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수리 한 마리가 공중을 배회하고 있었다. 인적 드문 성터를 방문한 한 무리의 인간들이 꽤 거슬렸을 것이다. 땅에 닿을 듯 말 듯 몇 차례 착륙을 시도하더니 이내 저 멀리 운젠 산 쪽으로 날아가버렸다. 하늘은 적막하고, 바다는 반짝였다. 집채만 한 벚나무 한 그루가 문지기처럼 서 있는 이 아름다운 폐허에서 400년 전의 비참을 떠올릴 수는 없었다.

1637년 이곳 나가사키 현 미나미시마바라(南島原)에서 민중 봉기가 일어났다. 발단은 가혹한 세금, 그리고 종교 탄압이었다. 새로 이 지역을 다스리게 된 마쓰쿠라 영주는 ‘기리시탄’(크리스천)을 탄압하고, 농민에게 가혹한 세금을 물렸다. 기근에도 농민들의 고혈을 짜내고, 농번기에도 성을 축조한다며 농민을 징발했다. 세금을 내지 않는 자들은 짚단으로 돌돌 말아 불을 질렀다.

급기야 농민들이 세금을 거두는 징세관을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를 기화로 농민 수만명이 들고일어났다. 당시 도쿠가와 막부 정권에서 밀려나 낭인으로 떠돌던 사무라이들도 합세했다. 1637년 12월 여성과 어린아이를 포함해 3만7000여 명이 이곳 하라 성(原城)에 집결했다.

봉기의 결말은 참혹했다. 도쿠가와 막부가 보낸 12만명의 대군에 맞서 4개월을 버텼지만, 끝내 성은 함락됐다.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대규모 민중 반란에 충격을 받은 권력은 잔인무도한 결정을 내린다. 봉기에 참여한 남녀노소 3만7000명 전원을 몰살했다.

ⓒ김진영 제공규슈 올레 미나미시마바라 코스는 바다를 끼고 걷는 ‘바당올레’다. 바다와 채소밭이 어우러진 풍경이 이채롭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가톨릭 신자 1만2000명의 목을 베어 하라 성 주변 바닷가에 진열해놓았다. 목과 몸통을 분리하지 않으면 가톨릭 신자들이 부활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였다. 봉기의 거점이던 하라 성도 완전히 무너뜨렸다. 그렇게 이곳 미나미시마바라는 아무도 살지 않는 땅이 되었다. 후대에 사람들은 이 민중 봉기를 ‘시마바라의 난’이라고 불렀다. 일본 역사상 최초, 최대의 민중 봉기 사건이다.

봉기군의 주력은 탄압받던 가톨릭 신자였다. 이곳 앞바다는 수심이 깊어서 예로부터 외국의 큰 배가 운항하기 좋은 곳이었다. 무역상과 함께 선교사들이 자주 드나들면서 가톨릭이 급속히 전파됐다. 마쓰쿠라 영주 이전에 이 지역을 다스렸던 아리마 영주도 기리시탄이었다. 당시 이 지역은 무역의 거점으로 커다란 번영을 누렸다. 시마바라의 난으로 폐허가 되기 전까지는.

난의 성격을 두고 지금까지도 해석이 분분하다. 한쪽에서는 가혹한 징세에 반발한 민중 봉기로 보는 반면, 다른 쪽에서는 종교 갈등으로 봤다. 당시 막부 정권은 시마바라의 난을 종교 갈등으로 규정했다. 이를 민중 봉기로 정의하는 순간, 자신들의 학정을 인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었다. 당시 로마 교황청은 시마바라의 난을 종교 탄압으로 보지 않았다. 지역의 가톨릭 신자들이 세례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그렇게 한동안 시마바라의 난은 일본 막부 정권과 로마 교황청 모두에게 외면당한 역사가 되었다. 지금은 종교 탄압을 바탕으로 한 ‘민중 봉기’라는 해석이 유력하다.

ⓒ시사IN 이오성400년 전 하라 성(위 성터)에서 3만7000명이 민중 봉기를 일으켰다. 봉기의 결말은 참혹했다. 남녀노소 전원이 몰살당했다.
바다와 채소밭이 어우러진 17번째 규슈 올레

‘대학살’ 이후 이곳에 이주해온 이들은 과거의 참사를 꾸준히 수집했다. 어찌 보면 자신들과 상관없는 과거라고 치부할 수도 있는 역사였다. 그들은 하라 성을 발굴하고, 유골을 수습했다. 온갖 유물과 기록이 쏟아져 나왔다. 대항해 시대에 무역의 거점이자 포교의 중심지로서 이 지역이 얼마나 번영했는지 웅변하는 것들이기도 했다. 그리고 현재 미나미시마바라 시는 이 역사적 유물을 한데 엮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시키려고 한다. 하라 성터 인근에 있는 ‘아리마 기리시탄 유산 기념관’에 가면 관련 자료를 살펴볼 수 있다. 400년 가까이 지난 지금 ‘잊힌 역사’가 다시 빛을 보는 셈이다.

미나미시마바라는 나가사키 현에 속한 작은 도시다. 규슈 섬 서쪽에 갈고리처럼 튀어나온 시마바라(島原) 반도 남쪽(南:미나미)에 있다고 해서 이렇게 이름 붙여졌다. 후쿠오카 공항에서 차로 3시간30분, 나가사키 공항에서도 2시간은 족히 걸리는 외진 곳에 있다. 인구 5만명에 농업·어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대다수다. 한국인은 물론 일본인에게도 이름난 관광지는 아니다. 딱히 번화가라 할 곳도 없어서 도시 전체가 한적한 어촌 마을 분위기를 풍긴다.

언뜻 보면 제주 서귀포의 어느 마을을 닮았다. 도시를 굽어보고 있는 운젠 산(1359m)은 한라산을 연상케 하고, 바닷가에 옹기종기 솟은 현무암은 제주 바다의 그것을 빼닮았다. 마침 지난해 11월 이 지역에 17번째 규슈 올레(미나미시마바라 코스)가 생겼다. 규슈 7개 현 모두가 코스 개장을 신청했지만, 제주올레와 규슈 관광추진기구는 심사 끝에 미나미시마바라 코스 등 두 곳만 통과시켰다. 10.5㎞ 거리에 3~4시간이 걸리는 코스다. 코스 내내 바다를 보며 걷는 ‘바당올레’(바다올레)다. 바다가 아닌 길은 거의 다 채소밭이다. 양상추 밭도 있고, 양배추 밭도 있다. 난이도는 중급이지만, 막상 걸어보면 그리 어렵지 않다. 바다와 채소밭이 어우러진 올레길이라는 점이 이채롭다.

ⓒ시사IN 이오성‘토석류 피해가옥 보존공원’에서는 화산 폭발로 인한 참상을 생생하게 접할 수 있다.

기억에 남는 것은 마을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올레길 곳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함박미소를 띠며 취재진을 맞았다. 지난해 11월 올레길 개장 이후 주민들은 한국인 올레꾼이 이곳을 찾아주기를 기대한다. 1990년대 이전 활발했던 여행자의 발길이 규슈 올레를 통해 이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과거 미나미시마바라 일부 지역을 포함한 운젠 지역은 일본 국립공원 제1호로 지정될 만큼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던 곳이었다.

그렇다면 1990년 이후 이곳에 무슨 일이 있었던가. 1990년 11월 운젠 산의 용암 활동이 감지되었다. 이듬해 1991년 6월3일 연기를 내뿜던 운젠 산 봉우리가 거대한 굉음과 함께 용암을 토해냈다. 화산재가 하늘을 가득 채웠다. 미나미시마바라의 마을 곳곳에도 화산재와 토석류가 덮쳤다.

이 화산 폭발로 43명이 목숨을 잃었다. 정부 당국이 일찍 대피령을 내려 일반 주민의 피해는 거의 없었다. 주민 대피 작업을 펼치던 소방관, 경찰 등이 사망했다. 그 가운데 가장 많이 숨진 이들은 기자와 PD 등 보도진이었다. 현장을 지키던 언론인 16명이 사망했다. 화산 폭발 이후 자연재해 시 언론의 취재 방식을 두고 일본 내에서 논란이 일기도 했다. 2005년 폭발 현장에서 촬영된 비디오테이프가 뒤늦게 발견되면서 일본 열도가 다시 한번 술렁였다. 아무튼 이 화산 폭발 이후 시마바라 반도를 찾는 여행자의 발길은 눈에 띄게 줄었다.

미나미시마바라는 또 한 번의 비극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토석류 피해 가옥 보존공원’을 조성해 당시 참상을 생생하게 남겼다. 화산재와 토석류에 뒤덮여 지붕만 땅 위로 솟아 있는 가옥들의 모습은 당시 폭발 규모가 어떠했는지 짐작하게 해준다. 인근에 있는 ‘운젠 다케 재해기념관’과 함께 둘러볼 만하다.

이 도시 곳곳에서는 독특한 석상을 만날 수 있다. 이 지역 사람들이 수호신으로 여기는 ‘전설의 거인’ 상이다. 밧줄을 들고 다니면서 폭풍우를 만난 어선을 보호하는 착한 거인이다. 하라 성터와 화산 피해 공원을 둘러보고 나면 왜 이들이 전설의 거인을 사랑하는지 알 수 있다. 비극의 역사를 간직한 이 지역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수호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나미시마바라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결국 이들이 비극을 기억하는 방식이었다. 대학살과 자연재해로 입은 상처를 차곡차곡 기록으로 쌓아 올렸다. 심지어 이 기록은 지금 이 도시의 가장 중요한 관광 자원이 되었다. 바다 건너 타국의 작은 도시를 여행하는 내내 한국의 현실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시사IN 이오성구치노쓰 항에서 배를 타고 20~30분 나가면 돌고래 수백 마리가 헤엄치는 장관을 목격할 수 있다.


놓치면 후회할 볼거리:미나미시마바라에 비극의 역사만 남은 것은 아니다. 이곳에는 놓치면 후회할 압도적인 볼거리가 있다. ‘야생 돌고래 워칭’ 투어다. 구치노쓰 항에서 배를 타고 20~30분만 나가면 돌고래 수백 마리가 헤엄치는 장관을 목격할 수 있다(위 사진). 정어리 등 돌고래가 즐겨 먹는 먹잇감이 풍부한 이 지역 바다에 400여 마리 돌고래가 서식하고 있다.

시청 관계자에게 돌고래를 목격할 수 있는 확률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더니 ‘98%’라는 답이 돌아왔다. 실제로 배를 탄 지 얼마 되지 않아 돌고래 무리가 나타났다. 돌고래의 숨소리까지 생생하게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동물원의 돌고래 쇼와는 차원이 달랐다. 사람이 돌고래를 보러 가는 것이 아니라, 돌고래가 사람의 접근을 허용해줬다고 보는 게 맞을 듯했다. 하절기에는 하루 여덟 번, 동절기에는 하루 네 번 투어가 실시된다.

교통 및 숙박:미나미시마바라 여행의 최대 걸림돌은 교통이다. 후쿠오카 공항에서 차를 빌리거나, 버스를 타고 3시간30분 정도를 달려야 이 지역에 닿을 수 있다. 그러나 10월부터는 사정이 좀 나아진다. 한동안 중단됐던 인천-나가사키 항공편이 10월부터 다시 운항된다. 나가사키 공항에서는 버스로 2시간 정도 소요된다. 숙박은 국립공원 내에 위치한 에코파크 론쇼바루(エコパーク論所原)를 추천한다. 우리의 자연휴양림 같은 곳인데 숙소에서 넓은 잔디밭 너머로 보이는 바다 전망이 압권이다. 독채 다섯 동, 캠핑 사이트 25곳이 있다. 캠핑 마니아라면 경험해볼 만하다. 온천욕을 즐길 수 있는 숙소로는 하라 성 온천 마사고, 구치노쓰 온천 시라하마 비치호텔 등이 있다. 가까운 운젠 시 온천 마을에서 숙박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시마바라 반도 전체를 여행지로 삼으면 동선이 훨씬 다양해진다.


사누키 우동이 나가사키를 만나면


ⓒ시사IN 이오성
나가사키 현 미나미시마바라에서는 좀 독특한 나가사키 짬뽕을 맛볼 수 있다. 소면으로 만든 짬뽕이다. 여기에도 아픈 역사가 서려 있다. 시마바라의 난 이후 이 지역에 가가와 현 사람들이 이주해온다. 가가와 현은 사누키 우동의 본고장이다. 이들이 자신의 고향에서 배운 면 뽑는 기술을 응용해 소면을 만들어냈다. 그 결과 400년 전통의 미나미시마바라 소면은 규슈에서도 손꼽히는 명물이 되었다. 사람이 일일이 면을 뽑고, 늘리고, 꼬아서 말리는 작업을 꼬박 이틀에 걸쳐 반복한다. 기계로 뽑는 면에 비해 세 배 정도 공정이 필요하다. 맛은 어떨까. 겉은 부드럽고 안은 쫄깃하다. 차가운 가쓰오부시 장국에 소면을 담가 먹었더니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 이 취재는 미나미시마바라 시의 후원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기자명 이오성 기자 다른기사 보기 dodash@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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