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리 클린턴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가 9·11 기념식장에서 비틀거리며 황급히 떠나는 모습이 언론에 포착되면서 그녀의 건강 문제가 미국 대선의 주요 이슈로 떠올랐다. 딸 첼시의 아파트에서 휴식을 취한 클린턴은 기자들 앞에서 건재함을 과시했지만 이후 유세를 잠정 중단해야 했다. 클린턴을 치료한 의사는 그녀가 폐렴을 앓은 것일 뿐 다른 문제는 없다는 성명을 냈으나, 이번 일은 오래전부터 제기되어오던 건강 이상설에 심증을 더해주었다.

클린턴 건강 이상설을 믿는 이들이 주장하는 병명은 치매, 뇌진탕 후유증, 파킨슨병, 뇌종양 등이다. 흥미로운 점은 모두 뇌와 관련이 있는 질환이라는 것이다. 이는 그녀의 병력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클린턴은 2005년 1월 연방 상원의원으로 재직할 당시 연설 중에 정신을 잃었다. 국무장관으로 재직하던 2009년 6월에는 이동 중 넘어져 팔꿈치 골절상을 입었다. 2012년 겨울에는 탈수로 인해 정신을 잃고 쓰러지다 머리를 부딪치는 바람에 뇌진탕을 일으켰다. 당시 그녀는 부상이 심각해 상당 기간 업무를 중단해야 했다. 이메일 스캔들로 FBI의 조사를 받으면서는 뇌진탕을 일으킨 시기 전후의 많은 일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진술했다.
 

ⓒ유튜브영상갈무리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인 힐러리 클린턴(오른쪽에서 세 번째)이 뉴욕에서 9·11테러 추도행사 도중 어지럼 증세를 보여 자리를 뜨고 있다.

이런 병력에 더해 폭로 전문 사이트 ‘위키리크스’에 공개된 이메일도 건강 이상설을 한층 부추겼다. 민주당 후원자인 제프리 리즈가 콜린 파월 전 국무장관에게 보낸 이메일 내용이 폭로됐다. 민주당 하원의원 셸던 화이트하우스가 “클린턴은 연단의 단상에 오르기도 힘든 상황이다”라고 했다는 내용이다. 또 2011년 10월께 클린턴의 측근인 제이크 설리번이 프로비질(Provigil)이라는 약에 대한 설명을 그녀에게 보냈는데, 위키리크스는 이 약이 파킨슨 치료제라고 주장했다. 비슷한 시기에 클린턴이 ‘결정 피로증’에 대한 내용을 이메일로 측근들에게 보냈는데, 위키리크스는 이것이 그녀의 병명일 것이라 주장했다.

이후 프로비질은 주의력결핍장애나 졸음증 등의 치료제로 쓰이는 각성제임이 밝혀졌다. ‘결정 피로증’은 의학적 증상이 아니라 지나치게 많은 결정을 내리다 보면 좋지 않은 결정을 하게 되는 현상을 일컫는 용어라는 점도 드러났다. 이처럼 클린턴의 질환과 관련한 의혹 중 상당수가 근거 없는 것으로 드러났음에도 끊임없이 건강 이상설이 제기되는 데에는 그녀의 비밀주의도 한몫하는 것으로 보인다.

건강 이상설은 루머일 수 있다. 그러나 클린턴 캠프의 비밀주의 때문에 민주당은 긴장하고 있다. 민주당 전국위원회 의장을 지낸 돈 파울러가 “만일의 상황에 대비하지 않으면 바보들”이라고 지적한 것처럼 올해 68세인 클린턴이 유세를 중단해야 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민주당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선거일까지 채 50일도 남지 않은 지금 민주당의 대비책이란 무엇일까? 가능성은 높지 않더라도 만일 그녀가 중도 사퇴할 경우 대비책은 두 가지다.

사전투표 시작 뒤 후보 교체하면 최악 상황

후보자 교체는 선거일인 11월8일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만일 11월8일 선거를 치르고, 클린턴이 당선에 필요한 선거인단 270명을 확보한 뒤 사임하면, 당선이 확정되면서 부통령 후보인 팀 케인이 대통령직을 자동 승계하게 된다. 그러나 11월8일 이전에 후보 교체를 하자면 민주당은 당규에 따른 절차를 밟아 새 후보를 선출해야 한다. 대선 후보가 공석이 되었을 경우 절차들에 대해 기술한 민주당 당규(2조 7절 d항과 2조 8절 b항)에 따르면, 전국위원회 의장은 집행위원회의 승인을 받아 대체 후보 선출을 위한 당 전국위원회 특별회의를 소집할 수 있다. 그런데 회의 소집일을 결정하기 위한 전국위원회를 먼저 개최하고, 본회의가 성립되기 위해 전국위원회 위원 과반을 소집해야 하는 등, 모든 절차를 거쳐 새 후보를 선출하자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민주당 당규를 제정한 이들도 이 문제를 인식한 듯, “공석이 된 대선 후보 자리를 채우기 위한 투표 절차는 당규위원회가 결정하고, 민주당 전국위원회의 승인을 받아 거행한다”라고 했다(2조 8절 f항). 당규위원회에 제도적 재량권을 부여해 비상사태에 기민하게 대처할 길을 열어둔 것이다.
 

ⓒAP Photo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 교체자로 언급되는 팀 케인 부통령 후보(위 왼쪽),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위 오른쪽).

민주당이 새 후보를 선출해도 험난한 선거법 절차가 기다리고 있다. 미국의 선거법은 주마다 달라서 후보자를 교체하자면 모든 주에서 일일이 허락을 받아야 한다. 주마다 그 방식과 실시 시기가 제각각인 사전투표가 시작된 뒤 후보를 교체하자면 민주당은 더 큰 난관에 부딪히게 된다. 사전투표는 평균적으로 공식 선거일로부터 22일 전부터 실시되나, 주에 따라 빠른 곳은 45일 전부터 하기도 한다. 이를 올해 선거에 적용하면, 9월 말부터 10월 중순 사이에 주별 사전투표가 시작된다. 민주당의 후보 교체가 늦어지면 상당수 주에서 후보 교체 이전의 투표용지에 기표하는 일이 발생하게 되고, 민주당은 법원에 이 표들을 새 후보의 득표로 인정해달라는 소송을 내야 한다. 이 소송에 지면 민주당 지지 표를 민주당 후보 두 명이 나눠 갖는 셈이 된다.
 

ⓒAP Photo조지프 바이든 부통령(왼쪽), 존 케리 국무장관(오른쪽).

만일 클린턴이 사퇴해야 할 상황이라면, 누가 그녀를 대체할 것인가? 현재 거론되는 인사들로는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 부통령 후보인 팀 케인, 현 국무장관 존 케리, 그리고 현 부통령 조지프 바이든 등이 있다. 샌더스는 민주당 주류의 지지를 받기 어려울 것이며, 바이든 부통령은 당내 경선 출마 권유를 뿌리친 적이 있어 이제 와서 대선 후보로 나서기 힘들 것이다. 팀 케인이나 존 케리 두 사람 중 하나가 대체 후보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들 중 누가 새 후보로 나서더라도 채 50일도 남지 않은 선거의 승리를 장담하기는 어렵다.

실제 심각성 여부와 관계없이 그녀의 건강이 논란이 된 것만으로도 선거 판세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정치 정보 전문 사이트 ‘리얼 클리어 폴리틱스’의 여론조사를 보면, 이번 선거에서 최대 경합 지역으로 꼽히는 러스트 벨트(Rust Belt:쇠락한 중서부의 제조업 지대)의 아이오와 주와 오하이오 주, 그리고 또 다른 경합 주인 플로리다에서 건강 이상설 제기 후 트럼프가 클린턴에게 역전하거나 격차를 벌려나가고 있다. 다른 경합 지역에서도 트럼프의 뚜렷한 상승세가 확인되고 있다.

고작 두 달 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힐러리 클린턴이 후보로 확정되었을 때, 본선은 낙승하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지금 민주당은 클린턴의 건강 이상설 때문에 후보 교체까지 대비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이 되었다.

기자명 김영준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선임연구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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