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를 점령한 미군은 2003년 사담 후세인의 군대를 전격 해체했다. 이라크 정규군 장병은 모두 실업자가 되었다. 대부분 후세인과 같은 수니파였다. 직업을 잃은 군인이 갈 곳은 고향뿐. 이라크 서부 안바르 주나 티크리트, 북부 모술, 동부 디얄라 주 등 대부분 수니파의 대표 지역으로 떠나갔다. 부대에 있던 각종 무기를 트럭에 싣고서.

이라크 서부 안바르 주의 팔루자는 변화의 계기를 맞았다. 본래 미군에 대한 저항이 격렬했던 곳이다. 이곳에서 ‘유일신과 성전’이라는 이슬람 무장 조직이 태동했다. 유일신과 성전은 2004년 ‘김선일 참수 사건’을 주도한 조직으로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이 조직은 팔루자에서 성장을 거듭해 이슬람국가(IS)의 전신인 ‘이라크·레반트 이슬람 국가(ISIL)’가 되었다. 해직 군인이 여기에 합류했다. IS는 손쉽게 정식 군대 조직을 만들 수 있었고 군인에게는 새로운 직장이 생겼다. IS를 키운 건 각종 종교 이론이나 명분이 아니라 실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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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t Press News미국 주도로 구성된 연합군의 한 병사가 시리아의 알오마르 유전지대에서 경계 근무를 서고 있다.

반군과 IS가 공동 군사작전을 펼치면서 시리아 정부군 전사자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자유시리아군과 IS의 결합은 그야말로 환상이었다. 알아사드 정부군을 몰아내고 반정부 세력이 시리아를 접수할 것 같았다. 그러나 동맹은 오래가지 못했다. IS는 반군이 장악한 북부의 알레포와 라카 지역에서 독자 행보를 시작했다.

2012년 11월, 그들은 기수를 시리아 서부 데이르에조르(Deir ez-Zor)로 돌렸다. 수도 다마스쿠스로부터 북동쪽으로 450㎞, 유프라테스 강과 접한 도시이다. 그곳에는 시리아 최대 유전인 알오마르가 있었다. 필자는 2015년 터키 남부 도시 가지안테프에서 피란 나와 있던 아부아마르를 만났다. 그는 알오마르 유전에서 고위 간부로 일했다. 아부아마르는 2012년 IS를 처음 만난 그날을 생생히 기억했다. “유전 시설은 아무나 만질 수 있는 게 아니다. IS 군인 중에는 기술자가 있었다. 이들은 이라크 유전 지대에서 일을 한 경험이 있는 듯했다.” 그는 사무실에서 울리는 총소리를 뒤로하고 직원들과 정신없이 도망쳐 나왔다. IS는 이라크 최대 정유시설이 위치한 바이지도 비슷한 방식으로 손에 넣었다. IS는 시리아와 이라크의 최대 유전 두 곳을 손에 쥐게 되었다.

IS는 유전을 점령하자마자 시내의 종합병원으로 달려가 중환자실에서 환자를 끌어냈다. 의료진도 총을 든 IS 군인을 막아설 재간이 없었다. 그들은 병원 마당에서 중환자의 목을 참수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주기 위해서였다. 일부러 얼마 살지 못하는 중환자를 골랐다. 의사로서 그 장면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내가 살리려 애쓰던 환자들의 목을 순식간에 자르다니…. 당신은 상상할 수 있겠는가.” 당시 내과 의사로 현장을 목격했던 칼리드 씨의 증언이다.

그날 칼을 든 이들은 아랍인이 아니었다. 체첸 출신이었다. 시리아에서 IS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자 외국인 전사가 꾸준히 늘었다. 가장 먼저 유입된 이들이 체첸인이다. 최고 지도자 알바그다디의 오른팔이자 ‘붉은 수염의 오마르’라고 불렸던 아부오마르 알시샤니가 체첸 전사 중 가장 두각을 나타냈다. 현상금 500만 달러가 걸렸던 그는 지난 7월, 이라크 모술에서 미국의 무인기 공격으로 사망했다. 시리아 주민은 체첸 출신을 ‘칼잡이’라고 부른다. IS의 트레이드마크가 되다시피 한 ‘참수’를 주도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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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 Photo지난 7월 미군 공습으로 사망한 체첸 출신 이슬람국가(IS) 최고 사령관 아부오마르 알시샤니(가운데).

체첸 반군 출신이 IS에서 악역 담당

중동 각국에서도 젊은 전사가 IS에 합류했다. 2011년부터 중동과 마그레브(이집트 외 북아프리카)에서 각각 8000명씩 몰려왔다. 아랍의 봄 당시 시위의 선봉에 섰던 젊은이가 많았다. 그들은 세상이 크게 변하지 않는 데 비관했다. 처음에는 독재에 반대하는 순수한 정의감을 가진 청년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일단 IS의 체계적인 훈련 캠프에서 몇 주만 교육받으면 종교적인 신념으로 무장했다. 순식간에 이들은 지하디스트로 변신했다. 위험한 전투에 뛰어들고 자살폭탄 테러를 준비했다. 철저히 IS의 전쟁 도구가 된 것이다.

아흐메드 알다라위(38)는 이집트 출신의 전직 경찰로 부유층 자제였다. 2011년 말 아랍의 봄이 불붙자 세 아이의 아버지였던 그는 시위대의 맨 앞줄에 섰다. 동료 시민운동가 무함마드 카사스는 “그는 경찰행정 경험이 있었기에 혁명이 모든 것을 바꾸리라는 환상을 품지는 않았다. 아주 현실적이고 세부적인 개혁안을 내놨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성공했다고 믿었던 시민혁명 후 그는 절망했다. 민주화가 아니라 또 다른 독재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2013년 7월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독재정권이 들어섰다. 1년여 뒤 그는 IS 전사로 이라크 티크리트에서 싸우다 전사했다. 시민혁명가로 하여금 IS 전사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만든 것은 환멸이었다. IS 전사 중에는 아랍의 봄 진원지인 튀니지 출신이 가장 많다.

2013년부터 IS는 영토와 자금줄을 확보하는 데 더 열을 올렸다. 믿어주고 받아준 시리아 부족도 학살하기 시작했다. 데이르에조르 주에서도 피바람이 불었다. IS는 자유시리아군과 관계를 끊고 자신들에게만 충성하라고 강요했다. 거절하는 부족은 전체를 몰살하다시피 했다. 참수 사태가 벌어졌다. 희생되거나 마지못해 협조했다. 2013년 7월12일 IS는 자유시리아군 사령관 카말 하마미를 살해했다. 이를 기점으로 자유시리아군과 IS는 돌아오지 못할 다리를 건넜다. 자유시리아군 지휘관인 아하마드 살라딘 대령은 피의 보복을 다짐했다. 짧은 동안 친구 사이였던 이들이 서로 총을 겨누는 적이 되었다. 반정부군은 살쾡이를 잡으려다 범을 불러들였다.

2013년부터 시리아 전쟁은 삼파전이 되었다. 셋이 서로를 공격하는 복잡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IS는 주민 중 누군가가 자유시리아군과 접촉한 정황을 포착하면 바로 참수했다. 반군의 대표 거점인 북부 알레포에서도 비슷한 혼란이 계속되었다. 알레포 주민 모하메드 씨(37)는 “IS는 엄격한 규율을 강요했다. 담배와 술을 금지했다. 남자에게는 수염을 깎지 마라, 여자에게는 외출 시 얼굴을 보이지 말라며 괴롭혔다. 알레포는 본래 자유로운 도시였다. 서구 사람들이 즐겨 여행하던 곳이다. 이런 지역에 사는 이들을 이슬람 성직자로 만들려고 했다”라고 말했다. IS는 반군의 대표 도시, 알레포와 라카에서 점차 세력을 넓혀갔다. 그럴수록 자유시리아군과의 전투도 심해졌다. 알아사드 정부에게는 이런 호재가 없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 국제사회의 냉대 속에 알아사드의 퇴진은 시간문제였다. IS가 알아사드를 구해준 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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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 Photo2013년 8월 시리아 난민 3만여 명이 이라크 국경을 넘어 쿠르드 자치지역인 페슈카부르로 갔다.

국제사회는 우왕좌왕했다. 미국조차 IS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가 부족했다. 서구 사회는 이런 현상을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었다. 시리아에서는 또 다른 무장 세력이 속속 등장했다. ‘알누스라 전선’이라는 조직은 알줄라니가 만들었다. 그는 원래 IS의 시리아 담당자였다. IS가 가장 먼저 시리아에 파견한 조직원이었다. 그는 IS와 결별하고 북부 지역에서 독자 조직을 꾸렸다. 당연히 IS와 적이 되었다. IS는 배신을 가만둘 수 없었다. 2013년 말부터 시리아 북부 지역에서 양측 간 대규모 교전이 발생해 1000여 명이 사망했다. 시리아 내전은 2013년 들어 시리아에 사는 사람도 이해하지 못하는 복잡한 내전으로 변해갔다. 지금 시리아에는 많은 급진 이슬람주의 세력이 난립해 있다.

알카에다와 IS의 구역 싸움도 치열하다. 모두 이슬람 수니파로 칼리프 시대를 지향하지만 그들은 서로 다르다고 말한다. 알카에다는 어떤 이유에서건 무슬림이 무슬림을 공격하는 것은 교리에 어긋난다고 주장한다. 또 자신들은 무슬림을 공격하는 서방이나 군대, 경찰 등으로 공격 대상을 한정한다며 IS를 맹비난한다. 참수와 같은 극단 행동은 비(非)이슬람적이며 무분별하다는 것이다. 2013년 알카에다는 IS를 파문했고 IS는 기다렸다는 듯이 “알카에다가 성전(지하드)에서 이탈했다”라며 오히려 알카에다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선언했다. 그 뒤로 이 둘은 철천지원수가 되었다. 따지고 보면 그 조직이 그 조직이라서 주도권 싸움일 뿐이었다. 원조 테러 조직이 너무 잔혹하다며 상대를 비난하는 황당한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내전 양상 복잡해지자 2013년부터 난민 폭발

시리아 정부군과 자유시리아군, IS, 알누스라 전선, 알카에다 등등이 서로 싸우는 동안 민간인 사상자 수는 계속 늘었다. 누구 손에 죽을지 모르는 주민 처지에서는 난민이 되어 탈출하는 게 거의 유일한 선택이다. 2013년 시리아 난민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시리아는 북쪽으로 터키, 서쪽으로 레바논, 동쪽으로 이라크, 남쪽으로는 요르단·이스라엘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 국경은 금세 북새통이 되었다. 하루에 2000명 이상이 요르단과 시리아 국경을 넘었다. 이웃 국가가 감당하지 못하자 북아프리카 국가로도 난민이 몰렸다. 하지만 이것은 약간이나마 돈이 있는 사람들 얘기다. 국경까지 갈 차비조차 없는 주민이 비일비재했다.

하미드 씨(27)는 시리아 동부 도시 데이르에조르의 무너진 건물 사이에서 아내와 세 자녀, 노모와 함께 산다. 그는 “전기도 끊기고 물도 나오지 않지만 돈이 없어서 도망치지 못하고 견디는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초등학생인 세 아이가 학교를 다닐 수 없게 된 것이 슬프다”라고 말했다. 그는 “다에쉬(IS)가 도시를 점령하면 ‘타크비르(IS의 구호), 반정부군이 들어오면 ‘프리 시리아(자유시리아군의 구호)’를 외친다. 또 정부군이 들어오면 알아사드 만세를 외칠 것이다”라고 말했다. 지난해에 그가 휴대전화로 전송한 마지막 사진은 연료가 없어서 나무 부스러기로 불을 지피는 가족의 모습이었다. 화질도 좋지 않은 그 사진은 ‘구해달라’는 절박한 메시지였다.

기자명 김영미 국제문제 전문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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