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는 156㎝였다. 양쪽 엉덩이와 등에는 피멍이 선명했다. 왼쪽 팔꿈치 아래 뼈가 부러졌고, 오른쪽 팔꿈치 위 뼈 일부도 부러졌다. 왼쪽 발은 으깨어져 뼈가 밖으로 돌출되어 있었다. 엉덩이 피부 아래에는 출혈 흔적이 있었다. 일반적인 사후반점(시반)의 색조와는 구별되었다. 시반과 구별되는 피하출혈반은 구타당한 증거로 보였다. 오금 쪽에 찰과상이 있는 것도 각목을 끼우고 무릎 꿇리는 고문을 당할 때 나타날 수 있는 상처로 짐작되었다.


하지만 부검의는 눈을 감았다. 엉덩이 부위를 절개해 열어보지 않았다. 부검의는 사망 시간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기본인 직장(直腸) 내 온도도 측정하지 않았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촉탁 의사였던 부검의 뒤에서 중앙정보부 직원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1973년 10월19일 오후 2시50분 시작된 최종길 서울대 법대 교수의 부검은 이렇게 허술하게 끝났다. 국과수가 내린 사인은 ‘추락사’, 투신자살이었다. 간첩 혐의로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받다 추락사했다는 최 교수는 의문사 1호로 남았다. 고문에 따른 ‘타살’이라는 진실은 30년 뒤에나 밝혀졌다. 만일 부검의가 시신이 말하는 증언에 귀를 기울였다면 이 시간은 단축되었을 것이다.

시신은 말을 한다. 2016년 백남기씨는 317일 동안 많은 말을 남겼다. 증언에 귀를 닫은 건 검찰과 경찰, 그리고 청와대와 여당이다. 경찰의 직사 살수 장면이 담긴 CCTV가 SNS에 공개되었다. 소방서 구급활동 일지, 병원 입원 직후부터 의료기록이 남아 있다. 애써 귀를 닫고 있었던 검찰이나 경찰은 법적 절차이니 부검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가족의 반대는 간명하다. 경찰 손에 숨졌는데, 다시 경찰 손에 백씨를 넘길 수 없다는 것이다. 고약한 비유일지 모르지만, 박정희 대통령의 부검을 중앙정보부가 하겠다고 했다면 영애(박근혜)가 받아들였겠는가?

경찰의 행태는 또 어땠는가? 사과를 거부했다. 검찰은 유가족이 경찰을 상대로 낸 고발 사건을 쥐고만 있다. 불기소 처분이라도 하면 유가족이 법원에 기소를 요구하는 재정신청을 할 수 있다. 그래서 검찰은 미적대고 있다. 검찰은 유가족이 부검을 반대했으니, 그 핑계로 사건 처리를 또 늦출 것이다. 새누리당은 백씨의 죽음을 불법 폭력시위 탓으로 돌렸다. 그가 집시법을 위반했다면 그에 상응하는 책임만 지면 된다. 집회에 나가 구호를 외쳤다고, 밧줄을 잡아당겼다고, 황교안 총리 말대로 시위대 맨 앞에 있었다고 비무장이었던 그가 공권력에 살해당할 이유는 없다.

백씨는 317일 동안 버티며 증언했다. 그가 왜 죽었는지 다 알고 있지만 공권력만 모른 척한다. 우린 지금 어떤 박통 시대를 살고 있는가?

기자명 고제규 편집국장 다른기사 보기 unjus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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