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운동은 성장기에 과격한 양상을 나타내기 마련이다. 운동이 대변하는 소외 계층은 평소 ‘보이지도 않는 사람들’이다. 사회는 소외 계층의 분노와 욕망을 반대하기보다는 무시해버린다. 이런 분노와 욕망들이 배출구를 발견했을 때 과잉된 형태를 띠며 솟구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렇게 사회를 경악시켜야, 그 소외층의 존재 역시 어떤 방식으로든 인정되기 시작한다. 무시당하기보다는 적대시되는 쪽이 자신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데 훨씬 유리하다. 하지만 전복적이고 때로 반사회적으로까지 보이는 과격성은, 현실과 마찰하면서 ‘순응’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1980년대 한국의 급진적 사회주의 운동이 그랬다. 목표는 ‘자본주의 전복’으로 거창했다. 실제로는 그들이 경멸한다던 ‘부르주아 민주주의(자유민주주의)’를 좀 더 강화하고, 임금의 대폭 인상(1980년대 말)으로 한국을 단숨에 소비 자본주의 단계로 진입시켰을 뿐이다.


ⓒ시사IN 양한모

그러나 성장기의 사회운동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이념과 증오의 인플레이션이다. 제도권과 비제도권을 막론하고 정치 행위(운동도 일종의 정치다)에서 가장 중요한 기술은, ‘적’을 잘 선별해내서 그(들)에 대한 증오를 조직하는 것이다. ‘이념의 적’을 골라내 도마 위에 올리는 ‘색출자’는 해당 집단의 ‘권력’뿐 아니라 일반 구성원들로부터도 사랑받을 자격을 가진다. 증오는 사랑만큼이나 대중을 사로잡는 강력하고 매혹적인 감정이다.

오히려 문제는, 적을 제대로 선별하지 못할 때 발생한다. 색출자는 사랑과 권력의 획득 혹은 자기만족이라는 인센티브를 지닌다. 유희와 자기 인정 투쟁(경쟁)의 일환이기도 하다. 색출에 몰두하다가 적이라는 자원을 고갈시키면 결국 적을 ‘생산’해내는 단계로 치달을 수 있다. 제조 방법은 단순하다. ‘적의 개념’을 확장하거나 새로 만드는 것이다. 박근혜 정권 출범 이후 위세를 떨친 ‘종북몰이꾼’들의 경우, 종북의 개념을 확장하자고 주장했다. 실제로 자신들의 마음에 안 들면 누구든 종북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적을 과잉생산하면 그 가치가 폭락하는 결과를 피할 수 없다.

기존 체제에 저항한다고 해서 그 운동의 모든 양태가 반드시 올바르다고 할 수는 없다.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절대 없다. 1980년대 이후 한동안 진보 진영으로부터 ‘비판받지 않을 권리’를 누렸던 노동운동이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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