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는 고강도 노동을 요구한다. ‘오늘 뭐 먹지’ 고민하는 것부터가 요리의 시작이다. 정한 메뉴에 맞춰 장을 봐야 하고, 장 봐온 음식 재료는 정리하고 다듬어 재료마다 적절한 방법으로 보관해야 한다. 예쁘게 준비된 식재료만 탁탁 썰어넣으면 되는 텔레비전 속 요리 예능 뒤에는 이처럼 보이지 않는 노동이 존재한다.

게다가 온갖 그릇과 조리기구가 동원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설거지는 어찌하나’ 걱정부터 드는 게 한 번이라도 주방에 서본 사람들의 솔직한 심정일 터. 설거지 거리는 식사가 끝난 후에만 나오는 게 아니다. 요리하는 중간에도 만만치 않은 양의 설거지 거리가 나온다.

음식물 쓰레기도 골치다. 이를테면 어떤 음식에 필요한 감자는 반 개이거나 고추 한 개인데, 아무리 식재료를 적게 사와도 반드시 남게 돼 있다. 물이나 마실까 싶어 냉장고를 열었다가 속 시끄러워지기 십상이다. 시들어가는 식재료는 언제나 근심거리다. ‘한 꼬집’ 정도 들어가는 각종 향신료나 ‘1작은술’ 정도 넣는 소스들은 어떤가. 이들을 유통기한 안에 다 먹기란 무한도전에 가깝다. 그렇다고 이런 재료를 빼놓으면 원하는 맛은 절대 나오지 않는다.

ⓒ원파인디너 제공‘원파인박스’는 세계의 식탁을 콘셉트로 만든 쿠킹박스다.
그렇게 식탁 위 음식은 왜소해진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은 ‘사는 일’에만 급급하게 만든다. 왜소한 식탁은 일상도 쪼그라들게 만든다. 먹방과 쿡방 열풍이 쉬이 잦아들지 않는 이유도 어쩌면 이에 대한 보상심리 때문은 아닐까.

이런 현실에 가장 먼저 반응한 곳은 대형마트다. 2013년 이마트는 ‘피코크’를 출시하며 가정간편식 시장을 열었다. 이를 필두로 홈플러스는 ‘싱글즈 프라이드’, 롯데마트는 ‘요리하다’를 론칭했다. 현재 대형마트에는 기존 요식업계의 레시피를 바탕으로 가공한 반조리 상태의 제품이 600여 종 출시되어 있다. 제품을 고르고 포장을 뜯어 냄비나 팬에 부어 가열하거나, 전자레인지에 돌리기만 하면 된다. 메뉴마다 편차가 있지만 기대했던 맛의 70% 이상은 보장한다. 가정간편식 시장은 지난해 1조7000억원을 넘어, 올해는 3조원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마저도 여의치 않다면 밥상을 ‘차리기’보다 ‘받는’ 쪽을 택할 수도 있다. 장 보고, 요리하고, 설거지하는 시간에 비하면 훨씬 경제적이다. 음식 배달 서비스 애플리케이션 이용이 대표적이다. 이들 업체는 자체 배달원을 갖추고 이전에는 배달되지 않던 식당까지 영역을 넓혔다. 외국 상황도 다르지 않다. 차량 공유 서비스 업체인 우버의 ‘우버이츠(Uber Eats)’ 론칭이 상징적이다. 우버이츠는 런던·파리·싱가포르 등 18개 도시에서 유명 레스토랑의 음식을 집집마다 배달하고 있다. 아마존과 구글이 신선 제품을 배송하기 시작한 것도 이미 몇 년 전 일이다.

맞벌이 가구뿐 아니라 1인 가구 증가세가 가파른 상황에서 푸드테크(Food Tech) 시장의 성장은 필연적이다. 식품(Food)과 기술(Technology)의 합성어인 푸드테크는 스마트폰을 기반으로 한 음식 관련 서비스로, 국내 시장 규모만도 이미 80조원에 이른다.

현재 국내 푸드테크 시장은 단순 음식 배달이나 신선 식재료를 배송하는 것을 뛰어넘어 ‘패스트푸드 2.0’ 시대로 넘어가는 중이다. 쿠킹박스(Cooking Box), 이른바 밀키트(Meal Kit) 시장의 형성이 그 증거다. 이제 맛있는 음식은 줄 서서 기다리지 않아도 택배로 온다. 적은 노력과 시간으로 양질의 식사를 하려는 사람들이 주 고객이다.

ⓒ시사IN 조남진원파인박스 구독자를 대상으로 쿠킹 클래스가 진행됐다.
쿠킹박스에는 전문가의 상세한 레시피와 함께 정량으로 손질된 식재료, 쉽게 구할 수 없는 향신료 등이 계량되어 함께 배송된다. 조리기구만 준비되어 있다면 배달되지 않는 건 셰프뿐이다. 식재료 쇼핑에 들어가는 시간을 아끼고, 재료 낭비를 막을 수 있으며, 음식물 쓰레기도 거의 나오지 않는다. 레스토랑 음식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고급진’ 음식을 쉽고 빠르게 해먹는 즐거움은 덤이다.

‘패스트푸드 2.0’으로 넘어가는 푸드테크 시장

2012년 미국 뉴욕에서 시작된 ‘블루 애프런’은 쿠킹박스의 선두주자다. 현재 블루 애프런은 월평균 800만 개에 이르는 쿠킹박스를 미국 내 가정에 배달한다. 1인용은 물론 가족용이 구분되어 있고, 매일 받을 수도, 주 1회 받을 수도 있다. 블루 애프런의 기업 가치는 2조로 평가된다.

최근에는 언론사까지 시장에 가세했다. 〈뉴욕 타임스〉는 음식·요리 전문 웹사이트인 ‘NYT 쿠킹’을 운영하며 레시피 약 1만7000개를 공개하고 있다. 올봄 〈뉴욕 타임스〉는 식자재 배달업체인 ‘셰프드’와 손을 잡았다. NYT 쿠킹 속 레시피를 직접 구현해보고 싶다면 이제 주문 버튼만 누르면 된다. 미국 내 쿠킹박스 시장은 점점 세분화되고 있다. 채식주의자용 브랜드가 따로 출시되거나, 스무디 키트가 추가되는 식이다. 글로벌 투자은행 ‘파이퍼 제프리’는 글로벌 쿠킹박스 시장이 매년 300% 이상 성장하리라 전망한다.

국내에서도 쿠킹박스 업계의 선두 자리를 두고 이미 여러 업체가 경쟁 중이다. 이미 2013년 창업한 전례가 있다. 전통시장 활성화를 목표로 전통시장에서 구입한 식재료를 레시피와 함께 배송해주는 서비스 ‘쿠킷’이다. 쿠킷이 론칭 1년 만에 사업을 접었던 것에 비하면, 새로 등장한 업체들은 훨씬 다양한 각도로 쿠킹박스 시장에 접근하고 있다.

원파인디너가 10월 중 정식으로 출시할 ‘원파인박스’가 대표적이다. 기존 쿠킹박스가 유명 셰프와 레시피 협업을 하거나 유명 맛집의 메뉴를 집에서 재현하는 ‘국내용’이라면(집에서 받는 ‘쿡방’ 레시피 참조), 원파인박스는 ‘세계의 식탁’을 콘셉트로 했다. 지난여름 시제품을 선보인 프랑스·스페인·그리스에 이어, 터키·체코·멕시코 등 12개국 ‘집밥 정기구독’을 준비 중이다. 외국 대사관이나 문화원과의 협업도 이루어진다.

2014년 창업한 원파인디너는 소셜 다이닝(Social Dining) 업체로 출발했다. 박현린 대표는 창업할 당시 에어비앤비를 통해 자신의 집을 공유했던 데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집이 아닌 음식으로 문화를 공유할 수도 있지 않을까?” 박씨는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 호스트를 모아, 홈페이지에 100여 가지 세계 요리 레시피를 구축·공유했다. 호스트들을 활용해 쿠킹 클래스(요리교실)를 열거나 이들이 만든 식사를 체험하는 자리를 만들기도 했다. 이를 통해 중개 수수료로 수익을 얻는 식이다. 단순히 음식만 파는 게 아니라, 음식에 얽힌 호스트의 이야기를 판매한다. 필요 시 통역을 제공하는 등 이용자 편의도 세심하게 신경 썼다. 에어비앤비의 레스토랑 버전인 셈이다.

원파인박스는 원파인디너가 준비한 소셜 다이닝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고객들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었다. 소셜 다이닝에 참여했던 고객들이 쿠킹박스를 원했다. 세계 각국의 레시피를 집에서 구현하려다 보니 구할 수 없는 식재료가 많았다. 한두 번 쓰고 말 향신료를 사는 것에 부담을 느끼기도 했다. 원파인디너가 해왔던 것처럼 원파인박스에도 단순 식재료뿐만 아니라 레시피를 공유해준 호스트의 이야기와 그 나라의 문화를 담는다. 원파인박스에는 ‘미니 저널’도 동봉되는데 음식에 깃든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는 내용이다.

상세 레시피와 식재료가 배송되기는 하지만 ‘낯선’ 음식에 대한 거리감을 좁히기 위해 원파인박스 고객을 위한 쿠킹 클래스도 운용한다. 9월26일 저녁, 원파인박스에 그리스식 무사카(Greek Moussaka)와 지중해식 토마토 샐러드 레시피를 공유해준 호스트 나카가와 히데코 씨가 서울 연희동에 있는 자신의 집을 오픈했다. 셰프인 아버지를 따라 독일과 스페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나카가와 씨는 〈셰프의 딸〉(마음산책, 2011)과 〈지중해 요리〉(로그인, 2014) 등을 펴낸 저자다. 그의 쿠킹 클래스를 수강하기 위해서는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1년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 원파인박스를 통해 유명 전문가의 쿠킹 클래스 일일 체험이 가능해졌다.

집에서 ‘이런 음식’ 해먹을 수 있을까

나카가와 씨가 원파인박스 구독자 가운데 쿠킹 클래스를 신청한 여덟 명 앞에서 길쭉하게 썰어낸 가지를 접시에 널어 소금을 솔솔 뿌렸다. “가지에서 땀이 날 때까지 기다려야 돼요.” 나카가와 씨 말에 주방에 모인 사람들이 웃음을 지었다. 소금 먹은 가지에서 수분이 나오는 걸 땀으로 표현한 말이었다. 기다리는 동안 양파 반 개, 셀러리 3분의 2줄기, 파슬리 잎과 마늘 두 쪽, 토마토 두 개를 나눠 손질했다. 감자는 7㎜ 두께로 썰어 젓가락이 푹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만 익힌다. 그사이 가지에서 수분이 올라왔다. 물기를 키친타월로 닦아내고 팬에 올리브오일을 달군 후 표면만 노릇하게 구워낸다. 한쪽 팬에서는 우유·버터·밀가루로 만든 베샤멜 소스가 끓고 있다. 자, 이제 그리스식 무사카가 완성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집에서 ‘이런 음식’을 해먹을 수 있을까, 엄두를 낼 수 없었던 음식이 눈앞에서 뚝딱뚝딱 완성되는 동안 무사카의 유래는 물론 올스파이스 파우더를 구하는 법이나 좋은 파르메산 치즈를 고르는 법, 지중해 인접 국가에서 버터는 특별한 날에나 쓰는 거라는 등의 이야기가 오고 갔다. 이처럼 원파인박스를 ‘정기구독’하면 세계의 식탁을 체험할 수 있다.

원파인박스를 비롯한 쿠킹박스 서비스는 ‘다이닝 엔터테인먼트’를 가능하게 만들어준다. 집 전체를 꾸미기는 어렵지만 식탁 위를 풍성하게 만드는 일은 이전에 비해 훨씬 간편해졌다. 누구도 매일 특별한 식사를 할 수는 없다. 그저 한 달에 두어 번, 제철 꽃을 꽂아두고 식탁 매트를 깔고 이전에 시도해본 적 없던 새로운 음식을 올려놓는 동안 팍팍한 일상은 조금 더 견딜 만한 것이 된다.

기자명 장일호 기자 다른기사 보기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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