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주말극 〈그래, 그런 거야〉(2016)가 지난 8월21일 54회로 종영했다. 당초 60부작으로 알려진 작품이었다. 방송사 측은 리우 올림픽 중계를 위한 회차 조정이라고 밝혔지만, 세간의 시선은 조금 달랐다.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그래, 그런 거야〉는 광고 판매율이 20%가 채 안 된 것으로 알려졌고, 회당 1억5000만원가량의 적자 폭을 남긴 것으로 추산된다. 단순히 리우 올림픽이 문제였다고 이야기하기에는 가혹한 수치였다.

단순한 흥행의 문제였다면 그래도 화제가 덜했을 것이다. 문제는 〈그래, 그런 거야〉를 집필한 이가 1972년 MBC 드라마 〈무지개〉로 작가 데뷔를 한 이래 지난 40여 년간 한국 드라마를 논할 때 제일 먼저 거론되는 김수현 작가였다는 점이다. 작품 세계 또한 그녀가 가장 잘 다루는 장르인 대가족 이야기였다.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는 가부장 할아버지와 선량하고 효심 깊은 아들들, 유능한 며느리들과 신세대 손주 세대가 한집 울타리 안에 부대끼면서 살아가는, 꼬장꼬장하고 빠른 말씨의 서울 사투리를 쓰는 가족. 〈그래, 그런 거야〉 또한 이 익숙한 캔버스에 그린 그림이었으되 반응은 전과 같지 않았다.
철이 없음을 넘어 캐리커처 수준으로 그려진 유리(왕지혜)나, 남편과 시어머니를 잃고도 여전히 시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지선(서지혜), 시부모에게 인정받는 것을 생의 낙으로 삼으면서 혼자 그 큰 집안일을 도맡아 하다시피 하는 혜경(김해숙) 등의 인물이 현실감이 없는 수준을 떠나 시대착오적이라는 지적을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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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2월11일 서울 목동 SBS에서 열린 〈그래, 그런 거야〉 제작발표회 모습.
실망스러운 작품에는 토로가 이어지기 마련, 김수현 작가의 한계를 보았다는 시청평이 줄을 이었다. 혹자는 “김수현 작가는 원래부터 가부장제의 가장 성실한 옹호자였고, 이번에 그 사실이 더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뿐”이라는 평을 내리기도 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대가족 내에 새로운 변화상을 반영하긴 했으나, 늘 온화하고 바람직한 사고관을 가진 가부장이 집안의 모든 갈등이나 불화 요소를 포용하고 봉합하는 방식으로 마무리하면서 가부장제의 유효함을 역설해왔다는 것이다.

얼핏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KBS 〈부모님 전상서〉(2004~2005)의 화자 재효(송재호)는 남편과의 불화에 시달리는 딸의 이혼을 끝까지 말려보지만 끝내 친정으로 돌아온 딸과 장애를 지닌 손자를 모두 품어내는 인성의 소유자였고, SBS 〈인생은 아름다워〉(2010)의 병태(김영철)는 아들의 성 정체성을 알게 된 후에도 충격을 억누르며 아들이 짊어지고 있었을 부담감을 먼저 헤아리는 보기 드문 가부장이었다. 김수현의 세계에서 장애·이혼·동성애 등의 다양한 이슈는 선량한 가부장의 질서 아래 포용된다. 더구나 스스로를 ‘보수 꼰대’라 칭하며 가족이라는 울타리 자체를 깨지 않는 이야기를 추구해온 김수현 작가 아닌가.
가부장제는 상수, 개인의 욕망은 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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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김수현 작가.
하지만 이걸 단순히 가부장제에 대한 옹호라고만 축약하는 순간 우리는 김수현의 세계를 절반만 이해하게 된다. 가장 단순하게, 김수현이 대가족 형태가 아닌 삶을 그린 작품들에 대한 이해가 불가능해진다. 남편이 불륜 끝에 돌아왔지만 “스무 번 돌려 읽은 책 같다”라는 말로 재결합을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아들과 살아가는 지수(배종옥)와, 친구를 저버려가며 갈망했던 남자를 손에 넣었으나 더 이상 그 삶을 지속할 수 없었기에 모든 것을 순식간에 정리하고 미국으로 떠나버리는 화영(김희애)이 주인공이었던 SBS 〈내 남자의 여자〉 (2007)는 가부장제로 설명할 수 없는 개인의 삶과 욕망에 대한 작품이었다. 평생 가족을 돌보며 살아온 엄마가 안식년을 요구한다는 파격적인 설정의 KBS 〈엄마가 뿔났다〉(2008)는 본디 주인공 한자(김혜자)가 이혼을 하는 설정이었던 것이 그나마 완화된 작품이었다. 김혜자는 2009년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김수현이 그리고자 했던 세계의 원안을 슬쩍 내비친 바 있다. “집을 나가는 것도 착한 남편을 봐서라도 그냥 살 수 있을 것 같아 ‘문제가 없잖아’라고 말했더니, 김수현 작가가 ‘난 문제가 없는데 나가고 싶어 하는 여자를 그리려는 거예요’라고 잘라 말하더라고요.”

문제가 없는데 나가고 싶어 하는 여자, 남편이 돌아왔는데 받아줄 생각이 없는 여자. 김수현은 한국인의 뇌리에 박힌 익숙한 가족의 형태가 대가족이며, 다양한 세대가 부대끼는 광경을 그려내는 데 그만한 캔버스가 없다는 점을 순순히 인정한다. 하지만 이렇게 그 가족의 형태로도 미처 다 포용할 수 없는 개인의 욕망이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거나 억지로 봉합하려 하지 않는다.

SBS 〈세 번 결혼하는 여자〉(2013~2014)의 은수(이지아)에 이르면 김수현이 그리는 세계의 변혁은 더 거대해진다. 은수는 첫 결혼에서 얻은 딸을 남편 태원(송창의)에게 맡기고 지옥 같은 시댁에서 벗어나 이혼을 감행한다. 두 번째 남편 준구(하석진)의 불륜도 참아 넘기려 하지만 끝내 인간적인 모멸을 참지 못하고 두 번째 이혼을 결심한다. 그러고는 홀로서기에 나서며 직접 반지를 마련해 왼쪽 약지에 끼우며 다짐한다. “나는 나랑 결혼했다.” 김수현이 〈세 번 결혼하는 여자〉를 통해 그린 세 번째 결혼은, 그 누구의 아내나 며느리가 아닌 채로도 완전한 존재임을 긍정하는 개인의 탄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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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현 작가의 드라마 〈부모님 전상서〉 〈인생은 아름다워〉 〈세 번 결혼하는 여자〉(맨 위부터).
김수현에게 가부장제는 상수이며 많은 이들이 그 자장에서 자유롭지 못한 현실이다. 김수현은 그것을 부정하거나 대안을 제시하는 대신, 기왕 존재할 거면 더 정의롭고 포용하는 체제가 될 것을 끊임없이 요구했다. 말하자면 삼대가 모여 사는 대가족이 좌충우돌 끝에 화합을 그리는 모습을 통해, 당대 한국 사회가 직면한 문제점들을 다양한 세대의 총합인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가 원만하게 해결하고 포용하길 요구해왔던 셈이다. 김수현의 홈드라마 속 가부장이 완고한 존재로 그려지는 것은 그녀가 당대를 보는 현실 인식이지만, 끝내 포용하고 용서하는 어른으로도 그려지는 건 그녀가 한국 사회에 요구하는 사항일 것이다. 그런 요구들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순간, 즉 가부장제가 개인의 욕망을 긍정하고 수용할 방법을 찾지 못해 구성원들에게 부당한 희생을 강요하며 울타리로서 지녀야 할 정의로움을 잃는 순간, 김수현은 그런 체제는 존재할 필요가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것이 김수현 작가가 은수의, 한자의, 화영과 지수의 입을 빌려 설파해온 이야기다.

〈그래, 그런 거야〉의 실패는 쓰라리고, 거장의 손끝에서 범작이 나오는 걸 지켜보는 건 즐거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 한 편의 답보가 김수현의 전체 작품에 대한 평가절하로 이어져선 안 된다. 그녀는 적극적으로 체제의 파산을 선언하거나 대안을 모색하지는 않았을지언정 끊임없이 체제의 한계를 지적하며 더 정의롭고 보편적이 될 것을 주문해온 개혁가이니 말이다. 이어지는 글에서는 가볍게 상술하고 지나간 것들, 즉 이혼과 재혼과 장애 아동과 동성애자의 존재를 긍정하고 포용하라고 기존 체제를 다그쳐온 김수현 작가의 행보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려 한다.

기자명 이승한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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