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10분 거리였다.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재단법인 미르와 K스포츠는 600~700m밖에 떨어지지 않는 가까운 거리였다. 각각 지난해 10월(미르), 올해 1월(K스포츠)에 생겼다. 신생 재단인데 모금액은 무려 486억원, 288억원에 달했다. 출연금을 낸 곳도 삼성·SK·현대차·LG·포스코·롯데와 같은 국내 굴지의 대기업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흥미로운 점은 16개 대기업이 이른바 서열 순위에 따라 출연금을 차등으로 냈다는 것이다.   

큰돈을 모았지만 두 재단 모두 언론에 크게 노출되는 사업은 벌이지 않았다. 조용했던 두 재단에 9월20일부터 취재진이 북적이기 시작했다. ‘창조문화와 창조경제에 기여’한다는 목적을 내세운 두 재단 설립에 최순실씨(최서원으로 개명)가 개입했다는 의혹이 불거지면서다. 지난 9월20일 〈한겨레〉가 K스포츠 정동춘 이사장이 최순실씨가 다니는 스포츠마사지센터 원장이라고 보도했다. 박근혜 정부 청와대에서 공직기강비서관을 지냈던 더불어민주당 조응천 의원도 9월20일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관련 의혹을 제기했다. 조 의원은 “우병우·윤전추(유명 연예인 헬스트레이너 출신 청와대 3급 행정관)의 청와대 입성은 최순실과의 인연이 작용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대통령이 취임 당시 입었던 한복을 주문하고 직접 전해줬고, 박 대통령 브로치와 목걸이도 최씨가 청담동 주얼리숍에서 구매해서 전해준 것으로 확인됐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박 대통령 취임식 당시 입었던 한복을 디자인한 김영석 디자이너는 미르재단 이사로 이름을 올렸다 사임한 바 있다.
 

ⓒ시사IN 조남진2014년 9월 인천 드림파크 승마경기장에서 열린 제17회 아시아경기대회 승마 마장마술 경기에 참가한 딸을 응원하러 온 최순실씨.

‘최순실 게이트’가 정국의 핵으로 떠올랐다. 야당은 국정감사를 통해 관련 의혹을 파헤치겠다며 벼르고 있다. 여당은 두 재단과 관련한 국정감사 증인 채택에 협조하지 않고 있다.

최순실씨는 박근혜 대통령이 ‘영애 시절’부터 가까웠던 최태민 목사의 딸이다(27쪽 상자 기사 참조). 최순실씨는 정윤회씨의 전처다. 둘은 2014년 5월 이혼했다. 정윤회와 최순실 이름 앞에는 ‘비선 실세’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정윤회 문건 유출 사건으로 구속된 박관천 전 경정은 2015년 1월 검찰에 출석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 권력 서열 1위는 최순실, 2위가 정윤회, 박 대통령은 3위에 불과하다.”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지면서 이 말이 새삼 다시 화제가 되고 있다.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과정을 살펴보면, 권력 내 균열 조짐까지 엿보인다. 이명박 정부의 청와대 민정수석실에서 근무했던 한 관계자의 말이다. “이제야 남은 퍼즐이 맞춰진다. 지난 8월부터 펼쳐진 권력 다툼 양상은 박근혜 대통령이 정말 방어하고 싶은 것을 위한 싸움이었다. 미르와 K스포츠재단 건은 곧바로 박 대통령 턱밑까지 가는 사건이다. 우리 때 내곡동 사저가 특검으로 가면서 레임덕이 시작되었던 것처럼, 일이 굴러가서 특검으로 가는 순간 끝이라고 보면 된다”라고 말했다.

더불어민주당의 민주주의 회복 TF 소속 한 의원 또한 이번 사건을 여권 내 권력 분화의 한 과정으로 봤다. “이번 건은 야당에서 나온 정보가 아니다. 권력투쟁 과정에서 터져 나온 사건이다. 끝까지 힘을 쥐고 가려는 대통령과 새 권력을 창출하려는 쪽에서 일어난 다툼이 자중지란처럼 보인다. 우리는 지켜보다 옳은 말만 해도 된다.”

이들이 말하는 권력투쟁이란 무엇일까? 여의도 국회에서는 권력 다툼의 시작을 7월 〈조선일보〉와 TV조선 보도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조선일보〉와 청와대의 권력투쟁이 그것이다. 7월18일 〈조선일보〉는 우병우 민정수석의 처가와 넥슨의 부동산 거래 의혹에 대해 기사를 내보냈다. 이 기사를 시작으로 우 수석의 아들 병역 꽃보직 특혜, 가족회사 정강 배임 등 각종 의혹이 불거졌다.  
 

ⓒ시사IN 이명익대기업으로부터 각각 486억원과 288억원의 출연금을 받은 ‘재단법인 미르.
ⓒ시사IN 이명익‘K스포츠’의 사무실 출입구 모습. 건물 관리인이 출입문을 걸어 잠그고 방문객을 통제하고 있다.

계열사 TV조선은 7월26일부터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에 관한 의혹을 연일 쏟아냈다. 주요 대기업들이 모금 강요를 당했고, 거기에는 안종범 대통령비서실 정책조정수석이 관여했다고 보도했다. 박근혜 대통령과의 친분을 과시하는 창조경제추진단장 겸 문화창조융합본부장을 지낸 차은택 CF감독이 미르재단을 좌우했다는 증언도 보도했다. 미르재단 관계자들이 박 대통령의 해외 순방에도 동행했다는 기사를 계속해서 내보내던 TV조선은 8월18일을 끝으로 한동안 관련 보도를 멈췄다. 이날 이석수 특별감찰관은 우 수석을 직권남용 및 횡령 혐의로 검찰에 수사 의뢰했다.  

바로 다음 날인 8월19일 김성우 대통령비서실 홍보수석은 이석우 특별감찰관에 대해 “감찰 내용을 특정 언론에 유출한 것은 국기를 흔드는 일이다”라고 밝혔다. 사흘 전 MBC는 이 특별감찰관과 〈조선일보〉 기자와의 녹취록을 입수했다며 ‘감찰 내용 유출’이라고 보도했다. 〈조선일보〉를 향한 청와대의 반격 신호탄이었다. 이례적인 청와대의 공개 브리핑을 두고, 이석수 특별감찰관과 〈조선일보〉에 대한 경고이자 사실상 검찰 수사 가이드라인이라는 해석이 파다했다.

8월21일 청와대는 익명의 관계자를 앞세워 〈연합뉴스〉와 인터뷰하면서 우병우 수석과 관련한 의혹 제기를 이렇게 정의했다. “임기 후반기 식물 정부를 만들겠다는 의도다. 우 수석에 대한 첫 의혹 보도가 나온 뒤로 일부 언론 등 부패 기득권 세력과 좌파 세력이 우병우 죽이기에 나섰다.”

청와대 관계자가 언급한 부패 기득권 세력을 짐작할 만한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8월30일 〈조선일보〉 송희영 주필이 사표를 썼다. 그는 대우해양조선으로부터 억대의 호화 출장을 제공받았다는 의혹을 샀다. 청와대 익명 관계자가 말한 ‘부패 기득권’ 세력은 〈조선일보〉로 해석되었다. 〈조선일보〉의 수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석수 특별감찰관과 통화를 한 기자의 휴대전화도 검찰에 압수수색당했다.
 

ⓒEPA최순실씨가 주문했다는,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식에서 입었던 한복.
ⓒ시사IN 신선영최씨가 박 대통령의 액세서리를 구매했다는 청담동의 매장

〈조선일보〉 지면에서 우병우 수석 보도가 사라졌다. 9월20일자 〈한겨레〉 보도 이후에도 정작 미르재단 관련 의혹을 처음으로 제기한 TV조선은 조응천 의원의 의혹 제기와 여야의 공방으로만 짧게 두 꼭지를 다뤘다. 〈조선일보〉도 9월21일 지면에는 아예 관련 기사를 싣지 않았다. 정치권에서는 내년 3월 정부의 종합편성채널 재승인 심사가 부담으로 작용했을 거라는 말이 나왔다.

〈조선일보〉와 청와대의 힘겨루기에서 청와대가 이겼다는 평가가 나왔다. 〈조선일보〉의 한 관계자는 “총선 결과를 보고 다음 대선에서 이기려면 박근혜 대통령과 빨리 선을 긋고 전열을 재정비해야 한다는 정서가 내부에 있었던 것은 사실인데 상황이 이렇게 되어버려 참담하다”라고 말했다.

최순실씨와 관련한 의혹은 박근혜 후보 시절부터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그녀가 박 대통령 재산관리인 노릇을 했던 게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왔다. 이명박 후보와 박근혜 후보가 치열한 경선을 벌이던 2007년 8월16일 이명박 캠프의 좌장 격이던 이재오 의원은 기자회견에서 최순실씨를 거론했다. 이 의원은 “검찰은 최태민 목사의 딸인 최순실 부부의 차명재산 의혹과 실제 주인이 누구인지 밝혀내라. 무일푼인 최순실이 수백억원대 재산을 가졌다면 누구의 재산인지 차명 의혹을 밝혀야 하는 것 아니냐”라고 말했다. 2007년 7월19일 한나라당 예비 후보 검증 청문회에서도 비슷한 질문이 나왔다. “최순실씨가 강남에 수백억원대 집이 있고, 육영재단을 운영해서 번 돈이라는 설이 있다.” 이에 대해 당시 박근혜 후보는 “천부당만부당한 이야기다. 육영재단은 공익재단이라 굉장히 투명하게 운영된다. 돈을 빼서 착복할 수 있겠나?”라고 대답했다.
 

ⓒ시사IN 이명익최순실씨가 소유한 것으로 알려진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빌딩.

청와대 대변인과 국무총리까지 나서서 긴급 진화

박 대통령 취임 뒤에도 최순실씨 의혹은 가시지 않았다. 2013년 승마협회 조사·감사 과정에서, 문화체육관광부의 조사 담당 국장과 과장이 경질됐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이 유진룡 문체부 장관을 직접 불러 수첩을 보며, 조사를 진행한 국장과 과장에 대해 “나쁜 사람이라고 하더라”고 말했다는 유 전 장관의 뒤늦은 증언도 나왔다.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9월20일 정연국 청와대 대변인은 “언급할 가치가 없다”라는 말만 반복했다. 박근혜 대통령도 직접 나섰다. 9월22일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하며 박 대통령은 이러한 의혹에 대해 일축했다. “비상시국에 난무하는 비방과 확인되지 않은 폭로성 발언들은 사회를 뒤흔들고 혼란을 가중시킨다.” 9월23일 황교안 국무총리는 한발 더 나아가 “관련 유언비어는 법적 조치를 할 수 있다”라고 대정부 질문에서 말했다. 정작 의혹의 당사자인 최순실씨는 아무런 의견도 내놓지 않고 있다.

기자명 김은지·김연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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