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회사에서 편집장을 하던 때 일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개인 레이더망에 삼성 이건희 회장이 보광 피닉스파크에서 슬로프 하나를 독점하고 스키를 즐긴다는 정보가 떴다. 진보 대통령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몇몇 재벌 회장은 이미 외국으로 ‘피신’하고 다른 이들은 숨도 제대로 못 쉬던 시절이었다. 대한민국에서 지금 마음이 가장 불편해야 할 것 같은 사람이 유유자적하고 있었다. 재벌 회장과 스키 그리고 시즌 중 코스의 개인 전용, 그 자체만으로도 그림이 좋은데 그 이면은 더욱 흥미로웠다.

취재기자와 사진기자 한 명씩을 현장에 잠복시킨 끝에 환상적인 장면을 포착했다. 얼마 전 중병을 앓은 이답지 않게 이 회장은 혈색이 좋았다. 종자의 시중을 받는 중세의 기사처럼 천막 안에 위풍당당하게 버티고 앉아 손도 까딱할 필요 없이 옷과 장비를 착용했다. 스키를 탈 때는 경호원이 사방을 에워싸 넘어질 염려가 없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또 한 명이 부지런히 동영상을 촬영했다. 기자가 찍어온 사진을 보면서 ‘저래서야 생전 실력이 늘겠나’ 하며 웃었던 기억이 난다. 사진부장은 그 일련의 사진에 ‘황제 스키’라는 제목을 붙였다.

ⓒ한성원 그림

취재기자가 자기 할 바를 다 하려고 막판에 뛰쳐나가 이 회장과 인터뷰를 시도하다가 경호원에게 달랑 들려 나가는 바람에 삼성은 발칵 뒤집혔다. 삼성에 근무하는 모든 지인이 전화를 걸었다. 제목만이라도 부드럽게 달아달라고 통사정했으나 그마저 듣지 않으니까 상상도 못한 작전을 썼다. 삼성은 이 회장이 스키를 타는 사진과 보도자료를 지방지를 포함한 전 일간지와 통신사, 방송, 주·월간지, 그리고 여성지에까지 서둘러 배포했다. 보도자료에는 이 회장이 평창 동계올림픽의 성공적인 유치와 건강 회복을 위해 스키를 즐긴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주간지인 우리가 발만 구르는 사이 거의 모든 언론이 삼성이 적어준 대로 읽고 써댔다. 나중에 우리가 쓴 ‘이건희 회장은 어째서 저렇게 여유만만할까’라는 기사는 흔적도 없이 묻히고 말았다. 특종을 도둑맞은 것보다 기사가 가십으로 변질한 게 분했다. 참여정부라는 야심찬 이름을 달고 출범한 민간 정부가 핵심 개혁 대상과 처음부터 적절치 못한 관계를 맺은 것 아니냐는 경고음을 낼 기회가 날아갔다. 지지자라도 일찌감치 문제의식을 갖게 됐다면 노 대통령과 참여정부의 운명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때 정보의 과잉 공급 역시 검열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걸 삼성으로부터 배웠다.

군부독재를 겪은 대한민국 국민은 권력자와 국가기관, 그리고 가진 자들이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는 일에 익숙하다. 이런 걸 한류라고 부를 수야 없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대한민국 국민이 과거에 그리고 지금도 너무나 짜증나게 지켜보는 이런 현상이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다. 미국과 유럽의 나라들이 선진국답게 오히려 앞으로 치고 나가는 지경이다. 더구나 진실을 가리고 거짓말을 이용하는 기술은 항생제에 내성이 생긴 박테리아처럼 사악하게 진화했다. 결과는 같을지 모르지만 행태는 매우 낯설고 소름끼친다.

예전에도 권력자들은 국민을 속였다. 예를 들어 1986년 미국 대통령 도널드 레이건은 인질 석방을 위해 이란 정부와 거래한 일이 없다고 잡아뗐다. 고작 몇 달 뒤 새빨간 거짓말로 드러나자 그는 ‘지금도 내 마음과 내 최상의 의식은 그것이 사실이라고 하지만 사실과 증거가 아니라고 말한다’며 빠져나갔다. 그의 얘기 가운데 중요한 점이 있다. 예전의 권력자들은 지지자건 아니건 모두를 속이려고 했다. 그런 뒤에는 사실과 증거가 드러날까 봐, 즉 진실이 밝혀질까 봐 두려워했다. 왜 안 그렇겠는가. 미국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1974년 8월 거짓말을 했다는 죄로 탄핵을 받고 물러나는 수모를 당했다.

그런데 요즘 정치인이 거짓말을 하는 양상은 과거와 사뭇 다르다. 그들은 진실을 다투거나 왜곡하려는 게 아니다. 그런 것은 어찌 됐든 중요하지 않다. 그러니 당연히 사실이나 진실에 목을 매지 않는다. 목표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세상에 대한 어떤 고정관념을 퍼뜨리려는 것이다. 그들을 믿지 않거나 좋아하지 않는 유권자의 마음에 다가설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다만 편견을 강화하고 싶어 할 뿐이다. 이런 현상을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포스트 트루스(post truth)’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1960년대에 문화와 예술, 건축 분야에 불었던 반합리주의 바람을 일컫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연상하게 만드는 말이다. 진실 이후, 혹은 진실에서 빠르게 물러난, 좀 더 구체적으로는 진실에서 등 돌린 시대쯤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런 현상은 하루아침에 생겨나지 않았다. 닉슨 대통령이 탄핵된 지 10여 년 뒤에 레이건 대통령이 이란 스캔들에서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굵직한 거짓말을 했다는 게 밝혀졌으나 무사할 수 있었던 데서 알 수 있듯이 사실과 증거는 점차로 힘을 잃어왔다. 그러다 급기야 거짓말의 대마왕, 포스트 트루스 정치인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 트럼프를 우리가 목격하게 된 것이다.

영국의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 최신호의 표현에 따르면 트럼프는 기이한 환상의 세계에 산다. 이 세계에서 미국 대통령 오바마의 출생증명서는 조작됐다. 오바마는 IS를 설립했으며 힐러리 클린턴은 공동 창업자이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킬러이며 공화당 경선 라이벌이었던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의 아버지는 케네디 전 대통령이 암살당하기 직전 암살범인 리 하비 오스왈드와 함께 있었다. 그가 사는 세계의 도시 범죄율은 최근 또다시 기록을 경신했다(미국의 도시 범죄율은 1990년대에 정점을 찍었다가 계속 하락 중이다). ‘진실이라고 느끼는 일’을 매번 단언하지만 뒷받침할 근거라고는 없다. 이렇게 공적인 자리에서 터무니없는 말을 남발하고도 그는 응징당하지 않고 버텼다. 게다가 외롭지도 않다.

ⓒAP Photo

‘믿음이 없으니 화도 안 나는’ 정치인의 거짓말

영국의 브렉시트(유럽연합 탈퇴) 투표에서 트럼프의 아류는 용빼는 재주를 부렸다. 책임 있는 자리에 앉은 자들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짓말을 해댔으며 나중에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 영국인 상당수는 투표 기간 내내 영국이 유럽연합 회원국으로서 국민의료 비용에 버금가는, 주당 4억6800만 달러를 부담하는 줄로만 알았다. 브렉시트 반대자들이 숫자가 터무니없이 부풀려졌다는 걸 알리느라 힘을 빼는 동안 영국의 유럽연합 분담금 문제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사실을 들이대며 흥분하는 브렉시트 반대 진영을 향해 ‘우리 영국에는 전문가가 넘친다’고 비아냥대는 브렉시트 찬성파 지도자들은 트럼프와 하는 짓이 닮았다.

트럼프가 나이에 상관없이 형님으로 모실 만한 인물은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다(두 사람은 실제로 서로 호감을 표현한다). 푸틴이야말로 ‘뭔가 위대한 일을 하려는 이는 자기 말을 지키는 데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마키아벨리의 말을 따르는 표본 같은 인물이다. 푸틴의 ‘지도’를 받는 러시아 언론은 예사로 사실을 조작한다. 우크라이나 군이 어린이를 십자가에 매다는 등의 잔학 행위를 했다는 인터뷰 내용을 창작해낸 것이 최근의 걸작이다. 러시아는 서방의 댓글러들과 대리전을 펼칠 트롤 알바 군단을 고용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푸틴의 앞잡이들은 인공지능 ‘봇’ 수천 개를 소셜 미디어에 풀어 마음에 들지 않는 콘텐츠를 공격한다. 러시아에서는 푸틴의 말이 팩트다.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이 주도하는 포스트 트루스는 러시아보다는 덜 우악스럽다. 그들이 싫어하는 모든 내용을 축출하거나 새빨간 거짓말을 유포하는 것과 같은 짓은 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네트워크에 정보의 홍수를 일으키곤 한다. 정보를 과잉 공급해 검열이란 목적을 달성하는, 어디서 많이 본 수법이다.

포스트 트루스는 두 가지 요인이 촉발했다. 21세기에 들어와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겪는 현상 중의 하나가 바로 공적 기관의 신뢰 하락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메르스, 세월호에 이어 지진 사태까지 큰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보건복지부·해양수산부·해경·국민안전처·기상청과 관련 민간 기관들까지 동네북 신세를 면치 못한다. 아닌 게 아니라 하는 일마다 아이큐가 모자라 보이기는 한다. 그들이 망가진 것은 잘못도 많아서겠지만 세월이 변한 탓이다. 인터넷을 통해 유능한 민간의 정보와 견해가 광속으로 유통되니 구태에 매인 관료조직은 굼떠 보일 수밖에 없다.

지난주 미국 갤럽 조사에 따르면 미국의 14개 국가, 민간 주요 기관 신뢰도는 1990년대부터 거의 반등 없는 하강 곡선을 그렸다. 2001년 43%였던 평균 신뢰도는 올해 32%로 떨어졌다. 경기가 2008년 경제위기 이전으로 회복했는데도 공적 기관에 대한 신뢰는 전혀 회복될 기미가 없다는 게 더욱 나쁜 점이다. 사람들은 전문가도, 그들에게 의존하는 엘리트 정치인도 예전처럼 신뢰하지 않는다. 모순되게도 그런 ‘면역성’이 정치인들이 부담 없이 거짓말을 뱉게 만드는 배경이다. 믿음이 없으니 화도 안 낸다.

포스트 트루스는 정보를 전하는 방식의 획기적인 변화가 더욱 부채질했다. 전 세계 거의 모든 이들이 인터넷을 통해 뉴스를 접하면서 각 나라의 메이저 언론은 ‘게이트 키핑(뉴스 결정자가 뉴스를 취사선택하는 과정)’ 능력을 상실했다. 언론 엘리트는 권력을, 대중은 잣대를 잃었다. 정보의 공급 과잉은 팩트의 가치를 폭락하게 만들었다. 뉴스 부스러기와 소문, 가십이 놀라운 속도로 퍼져나가면서 팩트의 권위를 해체했다. 뉴스를 선별하기보다는 유저의 취향을 감별하는 데 능한(언론이 아니라 기술기업이니 당연하다) 페이스북과 구글의 알고리즘은 세상의 권위에 침을 뱉고 싶은 이들을 불러 모았다. 이들은 인터넷 네트워크상에서 믿음을 자급자족하는 집단으로 서서히 성장해갔다. 그들은 서로 주고받는 거짓까지도 양심적인 매체가 전하는 뉴스보다 신뢰한다. 작게는 트럼프를 중심으로 모인, 크게는 전 세계 인터넷 세상을 증오로 물들이곤 하는 이들도 그런 집단 중의 하나이다. 포스트 트루스는 트럼프가 당선되건 말건, 모든 권위가 해체돼가는 후기 정보화 시대에 닥친 시련이자 도전이다.

참고한 활자:〈이코노미스트〉 〈데일리 텔레그래프〉 〈워싱턴 포스트〉

기자명 문정우 기자 다른기사 보기 wo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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