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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레인지 앞 그대를 위하여

정치하는 분들은 왜 밥 문제에 관심이 없는가? 소득분배, 물가 조정 등 수많은 정책이 다 밥걱정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빠진 게 있다. 밥을 누가 하느냐의 문제이다.

문경란 (서울연구원 초빙연구위원·전 서울시 인권위원장) webmaster@sisain.co.kr 2016년 09월 20일 화요일 제4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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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여름에는 집밥을 먹은 적이 별로 없다. 손가락으로 꼽을 만하다. 바깥에서 먹는 밥에 질려 주말이면 찌개 하나로도 집밥을 고집해온 편이다. 그런데도 동네 식당을 전전했던 이유는 더워서였다. 잠시만 가스레인지를 켜놓아도 금세 땀범벅이 되어 견디기 힘들었다. 그건 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모른다.

더위가 한풀 꺾인 듯해도 만나는 사람마다 인사는 온통 찜통더위 얘기다. 지구온난화에 대한 걱정, 정부의 한심한 전기요금제에 이어 집에서 밥할 엄두를 못 냈다는 얘기도 빠지지 않았다. 대학가에 사는 지인은 학교 구내식당을 애용했다고 했다. 한 시민단체 활동가는 에어컨 없이 버텼지만 집에서 밥을 하다가는 더위를 먼저 먹을 것 같았단다. 온 가족이 밥을 사 먹다 보니 가계부 적자가 크다고 울상이었다. 여름 내내 커피숍과 식당을 전전하며 ‘카페 난민’ ‘식당 난민’으로 견뎠다는 주부들의 얘기도 적잖았다.

1990년대 초반 홍콩에 갔을 때 가장 인상적으로 다가온 것은 주말의 식당 풍경이었다. 가족들이 여유 있게 아점(아침과 점심을 겸한 식사)을 먹으면서 대화를 하는 모습이 신기했다. 이후 동남아 국가에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낮은 반면 가사노동으로부터 상당히 해방되어 있는 것을 보고 의아했는데 올여름에서야 그게 더위 때문이란 걸 깨달았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밥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건강한 밥과 그로부터 나오는 밥심은 만사의 초석이다. 그런데 왜 정치하는 분들은 밥 문제에 관심이 없는가? 소득분배와 물가 조정과 국민연금 등 수많은 정책이 다 밥걱정이라고 항변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빠진 게 있다. 밥을 누가 하느냐의 문제다.

우리 사회는 주부의 무급 돌봄 노동에 기대어 밥 문제를 해결해왔다. 밥뿐이랴. 모든 게 돈으로 환원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유독 가정에서 행해지는 의식주, 출산과 육아, 환자와 노인의 돌봄은 공짜다. 이것이 가능하도록 하는 게 가부장제다. 근대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는 “식탁이 풍요로운 것은 푸줏간 주인이나 빵 굽는 이가 자비롭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에 따라 행동했기 때문이다”라고 설파했다. 이에 대해 낸시 폴브레라는 여성학자는 잘 생각해보라고 말한다. “식탁을 차렸던 것은 푸줏간 주인이나 빵 굽는 이가 아니라 보통의 아내나 어머니들”이라는 것이다. 시장에서 작동하는 ‘보이지 않는 손’은 ‘보이지 않는 가슴’을 토대로 하고 있다. 국가는 돌봄 노동을 가족의 영역에 가두어두고 ‘모성’ 또는 ‘사랑의 노동’이란 미명하에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공짜로 이용해왔다.

밥상 복지 실현할 ‘동네 밥상’을 제안한다


그럼 누가 밥을 하고 식탁을 차릴 것인가? 응당 남녀가 함께해야 한다. 여성이 돌봄 노동을 전담하는 이상, 여성의 평등한 노동권은 보장될 수 없다. 현재로서는 여성이 ‘놀고먹는’ 사람이 되거나, 임금 노동과 돌봄 노동의 이중 노동에 시달리거나, 돌봄 노동과 유사 직종에 종사함으로써 저임금을 감수해야 한다.

남성이 돌봄 노동을 균등하게 분담해야 한다는 당연한 전제하에 나는 지방자치단체장들에게 마을마다 ‘동네 밥상’을 차려보라고 권한다. 아이를 키우는 일을 부모가 함께해도 어린이집 같은 보육시설이 따로 필요한 것과 같은 이치다.

정치가 무엇인가? 국민이 잘 먹고 잘 살도록 하는 것이 정치의 본질이다. 아열대를 방불케 하는 한반도 기후를 감안하면 앞으로 여름마다 ‘탈(脫)부엌’과 ‘식당 난민’ 사태는 가속화될 것 같다. 불가마 더위에 온 국민이 잘 먹고 건강하게 생활하도록 하는 일은 정치의 우선 과제다. 지자체가 나서 위생 시설을 갖춘 식당을 마련하고 좋은 식자재를 이용해 무료 또는 적절한 가격으로 주민들에게 맛있는 식사를 제공하는 ‘동네 밥상’이 필요한 이유다.

‘동네 밥상’의 유용성과 필요성은 다방면으로 크다. 요즘도 쿠폰을 들고 동네 식당을 전전하는 저소득 가정의 아동들은 더 이상 ‘눈물의 밥’이라는 낙인과 상처를 삼키지 않아도 될 것이다. 퇴근이 늦어져 종종걸음을 치는 워킹맘, 가족이 없으면 혼자서 대충 한 끼를 때우는 전업주부에게도 요긴할 것이다. 은퇴한 노부부가 품위를 잃지 않고 삼시 세끼 중 한 끼 정도를 해결할 수 있다면 밥 때문에 부부 사이가 나빠지는 사태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복지의 시대다. 복지 중에 밥상 복지, 건강 복지가 우선이고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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