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멘트가 벗겨진 30년 넘은 건물이 즐비했다. 대문에 빨간 스프레이로 그려진 큰 동그라미가 빈집임을 알렸다. 슈퍼마켓, 철물점 그리고 점집들이 눈에 띄었다. 주변 환경을 봐도 책방이 있을 만한 곳은 아니었다. 예상과 달리, 있었다. 서울 마포구 염리동에 ‘퇴근길 책 한잔’이 자리 잡았다. 간판이 따로 없는 책방 안의 노란 조명은 골목까지 훤히 비췄다.

책방 주인 김종현씨는 2년 전, 책이나 음악, 영화를 채울 공간을 찾았다. 꼭 책을 팔아야 한다고 생각한 건 아니다. 그저 책이 있으면 좋겠다고 여겼다. 빈 곳을 책으로 채웠더니 책방이 되었다. ‘퇴근길 책 한잔’은 퇴근길에 커피나 와인을 한잔하러 오는 마음이면 좋겠다며 김씨가 지은 상호명이다. 수천 평 공간에 10만 권이 넘는 책이 진열된 대형 서점과는 엄연히 다르다. 베스트셀러나 분야별로 분류하지도 않았다. 무슨 책이 몇 권이나 팔리는지는 기록하지 않는다. 매대에 놓인 책은 약 250권이다. 큐레이션 기준은 오직 주인장 김씨가 좋아하는 책이다. 10평(33㎡) 남짓한 공간의 절반에는 책을 비치하고, 한가운데는 긴 테이블과 의자를 두어 사람들이 편히 책을 읽거나 이야기할 수 있게 했다.

ⓒ시사IN 이명익간판도 없는, 서울 염리동 작은 책방 ‘퇴근길 책 한잔’에 놓인 책들은 오직 주인장이 좋아하는 기준으로 고른 것들이다.
최근 들어 다양한 시선으로 책을 선별하고 판매하는 ‘작은 책방’이 늘고 있다. 엄밀히 말해 동네 사람보다 외부인이 일부러 찾아오는 데다, 동네에 기여하는 바가 거의 없는 까닭에 ‘동네 책방’보다 ‘작은 책방’ ‘독립 서점’으로 이름 붙이는 게 바람직하다고 여러 책방 주인들은 말했다. 작은 책방은 잘 팔릴 만한 책을 팔아서 수익 올리기에 집중하지 않는다. 대형 서점에 비해 물량이나 공간은 턱없이 작지만, 대형 서점의 축소판은 아니다. 작은 책방은 묻혀 있던 좋은 책을 소개하고 책을 통해 관계를 형성하는 문화공간을 지향한다. 작은 책방을 운영하는 이들은 “책은 내용 이상의 가치를 담고 있다”라고 말했다. 큐레이션된 책은 곧 책방의 정체성을 결정한다. 작은 책방 큐레이션은 전적으로 운영하는 이들에게 달려 있다. ‘책방 주인은 특별히 선별한 책의 메시지를 통해 생각이나 정서, 관점을 판다. 어떤 이는 그를 통해 가치관을 바꾸고 삶을 다른 방향으로 이끈다. 그 플랫폼이 바로 책방인 셈이다.’(〈우리, 독립 책방〉, 북노마드 편집부)

작은 책방에서는 베스트셀러가 외면받기 일쑤다. 서울 마포구 망원동에 위치한 ‘책방 만일’은 베스트셀러가 아닌 인문·사회학이나 문학책을 주로 갖다 놓는다. 문학 중에서도 국내에 덜 소개가 된 외국 소설, 국내 소설이라면 젊은 작가 위주로 둔다. 책방 주인 이승주씨는 “인간답게 먹고사는 방식에 관한 책을 두고 있다. 적어도 그런 방향으로 생각할 수 있게 돕는 책이다”라고 말했다. 테마를 분류하면 환경·젠더·노동과 관련한 책이 많다. 〈사람, 장소, 환대〉(김현경 지음)나 〈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데이비드 실즈 지음)는 ‘책방 만일’만의 베스트셀러다.

ⓒ시사IN 조남진서울 용산동 작은 책방 ‘고요서사’는 마을의 사랑방 구실을 하는 장소다.
한국서점조사연합회에 따르면 2013년 1625곳이던 서점은 2015년 1559곳으로 감소했다. 하지만 이런 불황기에도 개성 있는 작은 책방이 늘고 있다. 최근 5년간 서울에 새로 생긴 작은 책방은 20여 곳에 달한다. 퍼니플랜이 제작한 ‘구글 동네서점 지도’에 등록된 전국의 작은 책방은 현재 156곳에 이른다. 책방마다 특색과 지향은 다르다. 구글 동네서점 지도에 등록된 책방 카테고리는 26개다. ‘고요서사’ ‘철든책방’ 등 소설책을 위주로 판매하는 작은 책방은 그 수가 너무 많아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성 소수자를 위한 ‘햇빛서점’, 독립 출판물을 다루는 ‘스토리지북앤필름’ ‘유어 마인드’, 그림책 서점 ‘베로니카 이펙트’, 음악 책을 다루는 ‘초원서점’, 술집과 책의 결합 ‘책바’, 시집 서점 ‘위트앤시니컬’, 추리소설 책방 ‘미스터리 유니온’ 등은 자기만의 색깔을 드러낸 작은 책방이다.

주인장 여행 가면 단골들이 당직 서는 책방

작은 책방에서는 책 판매 이외에 문화 활동도 이뤄진다. 영화 상영회, 독서모임, 번역 모임, 작가와의 만남, 음악회, 독립 출판물 만들기 등 책을 매개로 한 기획은 독자와의 소통을 이끄는 매우 중요한 수단이다. 서울 용산구 용산동에 위치한 고요서사의 ‘북스앤코르크’ 모임에선 단편소설을 함께 읽고, 그에 어울리는 와인을 즐긴다. 비정기 모임으로 보통 7∼8명이 참여한다. 매우 느슨한 형태의 커뮤니티가 만들어진 셈이다. 서울 마포구 상암동에 위치한 ‘북바이북’의 단골 심대원씨는 “책방에서 책을 볼 때 가장 잘 읽힌다. 책을 산 날짜와 구입한 장소, 책 읽을 공간을 찾아 나서면서 분위기를 느낀다. 이때 책은 단지 읽는 물체로만 의미를 갖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그는 북바이북에 일주일에 서너 차례 방문해 두세 시간씩 책을 읽는다. 때로 기획 강좌에 참여하고 책방 주인 김진아·김진양 자매와 인사 나눈다. 작은 책방 단골들은 당연히 10% 할인과 5% 적립 서비스가 따르는 온라인 서점 이용을 기꺼이 포기했다.

작은 책방이 늘지만 그렇다고 수익까지 증가한 것은 아니다. 자연스럽게 가게 월세가 상대적으로 싼, 상권이 몰락한 곳에 작은 책방이 모이는 이유다. 서울 용산구 해방촌 언덕배기에 위치한 ‘스토리지북앤필름’ ‘별책부록’ ‘고요서사’나 재개발 지역인 서울 마포구 염리동에 문을 연 ‘퇴근길 책 한잔’ ‘초원서점’이 대표적이다. 이화여대에서 신촌기차역으로 내려오는 후미진 골목에도 작은 책방이 잇달아 문을 열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이대 뒷골목 상권 쇠퇴로 공실률이 70%에 이르렀던 곳이다. 광고 대행사에서 카피라이터로 일하던 유수영씨가 지난 7월에 추리소설 전문점 ‘미스터리 유니온’을 열었다. 바로 옆에는 2013년 문을 연 ‘문학다방 봄봄’이 위치해 있다. 6월에는 시집 전문 서점 ‘위트앤시니컬’이 신촌지구대 방향으로 길 건너 건물 3층에 자리했다. 간판은 없다. 유희경 시인이 열면서 이름을 알렸다.

수익이 크게 나지 않는데도 작은 책방을 열고 운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직장 생활에서 오는 절망과 ‘카페나 차릴까’ 하는 식의 막연한 낭만이 맞물려 자신만의 개성이 담긴 책방을 열기 시작했다. 삶에 대한 다양한 욕구를 실현하려는 것이다”라고 ‘퇴근길 책 한잔’ 주인 김종현씨는 말했다. 김씨가 책방을 비우면 일일 책방지기가 대신 문을 연다. 그가 여행을 계획 중이라고 SNS에 올리면 일일 책방지기를 자청하는 이들의 메시지가 쇄도한다. 지난해 12월 ‘책방 만일’에서도 책방 주인 이승주씨가 자리를 비운 한 달 동안 책방지기가 돌아가며 책방을 지켰다. ‘퇴근길 책 한잔’ 주인장 김종현씨는 “책방을 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책을 사서 읽는 사람보다 훨씬 많다”라고 말했다. 김씨의 말대로 책방을 열고 싶어 하는 이들과 책방을 이용하는 이들은 사실상 겹친다. 주로 ‘비주류’ 문화에 관심이 많고, 자신의 취향을 찾아 나서는 적극적인 독자들이다. ‘취향 저격’을 당한 이들은 책방이 어디에 있든 알아서 찾아간다.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 위치한 독립출판물 서점 ‘유어마인드’는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에 있다. 책방 주인 이로씨는 “독자가 원하는 분위기와 책이 있다면, 엘리베이터가 있거나 없거나, 지하거나 어디거나 상관이 없었다고 봤다. 장소는 부차적인 문제다”라고 말했다. 적극적인 독자를 믿는 까닭에 대다수 작은 책방에는 간판조차 달려 있지 않다.

밤 9시, 노란 불빛만 남은 ‘퇴근길 책 한잔’에 20∼30대 남녀 다섯 명이 모였다. 인근 대학에서 일하는 황승현씨도 퇴근길에 처음으로 이곳을 찾았다. 다큐멘터리 〈앤서니 위너-선거 이야기〉를 보기 위해서였다. 책방 주인 김씨가 SNS로 상영회를 알렸다. 약속이 없었던 황씨는 SNS에서 이 소식을 접하고 ‘여기 재밌겠다!’고 무릎을 쳤다. 책방 단골인 여성 한 명을 뺀 나머지는 처음 만난 사이였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름이나 직업, 나이, 오게 된 경위를 묻지 않았다. 서로가 알아차린 것이라곤 ‘다큐멘터리를 좋아하면서 퇴근길 책 한잔에 호기심이 있다’는 느낌이 전부였다. 미니 빔 프로젝터로 연결된 가로 1m 작은 스크린으로 서점 속 영화관이 마련됐다.

밤 10시30분께 영화가 끝나고 시작된 대화는 새벽 1시를 넘어서 계속됐다. 주제는 정치·사회·교육에서 개인의 정치적 성향까지 넘나들었다. 황씨는 “책을 좋아하는 개인이 모여 같은 영화를 본 까닭인지, 기껍고 자연스럽게 자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 만난 사람들인데 유대감이 있으면서도 익명성이 보장되는, 적절한 거리의 관계가 형성되는 느낌이다”라고 말했다. 끝까지 남은 세 사람은 이대역 인근 포장마차에서 소주 두 병을 나누면서 새벽 3시까지 대화를 이어갔다.

기자명 송지혜 기자 다른기사 보기 so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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