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을 매개로 문화 활동을 하는 어른들이 부쩍 늘었다. 원화 전시는 물론이고, 그림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음악과 연극과 춤이 어우러진다. 독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연극을 하고 노래를 부르고 공동 창작을 하는 등 만능 엔터테이너 작가가 있다면, 그들은 필시 그림책 작가일 것이다. 그림책의 무대가 얼마나 다양하게 넓어질지, 기대만으로도 흥미롭다.

그림책은 독자에게 일련의 글과 그림이 조합된 연속적 장면이 일깨우는 특별한 감각과 정서, 사유를 선물한다. 이 명제를 명징하게 구현하는 그림책이 〈다정해서 다정한 다정씨〉다. 이 책은 ‘어린이용’이 아니다. 아동도서 칸이 아니라 성인 에세이 칸에 진열되어 있다. 작가는 ‘어른 미술’ 동네에서 40여 년 동안 회화와 설치, 조각을 넘나들며 활동해온 세계적 예술가다. 그의 그림과 글을, 그림책 동네에서 30여 년 활동해온 작가가 고르고 엮어서 그림책이라는 그릇에 담아냈다.

〈다정해서 다정한 다정씨〉
윤석남·한성옥 지음, 사계절 펴냄

출신이 남다르니, 책이 담은 이야기도 다르지 않겠는가. 이 책을 집어든 어른 독자에게는 지금까지 읽었던 그림책과는 전혀 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표지에 보이는 등 굽고 얼굴 주름진 할머니 그림은, 책이 이 할머니에 대한, 혹은 할머니가 해주는 이야기일 것이라고 추측하게 한다. 할머니가 등에 업은 달팽이·개미·나비는 무슨 뜻일까. 그렇게 느리고 작고 가벼운 것들이 할머니의 등을 굽게 했다는 말일까, 아니면 등이 휘도록 얹혀 있던 무거운 짐을 이제는 홀가분하게 여기게 되었다는 말일까.

층층이 얹힌 세 겹의 ‘다정’

그런 생각으로 보면 그림 위의 제목 ‘다정해서 다정한 다정씨’가 세 줄로 배치되어 있는 것이 예사롭지 않다. 세 겹의 ‘다정’이 달팽이와 개미와 나비처럼 할머니의 등에 층층이 얹혀 있으니, 다정도 무거운 짐이었을까. 그러다 이제는 나비처럼 팔랑거리게 된 것일까.

이렇듯 책은 먹먹하게 읽힌다. ‘검은 자루 속에 숨어 숨죽이고 있다’가 ‘밤마다 정신 잃는 꿈’을 꾸면서 ‘내가 없어졌으면 좋겠어’ 하고 중얼거리는 화자에게 마음이 겹친다. ‘우물 찾아 3만 번 비인 두레박을 드리’우는 화자의 손 대신 달린, 마치 병든 선인장 가지 같은 게 가슴을 찌른다.

하지만 이 작가는 독자에게 가만히 머무르도록 두지 않는다. 그들은 ‘삶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자세를 보인다. 그것은 딸과 어머니에 대한 사랑, ‘더러운 바닷가도 불쌍한 모텔도’ ‘모두 다 똑같이 예쁘다’는 너그러운 시선, ‘그 남루한 모두에게 용서받고 싶’어 기도하는 낮아짐으로 이어진다. 아, 그렇게 낮아지면서 할머니가 등이 굽었구나. ‘꼬부라진 등도 쓰임새가 있다’면서 허허로운 미소를 띠고 있다.

그래서 독자는 마무리 장면, 그네 위의 달팽이 한 마리와 달팽이 등에 얹힌 집 한 채, ‘예쁘고 아름다워라/ 세상에 고마워라/ 아득하니 슬퍼라’와 같은 맥락 없어 보이는 글 사이에 의미를 넣을 수 있다. 표지의 할머니 허리에 매인 가느다란 끈 한 줄은 그넷줄을 모티브로 그림책 전체에 활용되면서 위태로운 흔들림, 불안한 정지, 경쾌하고 즐거운 유희의 감각을 다양하게 제공한다. 그림과 글 그리고 인생에 대한 상당한 경험과 성찰을 요구하는 그림책. 작가가 나직나직 이야기를 들려주는 작은 전시장에 온 듯한 그림책. 이 책을 읽고 나면 동네 놀이터 그네에라도 앉아 잠시 흔들리고 싶어지지 않겠는가.





기자명 김서정 (동화작가∙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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