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어느 대통령도 해임건의안을 거부한 적이 없고 박정희 전 대통령도 받아들였다. 이는 헌법 질서에 대한 정면도전이고 유린인 만큼 좌시하지 않겠다.”

해임건의안을 통과시킨 야당 원내총무의 말이다. 9월24일 해임건의안이 통과된 김재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과 그의 해임을 거부한 박근혜 대통령을 향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말은 2003년 9월2일,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 홍사덕 원내총무의 발언이다. 김두관 행정자치부 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 표결을 두고서다.

당시 야당은 한총련 소속 대학생들이 경기 포천군 미8군 종합사격장에 진입해 벌인 시위를 막지 못했다며 김 장관의 해임건의안을 발의했다. 겉으로는 시위에 대한 책임을 물었지만, 남해군수 출신으로 노 대통령이 발탁한 김 장관에 대한 ‘비토’였다. 야당은 당시 김 장관의 임명 때부터 ‘코드 인사’라고 비판했다. 당시 김두관 장관 해임건의안은 찬성 150표, 반대 7표, 기권 2표, 무효 1표로 가결되었다. 당시 새누리당 의원은 149명이었고, 민주당 소속 의원은 101명, 자민련 소속 의원이 10명이었다.
 

ⓒ연합뉴스2003년 당시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맨 오른쪽)는 “대통령이 국회 의견(해임건의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헌법을 유린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야당의 선택은 한 가지(탄핵)밖에 없다”라고 밝혔다.

박근혜 대통령은 김재수 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 통과 직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을 밝혔다. 청와대 정연국 대변인은 9월25일 “새누리당에서 이번 해임건의안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요청한 점 등을 감안했다”라고 설명했다.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9월24일 해임건의안 통과 직후 “정세균 국회의장과 더불어민주당은 오늘 저지른 헌정사 유례없는 비열한 국회법 위반 날치기에 응분의 대가를 치를 것이다”라고 반발했다. 정 의장 사퇴를 요구하며 단식을 시작한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도 9월25일 “도둑이 집주인에게 몽둥이를 들고 달려드는 것과 같다. 대통령을 무너뜨리고, 레임덕을 초래하게 하고, 국정이 혼란에 빠지게 하고 그래서 정권을 교체하려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2003년 김두관 장관 해임건의안 당시 한나라당이 쏟아낸 말은, 김재수 장관이나 박근혜 대통령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오고 있다. 2003년 9월5일 최병렬 당시 한나라당 대표는 “대통령이 국회 의견(해임건의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헌법을 유린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야당의 선택은 한 가지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최 대표가 말한 한 가지 선택은 바로 대통령 탄핵 카드였다. 한나라당 소속 의원이었던 홍준표 경남도지사도 당시 “다수결 원칙이 지배하는 국회 의사를 대통령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헌법 위반을 자초하는 것이다. 대통령이 해임건의안을 거부하면 탄핵 절차로 나아갈 수 있다”라고 말했다. ‘대선 불복’ 발언도 나왔다. 김무성 의원은 표결 직전 열린 의원총회에서 “치가 떨린다. 저는 제 마음속에서 노무현을 이 나라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노무현이 계속 이대로 나간다면 우리 당이 노무현의 퇴임 운동을 벌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야당의 길이다”라고 말했다.

정진석 원내대표는 2001년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건의안 국면에 남긴 말이 문제가 되었다. 2001년 9월3일 김대중 정부 시절 임동원 통일부 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당시 통일부 승인을 받고 8·15 통일축전에 참가한 인사의 이른바 방명록 행동을 한나라당이 문제 삼았다(임 장관 해임건의안 표결에는 재적 의원 271명 가운데 267명이 참가했고, 148명 찬성, 119명 반대로 해임건의안이 통과되었다). 당시 자민련 소속이었던 정진석 의원은 임 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이 통과된 뒤 “30년 만에 국무위원 해임건의안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그 자체가 그야말로 간과할 수 없는 소중한 민의의 표출이요, 원의의 결집이다”라고 주장했다.

2003년엔 여당 안에서 ‘야당 목소리’ 나왔지만…

국무위원에 대한 해임건의안은 그동안 81차례 제출되었고, 6차례 통과됐다. 1955년 임철호 농림부 장관, 1969년 권오병 문교부 장관, 1971년 오치성 내무부 장관, 2001년 임동원 통일부 장관, 2003년 김두관 행정자치부 장관의 해임건의안이 통과되었다. 임철호·권오병·오치성 장관은 강제 규정이 있어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임동원·김두관 장관의 경우 대통령이 국회에서 통과한 해임건의안을 따라야 하는지를 두고 법리적 해석이 분분했다. 하지만 임 장관은 해임건의안 통과 하루 만에, 김 장관은 2주 후에 스스로 사표를 냈다. 내용상 국회의 해임건의안을 존중하고 따랐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 집권당인 여당 안에서도 ‘야당 목소리’가 나왔다는 점이다. 2001년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건의안 당시 민주당 이상수 원내총무는 “해임안이 가결될 경우 그것은 국민의 의사로 보고 따라야 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2003년 김두관 행자부 장관 해임건의안 당시에도 집권당 민주당 조순형 고문은 “국회의 해임건의안이 단 한 번도 거부된 적이 없다는 전례를 무시하면 더 큰 정치적 부담이 초래될 우려가 있다”라고 말했다. 법사위 민주당 간사였던 함승희 의원도 “(통과된 해임건의안은) 한나라당의 당리당략용이지만, 적법한 절차를 거쳐 국회에서 의결된 이상 대통령은 그것을 수용하는 게 법리상 옳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번 해임건의안 정국에서 새누리당 내에서는 “일방적인 통과라 해도 의회의 결정이다”라는 말을 누구 하나 꺼내지 못하고 있다.

기자명 김동인 기자 다른기사 보기 astori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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