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테이너 3610개를 실을 수 있는 한진해운 소속 캘리포니아호. 바다를 누비고 있어야 하지만, 9월22일 현재 이 배는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항에 억류되어 옴짝달싹 못하고 있다. 8월31일 국내 1위 해운사인 한진해운이 법정관리에 들어가면서 채권사 측에서 오스트레일리아 법원에 압류 신청을 했기 때문이다.

9월22일 한진해운 측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한진 캘리포니아’처럼 가압류 및 입출항 불가 선언을 받은 배는 총 5척이다. 항구에 진입조차 못한 채 공해상에 대기 중인 배도 21척에 이른다.

해상 물류는 무역의 혈관으로 불린다. 한진해운 사태가 연쇄 파장을 일으키는 이유다. 새누리당 유기준 의원이 9월21일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9월20일까지 한진해운 법정관리로 인해 접수된 피해 사례는 총 207건에 달한다. 현재까지 추산된 피해액만 따져도 1600억원이 넘는다.

ⓒ연합뉴스9월22일 현재, 한진해운은 선박 5척이 가압류 및 입출항 불가 선언을 받았고, 21척이 항구에 진입 못하고 공해상에서 대기 중이다.
사태 해결을 위해서는 당장 돈이 필요하다. 현재까지 한진그룹이 마련한 돈은 약 1800억원이다. 경영 실패 책임이 제기된 최은영 전 회장이 사재 100억원을,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사재 400억원을 내놓았고, 여기에 한진해운의 대주주인 대한항공이 9월21일 매출채권을 담보로 600억원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이 과정도 난항을 겪었다. 법정관리에 들어간 회사에 자금을 빌려줬다가 정작 대한항공 재정에 문제가 생길 경우, 자금 지원을 결정한 이사진이 배임 혐의를 받을 가능성도 있었다. 대한항공의 지원 규모를 지켜보던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도 담보 우선권을 조건으로 500억원을 추가 지원하기로 결정해 당장 급한 불은 끌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현재까지 마련된 자금 외에도 약 1000억~2000억원이 더 필요할 수 있다고 관측한다. 향후 물류가 묶인 화주들의 손해배상까지 고려하면 후폭풍이 장기화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한국 해운사에서 가장 큰 규모의 위기지만, 정부의 대처는 더뎠다. 당장 ‘이 정도 대란을 예상하지 못했나’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정부 대응에 대해 임종룡 금융위원장은 9월5일 월례 기자간담회에서 “정부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어떻게 할 것이냐는 논의를 계속해왔고, 필요한 시나리오를 검토했다. 그러나 정부가 선적 화물의 화주가 누구인지, 한진해운 소속 선박의 구체적인 운항 정보를 사전에 파악하기는 쉽지 않았다. 사전에 아주 질서 있게 대비할 수 없었던 한계가 있다”라고 말했다. 정작 그 피해를 누가 어떻게 얼마나 받을지는 상세하게 고려하지 못했다는 얘기다.

한진해운 사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해운업의 독특한 성격을 고려해야 한다. 해운업은 국제 경기 변동에 민감하다. 국제 경기가 호황일 때는 물류 수요가 급증한다. 반대로 불황일 때는 수요가 떨어지는 반면 선박을 유지하는 데는 비용이 많이 든다. 배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조선소에 주문하거나, 선주들에게 배를 빌려야 하는데, 이 모든 의사결정을 몇 년 뒤 상황을 예측하고 내려야 한다. 불황기에 호황을 대비하고, 호황기에 불황 때 불어닥칠 공급(선박) 과잉을 대비하는 게 해운업의 기본 원리다.

한진해운이 법정관리까지 간 것을 두고 전문가들은 크게 세 가지 원인을 꼽는다. 첫째, 전 세계 해운업이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로 침체 일로에서 회복되지 않고 있다. 둘째, 한국 해운사(한진해운·현대상선)가 금융위기 이후 경영전략을 잘못 세웠다. 셋째, 정부가 제때 해운업에 대한 지원 및 구조조정에 나서지 못했다.

외국 정부는 자국 해운사에 수십억 달러 지원

이 가운데 첫 번째 원인은 전 세계적으로 모든 해운사에 적용되는 ‘상수’다. 경기침체로 국제 해운업계가 전반적으로 재편되는 상황(34쪽 상자 기사 참조)은 한국 해운사가 맞닥뜨린 일종의 ‘시장 환경’이다. 그렇다면 원인은 결국 개별 경영전략과 정부 정책에서 찾아야 한다. 한진해운은 크게 두 시점에 악수를 두었다. 먼저 금융위기 직후, 일본 대형 선사들이 단기적 손해를 감수하고 용선(배 장기 임대) 기한 이전에 배를 ‘조기 반선’하며 시황에 대비한 것과 달리, 한진해운은 용선 고비용 구조를 이어가면서 차후 몇 년간 장기 적자에 시달렸다.

결국 2014년 위기를 맞은 한진해운은 최은영 전 회장에서 대한항공으로 대주주가 바뀌는데, 이 과정에서 선택한 자구책 역시 장기적으로 악수가 되었다. 당시 배 가격이 낮아 경쟁 업체들이 비교적 저렴하게 경쟁력 있는 선박을 발주하던 와중에, 한진해운은 당장 ‘돈 되는 자산’을 매각하는 데 집중했기 때문이다. 국내외 터미널을 팔고, 수익성 높은 전용선 분야를 정리했는데, 이로 인해 한진해운은 시장 변동에 민감한 컨테이너 사업 부문이 매출액의 92.7%를 차지하게 되었 다. 자연스럽게 경기변동이라는 ‘상수’에 다른 업체보다 더 휘둘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시사IN 이명익정부는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위 왼쪽)과 최은영 전 회장(위 오른쪽)의 경영 실패 책임만 부각하고 있다.
경영자의 도덕적 해이도 결과적으로 회생에 악영향을 끼쳤다. 최은영 전 한진해운 회장(현 유수홀딩스 회장)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2014년, 퇴직금 등의 보수로 97억원을 가져가 ‘먹튀 논란’을 낳았다. 당시 한진해운은 4000억원이 넘는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한진해운이 채권단과 자율협약에 들어가기 직전인 올 4월에는 자신과 두 딸이 보유한 주식 96만7927주를 매각해 약 27억원을 벌어들였다. 최 회장은 현재 미공개 정보를 이용한 주식거래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무능한 경영자의 경영전략 실패 사례지만, 그사이 정부의 움직임에도 아쉬움은 많았다. 금융위기 이후 해운업의 위기를 겪은 것은 한국만이 아니다. 해운업을 국가 기간산업으로 인식한 다른 나라의 경우, 2011년 무렵 대규모 지원책을 마련했다. 현재 세계 1위 해운사인 머스크 역시 덴마크 정부가 2011년 62억 달러 규모의 금융 차입을 지원했고, 독일 역시 해운선사인 하파크로이트 사에 17억 달러 규모의 정부 지급보증을 제공했다.

최근 아시아 해운업계의 주도권을 가져간 중국 역시 2012년, 코스코(COSCO)와 차이나쉬핑(CSCL)에 5년간 95억 달러를 지원하는 등 정부 차원에서 해운산업에 공을 들였다. 그러나 한국은 이 시기 해운업체에 대한 금융 지원이나 정부 차원의 해운시장 대응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장기 적자 구조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결국 2016년에 이르러서야 정부가 구조조정이라는 칼을 꺼내들었지만, 칼을 휘두르는 방식조차 논란이 많았다. 대우조선해양 구조조정에는 4조원이 넘는 추가 지원을 결정했지만, 해운업에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고용 유발 효과가 크고, 지역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많은 조선업과 달리, 해운업은 고용 효과가 상대적으로 작기 때문이 아니냐는 비판도 나온다. 정부가 위기에 빠진 현대상선과 한진해운 가운데 한 곳만 살리면 된다고 너무 낙관했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법정관리 과정에서 채권단은 현대상선이 한진해운의 일부 자산을 인수하는 시나리오를 구상했지만, 인수·합병으로 가져올 수 있는 알짜 자산이나 시너지가 크지 않다는 게 업계의 시각이다.

법정관리 결정 직후 정부의 논리는 간명했다. ‘사고 친 당사자가 먼저 수습하라.’ 1차적인 사태 해결 책임은 한진해운과 한진그룹에게 있다는 원칙이다. 일리는 있다. 하지만 해운업계에서는 법정관리에 들어간 이상 한진해운과 한진그룹 자체 여력만 가지고 물류대란을 막기는 역부족이었다고 본다. 급한 불을 끄는 데에 온 나라가 몸살을 앓았지만, 아직 남은 불씨가 한국 해운업에 산적해 있다.

기자명 김동인 기자 다른기사 보기 astori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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