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의 대통령 꿈은 더 이상 백일몽이 아니다. 명확하고 실현 가능한 꿈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한때 클린턴 후보가 두 자릿수 지지율 격차로 앞섰던 뉴햄프셔와 콜로라도 주 등지에서 트럼프가 크게 약진한 상태다.”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후보 선거본부의 유세 책임자 로비 무크가 최근 지지자들에게 다급하게 보낸 이메일 내용이다. 오는 11월8일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압승이 예상되던 클린턴 후보의 대권 가도에 적신호가 켜졌다. 선거일이 다가올수록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 후보의 지지율이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추세라면 클린턴이 이번 대선에서 겨우 이기거나 심지어 트럼프가 극적인 역전승을 거둘 수도 있다는 관측까지 나온다.

백악관을 향해 파죽지세로 질주하던 클린턴 후보에게 급제동이 걸린 것은 최근 불거진 건강 문제 때문이다. 그녀는 뉴욕에서 열린 9·11 테러 15주기 행사를 끝까지 지키지 못한 채 떠난 데다 자동차에 오르는 순간 휘청대는 모습이 언론에 포착됐다. 더욱이 주치의로부터 폐렴 진단을 받고도 이를 숨긴 채 추모 행사에 참석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신뢰도에 다시 상처를 입었다. 9월 초에는 트럼프 지지자들을 가리켜 “인종·성차별주의자에 동성애자와 외국인, 무슬림 등을 혐오하는 개탄스러운 집단”이라고 사실상 욕설을 퍼붓는 실수를 저질렀다. 설상가상으로 과거 국무장관 재직 당시 ‘클린턴 재단’ 기부자들에게 특혜를 제공했다는 의혹도 터져 나왔다.
 

ⓒAFP막가파식 언행으로 완패할 것이라던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대선 후보의 지지율이 요동치고 있다.

물론 이런 악재들에도 불구하고, 힐러리 클린턴의 전국적 지지율은 트럼프보다 다소 높은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 격차가 매우 불안정한 점이 문제다. 9월21일 발표된 NBC 방송과 〈월스트리트 저널〉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클린턴이 43%로 트럼프보다 6%포인트 앞섰다. 하지만 전날 나온 로이터 통신과 입소스 여론조사에선 오히려 트럼프의 지지율이 39%로 클린턴을 2%포인트 앞섰다. 앞서 9월15일 〈뉴욕 타임스〉와 CBS의 공동 여론조사에선 두 후보 모두 42% 지지율을 기록했다. 클린턴 측 유세 책임자인 로비 무크가 최근 지지자들에게 경고성 이메일을 보낸 것도 이런 위기감의 반영이다.

클린턴의 지지율 하락이 단지 최근 악재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경합 주의 대다수 백인 중산층 노동자들이 그녀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트럼프의 승산 가능성을 지적한 〈허핑턴 포스트〉 정치 칼럼니스트 로버트 쿠트너는 “백인 노동자층은 클린턴의 핵심 지지층이라 할 수 있는 대다수 흑인과 히스패닉, 이민자들보다 윤택한 삶을 누리는 것으로 간주되어왔다. 그러나 정작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지적했다. 백인 노동자들 역시 지난 세월 소득이 줄곧 떨어지면서 경제적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는데, 민주당은 주로 여성과 흑인, 동성애자, 이민자 등 마이너리티의 권익만 옹호해왔다는 것이 쿠트너의 주장이다.

클린턴 진영은 부동층이나 트럼프에게 식상한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결정적인 ‘한 방’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를테면 클린턴은 대선 사상 최초의 여성 후보다. 하지만 이메일 스캔들, 클린턴 재단과의 유착설, 거액의 강연료 등 각종 구설에 휘말리면서 여성 후보로서 강점을 활용할 기회마저 놓쳤다는 지적이다. 또 다년간 워싱턴 중앙정치에 깊이 발을 담근 ‘부패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도 깨지 못하고 있다. 이로 인해 그녀는 대선 후보 경선에서 치열하게 경쟁한 버니 샌더스의 젊은 지지자들을 자신의 품으로 끌어오는 데도 실패했다는 평가다.

TV 토론이 막판 최대 변수 될 듯

클린턴과 대조적으로 트럼프는 요즘 승리의 자신감이 고취되고 있다. 그는 지난해 6월 유세 시작 이후 올여름까지 막가파식 언행으로 자신의 표를 갉아먹었다. 그러나 지금은 ‘신중 모드’다. 절제된 언행으로 이미지 변신을 꾀하면서 최근에는 선거 조직을 크게 개편하기도 했다. 이번 대선의 승부처로 꼽히는 경합 주에서 대대적인 광고 방송도 내보내고 있다. 실제로 경합 주에서 트럼프의 지지율이 상승 중인 것으로 나타났다. 9월21일 선거 분석 웹사이트 ‘파이브서티에이트(538)’ 여론조사에 따르면, 트럼프는 이번 대선의 최대 승부처로 꼽히는 오하이오·플로리다·아이오와 주 등에서 클린턴을 앞질렀다. 더욱이 열세이던 네바다·노스캐롤라이나 주에서도 역전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클린턴이 크게 앞서던 뉴햄프셔는 물론 콜로라도·미시간·펜실베이니아·버지니아 주 등에서도 상승세다. 〈워싱턴 포스트〉는 “트럼프가 대선 승리에 필요한 선거인단 수 270명 확보에서 클린턴에 비해 아직 열세지만, 핵심 경합 주에서 약진을 거듭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AFP9월19일 뉴욕에서 벌어진 폭탄 테러의 용의자 아마드 칸 라하미(가운데)가 구급차에 실려가고 있다.

전통적으로 미국 대선에서는 ‘18대13’이라는 공식이 작동한다. 50개 주 가운데 캘리포니아·뉴욕 등이 포함된 18개 주는 민주당 우세 지역인 반면 텍사스·테네시 주를 비롯한 13개 주는 공화당 우세 지역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자신의 아성에서 승리하는 것만으로는 대권을 쟁취할 수 없다. 경합 주에서 선전해야 270명 이상의 선거인단을 확보해 승리할 수 있다.

경합 주 판세는 아직 예측 불허다. 올해 선거에서는 막판 변수가 불거질 가능성도 높다. 바로 안보 이슈다. 9월19일 뉴욕과 뉴저지에서 폭탄 테러가 터졌다. 용의자인 아마드 칸 라하미는 트럼프가 공개적으로 미국 입국 금지를 천명한 무슬림이다. 만일 미국에서든 해외에서든 선거 막판에 대형 테러가 터질 경우, 겁에 질린 유권자들이 트럼프 쪽으로 대거 몰릴 수 있다. 〈워싱턴 포스트〉는 “남은 대선 운동 기간에 사회 혼란과 불안은 트럼프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다”라고 진단했다.

테러가 예측하기 어려운 변수라면 예측 가능한 마지막 변수도 있다. 유권자 수천만명이 생중계로 지켜보는 TV 대선 토론이다. 두 후보는 9월26일 1차 토론회를 시작으로 10월9일과 19일 등 세 차례에 걸쳐 주요 현안을 놓고 집중 토론을 벌인다. 역대 대선에서 TV 토론이 대선 결과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확증은 없다. 하지만 올 대선에서는 ‘아웃사이더’ 트럼프의 등장으로 토론회의 영향력이 커지리라 보인다. 물론 적어도 토론에서는 풍부한 국정 경험과 노련한 정치 감각, 능수능란한 화술을 겸비한 클린턴이 정치 신인 트럼프를 가볍게 누를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하지만 10년 이상 NBC 방송의 리얼리티 게임 쇼 진행자로 활약한 트럼프도 만만한 상대라고 볼 수는 없다. 반격이 주특기인 트럼프는 그녀의 각종 취약점(건강 문제, 클린턴 재단 관련 특혜 등)을 투견처럼 물고 늘어질 가능성이 크다. 국내외 핵심 현안에서는 무책임한 정치꾼 이미지를 탈피해 ‘미래 권력’다운 자질과 식견을 보여주려 할 것이다. CNN은 “트럼프에게 이번 대선의 구도를 바꿀 수 있는 최상의 기회는 대선 토론이다. 그의 성품과 대통령직을 수행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등에 관한 사회적 인식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했다.

기자명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