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방 주인 김종현씨는 2년 전, 책이나 음악, 영화를 채울 공간을 찾았다. 꼭 책을 팔아야 한다고 생각한 건 아니다. 그저 책이 있으면 좋겠다고 여겼다. 빈 곳을 책으로 채웠더니 책방이 되었다. ‘퇴근길 책 한잔’은 퇴근길에 커피나 와인을 한잔하러 오는 마음이면 좋겠다며 김씨가 지은 상호명이다. 수천 평 공간에 10만 권이 넘는 책이 진열된 대형 서점과는 엄연히 다르다. 베스트셀러나 분야별로 분류하지도 않았다. 무슨 책이 몇 권이나 팔리는지는 기록하지 않는다. 매대에 놓인 책은 약 250권이다. 큐레이션 기준은 오직 주인장 김씨가 좋아하는 책이다. 10평(33㎡) 남짓한 공간의 절반에는 책을 비치하고, 한가운데는 긴 테이블과 의자를 두어 사람들이 편히 책을 읽거나 이야기할 수 있게 했다.
작은 책방에서는 베스트셀러가 외면받기 일쑤다. 서울 마포구 망원동에 위치한 ‘책방 만일’은 베스트셀러가 아닌 인문·사회학이나 문학책을 주로 갖다 놓는다. 문학 중에서도 국내에 덜 소개가 된 외국 소설, 국내 소설이라면 젊은 작가 위주로 둔다. 책방 주인 이승주씨는 “인간답게 먹고사는 방식에 관한 책을 두고 있다. 적어도 그런 방향으로 생각할 수 있게 돕는 책이다”라고 말했다. 테마를 분류하면 환경·젠더·노동과 관련한 책이 많다. 〈사람, 장소, 환대〉(김현경 지음)나 〈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데이비드 실즈 지음)는 ‘책방 만일’만의 베스트셀러다.
주인장 여행 가면 단골들이 당직 서는 책방
작은 책방에서는 책 판매 이외에 문화 활동도 이뤄진다. 영화 상영회, 독서모임, 번역 모임, 작가와의 만남, 음악회, 독립 출판물 만들기 등 책을 매개로 한 기획은 독자와의 소통을 이끄는 매우 중요한 수단이다. 서울 용산구 용산동에 위치한 고요서사의 ‘북스앤코르크’ 모임에선 단편소설을 함께 읽고, 그에 어울리는 와인을 즐긴다. 비정기 모임으로 보통 7∼8명이 참여한다. 매우 느슨한 형태의 커뮤니티가 만들어진 셈이다. 서울 마포구 상암동에 위치한 ‘북바이북’의 단골 심대원씨는 “책방에서 책을 볼 때 가장 잘 읽힌다. 책을 산 날짜와 구입한 장소, 책 읽을 공간을 찾아 나서면서 분위기를 느낀다. 이때 책은 단지 읽는 물체로만 의미를 갖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그는 북바이북에 일주일에 서너 차례 방문해 두세 시간씩 책을 읽는다. 때로 기획 강좌에 참여하고 책방 주인 김진아·김진양 자매와 인사 나눈다. 작은 책방 단골들은 당연히 10% 할인과 5% 적립 서비스가 따르는 온라인 서점 이용을 기꺼이 포기했다.
수익이 크게 나지 않는데도 작은 책방을 열고 운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직장 생활에서 오는 절망과 ‘카페나 차릴까’ 하는 식의 막연한 낭만이 맞물려 자신만의 개성이 담긴 책방을 열기 시작했다. 삶에 대한 다양한 욕구를 실현하려는 것이다”라고 ‘퇴근길 책 한잔’ 주인 김종현씨는 말했다. 김씨가 책방을 비우면 일일 책방지기가 대신 문을 연다. 그가 여행을 계획 중이라고 SNS에 올리면 일일 책방지기를 자청하는 이들의 메시지가 쇄도한다. 지난해 12월 ‘책방 만일’에서도 책방 주인 이승주씨가 자리를 비운 한 달 동안 책방지기가 돌아가며 책방을 지켰다. ‘퇴근길 책 한잔’ 주인장 김종현씨는 “책방을 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책을 사서 읽는 사람보다 훨씬 많다”라고 말했다. 김씨의 말대로 책방을 열고 싶어 하는 이들과 책방을 이용하는 이들은 사실상 겹친다. 주로 ‘비주류’ 문화에 관심이 많고, 자신의 취향을 찾아 나서는 적극적인 독자들이다. ‘취향 저격’을 당한 이들은 책방이 어디에 있든 알아서 찾아간다.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 위치한 독립출판물 서점 ‘유어마인드’는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에 있다. 책방 주인 이로씨는 “독자가 원하는 분위기와 책이 있다면, 엘리베이터가 있거나 없거나, 지하거나 어디거나 상관이 없었다고 봤다. 장소는 부차적인 문제다”라고 말했다. 적극적인 독자를 믿는 까닭에 대다수 작은 책방에는 간판조차 달려 있지 않다.
밤 9시, 노란 불빛만 남은 ‘퇴근길 책 한잔’에 20∼30대 남녀 다섯 명이 모였다. 인근 대학에서 일하는 황승현씨도 퇴근길에 처음으로 이곳을 찾았다. 다큐멘터리 〈앤서니 위너-선거 이야기〉를 보기 위해서였다. 책방 주인 김씨가 SNS로 상영회를 알렸다. 약속이 없었던 황씨는 SNS에서 이 소식을 접하고 ‘여기 재밌겠다!’고 무릎을 쳤다. 책방 단골인 여성 한 명을 뺀 나머지는 처음 만난 사이였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름이나 직업, 나이, 오게 된 경위를 묻지 않았다. 서로가 알아차린 것이라곤 ‘다큐멘터리를 좋아하면서 퇴근길 책 한잔에 호기심이 있다’는 느낌이 전부였다. 미니 빔 프로젝터로 연결된 가로 1m 작은 스크린으로 서점 속 영화관이 마련됐다.
밤 10시30분께 영화가 끝나고 시작된 대화는 새벽 1시를 넘어서 계속됐다. 주제는 정치·사회·교육에서 개인의 정치적 성향까지 넘나들었다. 황씨는 “책을 좋아하는 개인이 모여 같은 영화를 본 까닭인지, 기껍고 자연스럽게 자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 만난 사람들인데 유대감이 있으면서도 익명성이 보장되는, 적절한 거리의 관계가 형성되는 느낌이다”라고 말했다. 끝까지 남은 세 사람은 이대역 인근 포장마차에서 소주 두 병을 나누면서 새벽 3시까지 대화를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