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에는 명절을 좋아했다. 오랜만에 친척들을 만나고, 용돈도 받고, 맛있는 것도 먹을 수 있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 용돈이 결국 부모에게서 나간 돈의 우회적 회수이고, 친척들이 모이면 좋은 일이란 생기지 않으며, 맛있는 음식들은 여성들의 뼈 빠지는 노동의 산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지금 나는 명절이라는 이름의 가부장제적 가족 행사가 앞으로 두 세대 정도 지나면 사라지거나 최소화되리라 확신한다.

그럼에도 여름휴가마저 주말을 겨우 끼고서야 4박5일이 일반적인 나라에서 추석 같은 장기 휴일이 보장된다는 건 중요하다. 하지만 막상 시간이 주어져도 신나는 이벤트, 멋진 여행지와 연결되지 못할 때 우리는 영혼 깊이 스며드는 억울함과 쓸쓸함을 느낀다. 우리에게 내려온 몇 안 되는 구원 중 하나가 바로 ‘정주행(시리즈물을 첫 회부터 마지막 회까지 보는 것)’이다. 이는 가장 적은 비용으로 문화적이고 감각적인 만족을 얻으며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임에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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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행하기 좋은 작품 세 편을 추천하는 데 ‘벡델 테스트’를 참고했다. 1985년 미국의 만화가 엘리슨 벡델의 〈다이크스 투 워치 아웃 포(Dykes to Watch Out For)〉에서 등장한 것으로 해당 작품에 이름을 가진 여성 캐릭터가 최소 2명이고, 그 여성 캐릭터가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남성에 대한 것 이외의 주제로 대화를 할 것이라는 세 가지 조항을 충족하는지가 기준이다. 얼핏 보기에는 이게 뭐 어렵겠느냐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러나 2013년 영국 〈메트로〉가 할리우드 영화 4000여 편을 분석한 결과 이 테스트를 충족시키는 작품은 55%에 그쳤다. 비록 이 테스트의 내용이 그다지 엄밀한 것은 아니지만, 할리우드가 얼마나 ‘남탕’인지를 가늠하기에는 충분해 보인다.

물론 영화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미디어는 편견으로 가득한 여성성을 퍼트리고 공고화하는 일등공신이다. 비현실적 몸매의 젊고 아름다운 여성들이 약하고, 의존적이고, 허영심 많고, 이기적인 모습으로 일을 그르치기 일쑤다. 세상에서 제일 심각하고 중요한 일을 하는 남자 주인공은 여자도 구하고 세상도 구하고 마지막에는 전리품처럼 미인들과 함께 사라진다. 때때로 여자가 영웅적인 행동을 할 때가 있는데, 그건 그 사람이 엄마일 때다.

물론 이런 상황과 관련해 수많은 이들이 미디어가 설파하는 양성에 관한 이념형과 클리셰들을 깨트리기 위해 노력해왔다. 가령 최근 벌어진 몇몇 작품을 둘러싼 논란을 생각해보자. 두 여성의 사랑을 담은 영화 〈캐롤〉에 대한 외면과, 출연진의 성별을 반전시켜 리메이크한 SF 코미디 영화 〈고스트 버스터즈〉에 대한 낮은 평가와 출연 배우에 대한 사이버 폭력이 도마 위에 올랐다. 혹평을 내리는 이들은 이 영화들이 남성을 주변화하고 있다고 분노를 터트렸다. 그런 뛰어난 통찰력이 왜 그동안 수많은 영화에서 수없이 주변화되었던 여성에게 적용되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소개할 작품은 모두 여성이 단독 주연이거나,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드라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세 작품 모두에서 이들은 범죄나 악당과 맞서 싸운다. 기본적으로는 입체적이고 매력적인 ‘인간-여성들’이 중요하게 등장하는 이야기들이다. 그런데 단지 그 ‘인간-여성들’이 전면에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그간 인간을 대표하던 남자들의 이야기가 얼마나 따분하고 낡은 것이 되는지 보면 새삼 놀라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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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피셔의 살인 미스터리〉에서 프리네(앞 오른쪽)는 황금색 권총을 들고 다니며 사건을 해결한다.

■본드걸은 가라,〈미스 피셔의 살인 미스터리〉

배경은 1920년대의 오스트레일리아(캥거루가 있는 곳)의 멜버른. 막대한 재력을 가진 귀족 여성인 프리네 피셔가 이 작품의 주인공이다. 원작은 오스트레일리아 작가 케리 그린우드의 〈프리네 피셔 미스터리(Phryne Fisher Mysteries)〉 시리즈이며, 오스트레일리아 ABC에서 시즌 3까지 방영되었다.

여자는 조신해야 하고, 혼자 밤길을 다녀도 안 되며, 남자들에게 잘 보일 궁리에나 열중해야 하는 지리멸렬한 기준들이 장악하고 있는 시대에, 주인공 프리네는 황금색 권총을 들고 온 동네를 들쑤시고 다니며 살인 사건을 해결한다. 그녀는 스스로를 ‘레이디 디텍티브’라고 소개하는데, 당연히 모든 남자들은 그 이야기에 코웃음을 친다. 하지만 사건 해결을 위해 물불 안 가리는 집념과, 수많은 경험을 통해서 익힌 뛰어난 기술, 그리고 막대한 재력 덕분에 하나둘씩 사건을 해결하게 된다. 처음에는 그녀를 무시하려고 애쓰던 관할 경찰서의 잭 로빈슨 경위도 결국 프리네를 인정하게 된다.

프리네는 금욕과는 거리가 멀다. 시즌 1의 초반부에는 매 화 남자가 바뀐다. 결혼도 하지 않았고 그럴 생각도 없어 보인다. 실제로 프리네는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구속받지 않는다. 인종, 성 정체성, 계급, 신분 그 어떤 것에도 편견이나 거부감을 가지고 있지 않다. 또 프리네는 언제나 여성들을 돕는다. 자신의 중요한 조력자인 여성들은 모두 사건 해결 도중에 구출한 인물들이다. 프리네는 누구든지 원한다면 모든 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그렇게 행동한다. 그가 발산하는 영감들은 당연히 그를 만난 수많은 여성들에게 귀감이 된다.

1920년대를 배경으로 화려한 옷차림에 권총을 들고 위험한 곳을 누비는, 아무런 편견 없는 페미니스트 탐정을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하드보일드나 누아르에서 상투적으로 그려지던, 비밀을 간직한 ‘예쁜 나무토막’으로서의 여성이 아니라, 오히려 남자들을 병풍 삼아 사건을 해결하는 여성 탐정이 나타난 것이다. 그녀의 행동에는 의뭉스러움이 없고, 쓸모없는 죄책감이나 불안감에 시달리지 않는다. 매 화 살인사건이 벌어지지만 그녀의 활약상을 감상하는 것은 신나는 경험이다.

이 작품이 미국에서 인기를 얻자 일군의 미국인들이 프리네가 너무 문란한 것 아니냐고 항의를 했다고 한다. 작가는 오스트레일리아 방영 시에는 방송국은 물론이고 나이 든 여성이나 수녀들마저도 단 한 번도 이런 항의를 하지 않았다며 놀라워했다. 또 누구도 제임스 본드가 여럿과 관계하는 것을 그의 문란함의 지표로 삼지 않는다며, 1970년대에나 존재하던 기준을 들이대지 말라고 일축했다.

실제로 이는 프리네가 여성이 아니었다면 결코 나오지 않았을 종류의 항의다. 생각해보면 ‘본드걸’이라는 명칭을 대단한 벼슬이라도 되는 듯이 붙여주고 추켜세웠던 007 영화 속의 여성들은 결국 본드와 사랑에 빠지고, 잠시 아름다움을 뽐내다가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으로 퇴장한다. 반면 프리네의 남자들은 잘만 살아 있으니 누가 더 문제인지는 명확하지 않을까?

내용과는 별개로, 이 시리즈를 서비스하는 넷플릭스에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다. 이 작품의 한국어 포스터는 그림판 수준의 처참한 디자인으로 만들어져 있다. 당연히 나도 그 허접한 포스터의 포스에 눌려 처음에는 이 작품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입소문 마케팅을 위한 의도적인 장치가 아니라면, 제발 어떻게 좀 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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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카 존스〉의 제시카(오른쪽)는 ‘전직’ 영웅으로 트라우마를 극복하며 악당 킬그레이브와 맞선다.

■슈퍼 쿨녀, 〈제시카 존스〉

제시카 존스는 마블코믹스의 작품에 등장하는 영웅 중 한 명이다. 제시카는 여타의 영웅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힘과 점프력, 단단한 신체와 초인적인 회복력 등을 가졌다. 힘의 크기를 굳이 따지자면 헐크보다는 캡틴아메리카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제시카는 엄밀히 말해 영웅이 아니라 ‘전직’ 영웅이다. 힘을 얻게 된 후 제시카는 다른 영웅들처럼 코스튬 히어로로 활약했다. 그러나 ‘킬그레이브(퍼플맨)’라고 불리는 악당과 조우하면서 문제가 생긴다. 킬그레이브의 능력은 사람들의 정신을 조종하는 것이다. 제시카는 그에게 사로잡혀 학대당하고, 원치 않는 일들을 해야 했다. 우연한 계기로 킬그레이브로부터 벗어난 후 제시카는 알코올 중독과 트라우마에 시달렸고, 결국 영웅 일을 접고 사립탐정이 되기로 한다.

작품에 등장하는 악당인 킬그레이브는 기분 나쁜 악몽 같은 존재다. 그는 통제광이고, 사이코패스이며, 강간범이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사용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고, 누군가를 완벽하게 통제하는 행위 자체에서 가장 큰 쾌감을 느낀다. 그런 그에게 제시카는 가질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장난감이었고, 다시 한번 제시카를 손에 넣기 위해 제시카의 친구들과 아무 상관없는 무고한 이들을 잔인하게 이용한다.

킬그레이브는 오늘날 여성들이 겪고 있는 성적인 폭력이나 학대를 집대성한 캐릭터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제시카 존스는 그런 폭력을 당한 생존자가 스스로의 상처를 극복하고, 스스로의 힘을 자각하며, 폭력에 대항하기 위한 연대를 구축하고, 마침내 극복에 성공하는 일련의 과정을 영웅 이야기 속에서 훌륭하게 녹여내고 있다.

〈제시카 존스〉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들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우유부단하게 굴거나 징징거리지 않는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몫을 해내려 노력하고 실제로도 그렇다. 주요하게 등장하는 여성들은 영웅적인 면모(어떤 때는 제시카보다 더 많이)를 지니고 있으며, 제시카에게 기대지 않고 독립적으로 행동한다. 격정적인 섹스 장면이 많은 편이지만 무의미한 노출은 적다. 제시카 존스는 한 시즌 내내 단벌 가죽 재킷과 청바지를 입고 활약한다. 아마도 지금까지 극으로 제작된 모든 여성 슈퍼히어로 중에서 제시카는 가장 쿨한 존재일 것이다.

이 작품에는 1화부터 다른 히어로가 등장하는데, 마블의 인기 있는 영웅 중 하나인 ‘루크 케이지’다. 강철 같은 단단한 몸과 엄청난 힘을 지닌 그는 뉴욕의 할렘에서 태어나고 자란 흑인이다. 그와 함께 이 작품에서는 유색 인종, 여성, 동성애자의 속성을 가진 이들이 주요 등장인물로 활약한다. 이는 자칫 허무맹랑해질 수 있는 히어로물을 하나의 단단한 이야기로 만들어주는 데에 중요한 구실을 한다.

올해 7월에 열린 코믹콘에서는 앞으로 진행될 마블과 넷플릭스의 드라마 프로젝트 일정이 공개되었다. 이미 드라마로 공개된 〈데어데블〉과 〈제시카 존스〉, 조만간 공개되는 〈루크 케이지〉와 이후에 나올 〈아이언 피스트〉를 거쳐 마침내 2017년 〈디펜더스〉를 선보일 계획이다. 예습의 중요성을 굳이 강조하지는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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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멘트리〉는 〈셜록 홈즈〉를 재해석한 작품으로 아시아계인 루시 리우(왼쪽)가 출연한다.

■홈즈보다 왓슨, 〈엘리멘트리〉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추리소설의 목록에서 〈셜록 홈즈〉 시리즈를 제외하는 정신 나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연재하던 당시에도 팬들의 성화에 못 이겨 석연찮게 홈즈를 부활시켜야 했던 코넌 도일은, 지금까지도 가장 위대한 추리소설가로 기억되고 있다.

베네딕트 컴버배치를 세계적인 스타의 반열에 올린 BBC의 인기 시리즈 〈셜록〉, 휴 로리가 열연했던 〈닥터 하우스〉, 가이 리치 감독의 영화 〈셜록 홈즈〉를 포함하여 홈즈 시리즈를 재해석하려는 창작자들의 열정은 끊이지 않았다. 〈엘리멘트리〉 역시 이런 셜록 홈즈를 재해석한 작품이다. 현대 뉴욕을 배경으로 천재 자문 탐정인 셜록 홈즈가 사건을 해결한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왓슨을 맡은 배우는 아시아인이자 여성인 루시 리우다. 조앤 왓슨은 외과의사였으나 지금은 의사를 그만두고 중독 재활치료사로 일하고 있다. 반면 홈즈는 어떤 이유로 극심한 마약중독에 빠졌고, 엄청난 부호인 그의 아버지가 왓슨을 고용하여 함께 지내게 된다는 것이 이야기의 시작이다.

모든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그리는 홈즈는 천재다. 간단한 관찰만으로도 사람의 신상을 털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준다. 타인의 무지를 참지 못하고, 사람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한다. 오만하고 이기적이고, 여성혐오적인 발언을 일삼는다. 사실 홈즈를 모티브로 한 작품에서 여성이 중요하게 나오는 일은 거의 없다(물론 홈즈의 오래된 연인인 아이린 애들러는 다소 특별하게 다뤄진다). 하지만 최근에 나온 ‘홈즈물’의 명백한 경향은 ‘홈즈는 왓슨밖에 모르는 바보’라는 식의 브로맨스를 부각시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오늘날 셜록 홈즈 ‘덕질’의 핵심 요소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엘리멘트리〉의 홈즈도 여타의 작품들과 비슷하다. 하지만 이 작품에는 홈즈의 여성혐오적 발언에 “오 그건 여성혐오적이네요!”라며 짚고 넘어가는 조앤 왓슨이 있다. 왓슨은 자신의 삶과 홈즈의 동료로 지내는 것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노력하고, 탐정 일에 대한 자신만의 열정을 갖게 되는 캐릭터로 묘사된다.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지는 대신 서로에게 끈끈한 신뢰를 주는 동반자적 관계로 묘사된다. 〈엘리멘트리〉가 방영될 때 일부에서는 두 사람 사이의 케미가 BBC의 〈셜록〉에서 보여주는 셜록과 존 커플에 비하면 한참 못 미친다는 불평 아닌 불평도 있었다.

이제는 여성이 단독 주연을 맡은 수사물이나 추리물을 많이 찾아볼 수 있지만, 셜록 홈즈의 세계에 여성들을 중요하게 등장시킨 작품은 이 작품이 처음일 듯하다. 조만간 여자 셜록 홈즈를 주인공으로 하는 작품이 나와 몇몇 사람들을 분통터지게 할 것이라는 데에 500원을 걸겠다.

기자명 최태섭 (문화평론가·〈잉여사회〉 저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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