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24일 밤 9시30분, 서울 이태원의 한 클럽 앞에 400여 명이 줄을 섰다. 드래그 퀸 ‘김치(Kim Chi)’의 공연을 보러 온 관객이었다. 인터넷 예매가 매진되자 현장 표를 선착순으로 구매하려고 사람들이 몰렸다. 공연 시작 2시간 전부터 줄을 섰다. 현장 표 100장이 순식간에 매진되었다.

드래그(drag)란 남성이 코르셋·하이힐·드레스를 착용하고 스펀지를 넣은 가슴과 엉덩이, 화려한 헤어스타일과 화장 등으로 ‘여성적 이미지’를 과장되게 흉내 내는 퍼포먼스다. 드래그를 하는 남성을 드래그 퀸이라고 부른다. 주로 클럽이나 바에서 ‘드래그 쇼’라고 불리는 공연을 한다. 드래그 퀸은 사회가 그리는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의 ‘중간’에 서서 성별 이분법을 흐린다.

ⓒLogo 제공미국 TV에 출연한 사상 최초의 한국인 드래그 퀸 ‘김치’.
드래그 퀸은 성 소수자 공동체의 일부다. 다른 성 소수자들과 함께 탄압받고, 함께 맞섰다. 1960년 이전, 미국 경찰은 ‘사회질서를 해친다’는 이유로 성 소수자들이 모이는 나이트클럽이나 술집을 급습해 동성애자, 드래그 퀸, 트랜스젠더를 체포했다. 이런 탄압에 무력으로 맞서며 미국의 성 소수자 인권 투쟁을 본격적으로 가시화한 것이 ‘스톤월 항쟁’이다. 1969년 6월28일 뉴욕 경찰이 스톤월이라는, 성 소수자들이 다니는 허름한 술집을 습격했다. 경찰이 성 소수자를 체포하자, 이들은 경찰과 맞서 싸웠다. 당시 실비아 리베라 등 여러 드래그 퀸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 성 소수자 인권운동이 주류 운동으로 나오게 된 첫 계기였다(드래그 퀸이 곧 동성애자이거나 트랜스젠더인 것은 아니다. 드래그와 성 정체성은 별개다. 동성애자·이성애자·트랜스젠더·양성애자·무성애자 등 다양한 성 정체성의 드래그 퀸이 존재한다.)

9월24일 좁은 무대에 김치가 등장하자 관객들이 환호했다. 김치는 첫 무대에서 챙이 1m는 될 빨간 모자와 빨간 드레스를 입고 나와 팝송에 맞춰 립싱크 공연을 했다. 남성에서 드래그 퀸으로 탈바꿈한 그의 변신은 그 자체로 행위 예술이었다.

첫 번째 무대 뒤 김치는 옷과 화장을 완전히 바꾼 뒤 다시 등장했다. 커다란 은색 가발을 쓰고,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번쩍이는 화장을 하고 자신이 직접 작사한 노래 〈Fat, Fem, and Asian(뚱뚱한, ‘여성스러운’ 동성애자, 동양인)〉에 맞춰 립싱크 공연을 했다. 뚱뚱하고, 동성애자이고, 동양인인 김치가 비욘세나 마돈나보다 더 ‘센세이션’하다는 내용의 가사다. 1절은 영어, 2절은 한국어였다.

공연이 끝난 뒤 마이크를 잡은 김치는 활짝 웃으며 손가락으로 눈물을 훔쳤다. “한국에서 공연하는 게 제 오랜 꿈이었어요. 드디어 현실이 됐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여기 있는 모든 분들의 손을 잡아드리고 싶어요.” 박수가 쏟아졌다. 김치가 농담을 던졌다. “한국에 오면 저를 아무도 몰라서 길에서 탭댄스를 추면서 구걸해야 할 줄 알았어요.”

한국에서 드래그 퀸이라는 용어는 낯설다. 언론에 등장하는 ‘여장 남자’는 대부분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여성을 희화화하는 캐릭터로 사용됐다. KBS 〈개그콘서트〉의 ‘황 마담’ ‘갸루걸’ 등이 대표적이다. 드래그 쇼 역시 낯설다. 김치가 무대에서 “오늘 처음으로 드래그 쇼를 보러 온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라고 묻자, 관객 중 약 절반이 손을 들었다. 공연장에서 만난 김수영씨(26·가명)는 “넷플릭스에서 〈드래그 레이스〉를 보고 처음으로 드래그 퀸을 알게 됐다. 김치의 스타일을 좋아해 실물로 보고 싶어서 왔는데 상당히 볼만했다. 앞으로도 가벼운 마음으로 드래그 쇼를 직접 즐기고 싶다”라고 말했다.

ⓒLogo 제공〈드래그 레이스〉 올스타 시즌 2 출연자들. 남성에서 드래그 퀸으로 변신하는 것은 그 자체로 행위 예술이다.
“나는 하이패션 모델이자 애니메이션 캐릭터”

김치는 〈루폴의 드래그 레이스〉(이하 〈드래그 레이스〉)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시작됐다. 〈드래그 레이스〉는 미국의 성 소수자를 위한 케이블 채널 ‘로고’에서 방영되는 리얼리티 오디션 프로그램이다. 전설적인 드래그 퀸 루폴 안드레 찰스(이하 루폴)가 도전자를 모아 서바이벌 경쟁을 통해 최고의 ‘드래그 슈퍼스타’를 뽑는다. 2016년 9월12일 진행자 루폴은 에미상 시상식에서 ‘최고의 리얼리티 경쟁 쇼 진행자’ 부문 상을 받았다.

〈드래그 레이스〉는 2000년대에 인기를 끌었던 모든 리얼리티 오디션 프로그램을 합친 포맷이다. 〈아메리칸 아이돌〉 도전자는 노래를 부르고, 〈도전! 슈퍼모델〉 도전자는 사진을 찍고 패션쇼를 하며, 〈프로젝트 런웨이〉 도전자는 옷을 만들고, 〈댄싱 위드 스타〉 도전자는 춤을 배워야 한다. 〈드래그 레이스〉 참가자는 이 모든 미션에 다 대비해야 한다. 지폐로 옷 만들기, 노인들 앞에서 스탠딩 코미디 하기, 록밴드 보컬 되기, SF 영화 예고편 촬영하기, 롤러스케이트 타고 패션쇼 하기 등 어떤 ‘정신 나간’ 미션이 주어질지 모른다. 승자와 패자를 뽑는 규칙은 있지만, 진행자인 루폴 마음대로 규칙을 무시할 때도 있다. 그래서 〈드래그 레이스〉는 모든 오디션 프로그램에 대한 오마주이자 조롱이다. 2009년 시즌 1부터 2015년 시즌 8, 그리고 ‘올스타’ 시즌 2개를 합쳐 10개 시즌을 방송했다.

시즌을 거듭할수록 전 세계에 열성적인 〈드래그 레이스〉 팬들이 생겼다. 케이블 채널 로고는 “꾸준히 시청률이 증가해 시즌 8에는 시청자가 거의 100만명에 이르렀다. 온라인 스트리밍도 조회 수 150만이 넘었다”라고 밝혔다. 팝가수 니키 미나즈, 패션 디자이너 마크 제이콥스, 패션모델 나오미 캠벨 등 유명 인사들도 〈드래그 레이스〉 팬이라고 밝혔다. 〈뉴욕 타임스〉는 ‘왜 패션계는 루폴의 〈드래그 레이스〉에 열광하는가’라는 기사를 통해 창의적이고 화려한 드래그 문화의 영향력을 보도했다.

현재 〈드래그 레이스〉는 〈올스타〉 시즌 2가 방송 중이며, 2017년 시즌 9가 방송될 예정이다. 드래그 퀸 총 100명이 〈드래그 레이스〉에 출연했다. 김치는 그중 유일한 한국인이자, 미국 TV에 출연한 사상 최초의 한국인 드래그 퀸이다. 미국에서 이민자 2세로 태어나 한국에서 잠시 자랐으며, 현재 시카고에서 살고 있다. 김치는 스스로 “하이패션 모델이자 애니메이션 캐릭터”라고 설명하는 전위적인 패션으로 〈드래그 레이스〉 시즌 8 결승까지 올랐다. 결승 무대에서 한복을 현대적인 감성으로 해석한 의상을 선보이기도 했다.

김치는 〈드래그 레이스〉에서 “한국에서는 드래그가 페티시의 일종으로 여겨질 뿐,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언젠가 한국에 가서 쇼를 하고, 드래그 쇼가 하나의 예술 형식이라는 것을 알리고 싶다”라고 말했다. 내한 공연 중에도 “오늘 함께 공연한 서울의 드래그 퀸들에게 박수를 보내달라. 오늘 공연이 즐거우셨다면 앞으로도 이들의 삶을 지지해달라”고 말했다.

기자명 신한슬 기자 다른기사 보기 hs51@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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