전경환이 70억원을 횡령·탈세하고도 징역 7년형을 받고, 복역 3년3개월 만에 가석방된 후 사면·복권된 사례와 비교되었다.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인질극을 벌이던 그는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을 남겼다. 지강헌 사건이 일어난 다음 해, 보호감호는 7년을 초과할 수 없다고 개정되었다. 2005년에는 보호감호 제도를 규정한 사회보호법이 폐지되었다.

판사가 객관적으로 억울한지가 아니라 개인이 느끼는 억울함에 관심을 가진 점은 특이하다.

억울함을 느끼는 개인 처지에서 먼저 문제를 제기했다. 내 사례를 예로 들었듯, 특별히 내 잘못이 없는 거 같은데도 상대방이 6, 내가 4의 비율로 과실을 나눈 주차장 접촉사고에서 느낀 억울함이나, 집 등기부등본에서 아내가 지분 3분의 2, 내가 3분의 1인 걸 확인했을 때 느낀 억울함 등(웃음) 개인이 느끼는 억울함이 왜 일어났는지를 살피고, 그 억울함에 공감할 수 있는가를 따졌다. 그런 다음 사회공동체의 가치를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그것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를 함께 고민하는 형식이다.

공감하면 억울함이 줄어든다?

사건에는 이유가 있고 사람에게는 사연이 있다. 판사가 법정에 오는 이들의 주장을 다 받아줄 수는 없지만, 그늘지고 소외된 이에게 어느 정도 따뜻한 시선을 보낼 순 있다. 그게 공감대고 경청일 수 있다. 전과 75범의 재판을 맡은 적이 있다. 내 법조 경력 중 최고 전과 기록이었다. 함께 술을 마시던 여자가 택시를 타고 가려 하자, 기사에게 “내 여자 왜 데려가느냐”라고 폭행한 혐의였다. 술도 끊고, 피해자와 합의하도록 노력할 테니 불구속으로 재판받게 해달라고 했다. 팔에 안중근 의사의 ‘견리사의(눈앞의 이익을 보면 의리를 먼저 생각함)’를 새겨놓은 모습이 특이해 그 이유를 묻다 사연을 들었다. 그러다 이 사건 직전 출소한 지 한 달도 안 되어 업무방해 등으로 체포돼 불구속 상태에서 300만원 약식명령을 받은 사실을 발견했다. 벌금도 안 내고 도망 다니다 또 사건을 일으켰기에 구속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을 했다. 그는 전과자 말이지만 친절하게 들어주고 걱정해줘서 고맙다며 수긍하더라.

재판 과정에서 억울함이 누그러들 수 있겠다.

최근 재판도 당사자의 억울함을 최대한 살피기 위해 노력한다. 대법원에서도 심증을 공개하면서 재판을 진행하라고 한다. 예전에는 재판 진행 내내 근엄하게 앉아서 포커페이스로 있다가 결론을 내렸다. 결과를 받아든 당사자는 돌아서서 욕했다. 이제는 ‘지금까지는 원고 쪽이 더 옳아 보인다. 피고는 이런 부분을 소명해야 한다. 이쪽 증거가 부족하다’는 식으로 과정을 보여준다. 나도 재판에서 그런다. “원고·피고·하나님도 알지만 판사가 모르면 재판에 진다. 상대방이 명백히 거짓말을 해도, 지금 증거에 의하면 이렇게밖에 판결할 수 없다.” 이렇게 말해주는 게 중요하다. 그럼 결론에 동의하지 못해도 억울함을 줄일 수 있다.

법정이 낯선 이들은 그저 ‘내가 생각하는 정의가 실현되는 곳’이라고만 믿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 보니 결과에 수긍하기보다는 억울할 수도 있을 것 같다.

ⓒWikimedia1975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 판결에 대해 대법원은 잘못된 판결이라고 인정했다.
재판에서 옳고 그름이 명확하게 갈리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럼에도 재판은 유죄, 아니면 무죄(형사), 승소 아니면 패소(민사) 등 결론을 내야 한다. 판사로서는 당혹스러울 때가 많다. 억울한 사정을 절실하게 구제받기 위해서는, 당사자의 적극적이고 정확한 대응이 최우선 요건이다.

유 부장판사는 또 자신의 경험을 들어 억울함이 아닌 상황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서러움과 억울함을 구분했다. 본인이 속해 있던 고교 동창 조기축구회가 운 좋게 서울 시내 노른자위 학교 운동장과 장기 계약을 체결한 팀에게 셋방살이를 하며 6년을 지냈다. 그러다 한 대형 교회가 운동장을 임차하게 되면서 셋방살이를 끝내야 했다. 마지막 뒤풀이를 하던 날, 한 후배가 외쳤다. “정말 힘없고 백 없으니 억울하네요!”

억울하다는 말이 귀에 꽂힌 깐깐한 법률가는 그걸 지적하고 넘어갔다. “억울하다는 건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쓰는 말인데, 우리가 특별히 부당한 대우를 받은 게 있냐?” 하여간 억울하게 된 게 아니냐는 후배의 대꾸에 꼬장꼬장하게 그는 정정했다. “그럴 땐 힘이 없어서 서럽다고 하는 거다. 억울한 건 남 탓을 하는 거고, 서러운 건 단지 자기 신세가 처량한 것뿐이지.” 유 부장판사는 억울함이 흔해진 요즘, 서러움이 억울함과 혼재된 상황도 꼬집었다. ‘억울함의 범용’이 오히려 상황을 더 오해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억울함과 서러움을 구분했다.

억울함이라는 말이 얼마나 넓게 쓰이고 있는지, 개인 경험을 들어 설명했다. 법률가로서 이는 억울함의 바른 쓰임새가 아니라고 본다. 앞서 말한, 흰자(개인이 느끼는 억울함)의 절반이 서러움의 영역이라 본다. 예를 들어 세입자는 억울함보다는 서러운 경우를 곧잘 목격한다. 그럼에도 이를 억울함으로 표현하면서 곤란해진다. 정치적 공감대가 형성될 경우에는 서러움이 억울함이 되기도 하지만, 서러움과 억울함을 혼용해서 사용하는 건 맞지 않다.

책에서 ‘법조인의 성찰’도 언급했는데.

법률가의 소명은 억울한 사람을 구제하고 합당한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작은 사건 하나도 가볍게 여기지 않고 사회 전체와 역사의 틀 속에서 바라보는 성찰적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기자명 김은지 기자 다른기사 보기 smi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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