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회에서 김수현 작가가 가부장제의 한계를 명확히 인식하는 동시에 체제의 개선을 요구해온 과정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작품 속 세부 묘사를 통해 김수현의 진단과 처방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는지 좀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잠시 SBS 〈인생은 아름다워〉(2010)에서 묘사된 태섭(송창의)의 커밍아웃 과정을 보자. 태섭은 3대가 모여 사는 제주도 양씨 일가의 장손이다. 사진작가인 애인 경수(이상우)와 조심스레 사랑을 키워가던 어느 날 태섭은 이복동생 초롱(남규리)에게 경수와 포옹하고 있는 모습을 들키게 된다. 초롱은 모두에게 비밀로 해주겠다 약속했지만, 태섭은 더 이상 거짓으로 살 수 없다고 생각하고 가정 내 실권자인 새어머니 민재(김해숙)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는다. 민재는 충격에 휩싸이지만 이내 태섭을 받아들이고, 다른 가족 구성원들을 설득하는 걸 도와주기로 한다.

김수현은 이 과정을 통해 우리 사회에서 가장 배척받는 존재 중 하나인 성 소수자가, 가장 보수적인 가족 형태인 가부장제 대가족의 논리를 빌려 수용되는 희한한 광경을 그려낸다. 민재는 남편 병태(김영철)를 설득한 뒤 태섭을 포용할 것을 결의하고, 병태가 태섭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시부모를 제외한 가족 전체를 소집해 이 사실을 공표하며 ‘우리 가족이니 집안에서만은 곁눈질받지 않고 지내게 하고 싶다’며 그게 불편한 사람은 집에서 나가라고 통보한다. ‘생래적인 거부감’을 호소하는 태섭의 자형 수일(이민우)도 결국 그 서슬에 눌린다. 민재는 가부장제에서 도덕적·경제적 중심 구실을 하는 가장 내외의 권위로, 당사자가 직접 커밍아웃하며 겪을 가족 구성원의 반감을 진압한다.

ⓒSBS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김수현 작가는 동성애를 수용하는 가부장의 모습을 그렸다.
이를 ‘가부장제가 이토록 포용력이 있다’는 식의 가부장제 찬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 태섭의 연인 경수의 어머니(김영란)는 경수에게 끊임없이 태섭과 헤어지고 전처인 나연(송선미)과 재결합할 것을 요구하고 태섭의 집에 찾아와 두 사람을 떼어놓는 데 협조해줄 것을 요구한다. 아들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가문에는 수치요 남편에겐 대학 총장 당선에 방해가 되는 걸림돌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놀랄 정도로 포용력을 발휘하는 태섭의 가정 반대편에 가문의 명예와 가장의 성공을 위해 개인 희생을 요구하는 경수의 가정을 배치함으로써, 김수현은 가장을 중심으로 수직적 질서를 세우는 가부장제가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 냉정하게 바라본다. 그 수직적 질서는 태섭의 집에서도 탈이 나는데, 태섭의 정체성을 끝내 인정하지 못했던 막내 삼촌 병걸(윤다훈)과 병태 사이의 갈등이 끝내 주먹다짐으로 이어진다.

다른 드라마의 사례도 살펴보자. KBS 〈부모님 전상서〉(2005) 속 자폐 아동 준(유승호)은 가정불화의 원인처럼 묘사된다. 아버지 창수(허준호)는 준이에게 정을 붙이지 못한 채 밖으로 나돌다가 불륜을 저지르고, 말 못할 마음고생을 하던 어머니 성실(김희애)은 이혼을 통보한 뒤 준이를 데리고 친정으로 들어간다. 헌신적으로 준이를 돌보는 데 모든 것을 바쳐야 하는 성실이나, 그로 인해 붕괴되는 가정의 묘사 등은 작품 초반 적잖은 비난을 샀다. 2005년 4월 발표된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의 ‘방송에서의 장애인 차별 실태 여론조사’ 결과 보고서는 이 작품이 장애 아동을 가정의 평화를 깨는 갈등 원인 제공자로 그려 편견을 강화한다고 지적한다. 특히 이혼 후 준이를 돌보던 성실이 직장을 구하느라 더 이상 24시간 아들 옆에 붙어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자 대뜸 “모자란 자식 남한테 어떻게 맡기고…, 모자란 자식의 부모는 부모도 모자랄 수밖에 없는 것”이라며 성실의 선택을 비난하는 시어머니(나문희)나, “저 녀석만 아니면…”이라며 딸의 고생을 안타까워하는 성실의 친정어머니(김해숙)의 대사에서 장애인을 감당해야 할 짐 정도로 여기는 한국 사회의 편견 구조가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 문제로 지적됐다.

동성애와 장애를 받아들이는 가족 모습 묘사

그러나 이로부터 겨우 3개월 뒤 같은 단체에서 발표한 ‘드라마 속 장애인 인권인식 조사 사례 발표’의 결과는 눈여겨볼 만하다. ‘장애인의 긍정적인 인식 변화에 도움을 준 드라마’로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 〈부모님 전상서〉를 50% 내외 지지율로 첫손에 꼽은 것이다. 창수와 창수의 친할머니가 이혼 후 늦게나마 준이를 아들로, 손자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려 노력하기 시작하면서 준이의 자폐 증세가 조금씩 개선되는 모습이 작품 속에서 묘사된 이후의 결과다. 〈부모님 전상서〉는 장애를 가정 불화의 요인으로 만드는 제1원인은 장애인을 제 일원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체제에 있음을 암시하며, 체제가 먼저 장애인과 소통하려는 노력을 기울일 것을 촉구한다. 이러한 주장은 준이의 행보에서 더 직접 드러나는데, 엄마 성실이 취직을 하면서 자연스레 준이를 돌볼 시간이 줄어듦에 따라 준이는 집과 장애인 교육시설을 오가게 된다. 좀처럼 세상에 마음을 열지 않는 것 같았던 준이는 교육시설에서 요리사가 되겠다는 새로운 꿈을 키우게 된다. 김수현은 이러한 변화를 통해 장애는 짐이 아니며, 적절한 노력과 배려가 투입되면 장애인 또한 비장애인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살 수 있음을, 그리고 그 노력과 배려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가족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 전 사회가 지고 있음을 분명히 해둔다.

ⓒKBS 홍보실자폐 아동을 다룬 〈부모님 전상서〉는 장애인에 대한 인식 변화에 도움을 준 드라마로 꼽혔다.
앞서 말한 것처럼 가부장제 대가족은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김수현의 시선을 담아내는 캔버스다. 3대가 모여 사는 대가족 구성이나, 이렇다 할 가풍이 있어서 비슷한 지향을 공유하는 게 아니라 세대별로 다른 가치관을 추구하며 살아간다는 점, 막대한 권위를 지닌 가장이 존재함에도 여전히 그 권위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새로운 문제들에 봉착한다는 점들을 고려해보면, 김수현이 그리는 대가족은 급격한 시대 변화로 인해 세대 간 사고방식의 차이 또한 극심해진 한국 사회에 대한 은유로 볼 수 있다. 김수현은 〈인생은 아름다워〉 속 경수의 가정이나 병걸의 존재 위에 한국 사회의 현실을 투사하는 동시에, 병태와 민재를 비롯한 나머지 가족 구성원을 통해 체제가 융통성을 발휘해 더 다양한 가치를 포용할 여지를 타진한다. 〈부모님 전상서〉에서 묘사된, 준이를 바라보는 가족 구성원의 편견이나 갈등의 원인을 준이에게 돌린 미숙함이 김수현이 내린 당대에 대한 진단이라면, 그를 포용하고 앞으로 전진시키는 묘사는 그에 대한 처방이다.

김수현은 보수적인 당대의 현실을 전복시키거나 새로운 질서를 쓰자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끊임없이 그 폐쇄성과 경직성을 극복하고 폭을 넓혀 더 다양한 가치들을 긍정할 것을 당부한다. 가부장제를 옹호하고 수호하는 것과, 가부장제를 어쩔 수 없는 현실로 인식하되 그 안에서 더 정의로운 체제로 발전하기를 당부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그리고 후자가, 김수현이 지난 40여 년간 한국의 가족을 바라보고 근심하며 노력해온 태도였다.

기자명 이승한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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