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한의 〈반전의 시대〉(서해문집, 2016)를 읽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좋은 책은 어떤 것일까’ 하고 새삼스럽게 자문했다. 우선 떠오른 것은 새로운 질문을 낳는 책, 주류와 다른 시각을 보여주는 책, 그 시대의 절박한 문제에 응답하려 분투하는 책이라면 좋은 책이다. 나는 〈반전의 시대〉가 충분히 그런 책이라고 생각하는데, 최근에 나온 한 계간지의 서평 말고는 지난 넉 달간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근엄하기는 마찬가지인 학계와 대중은 낯선 이론(理論·異論)을 무시하거나 경계한다.

지난 호에 쓴 가라타니 고진의 〈제국의 구조〉에 대한 독후감은 〈반전의 시대〉를 소개하기 위한 도입부였다. 가라타니 고진은 개별 국가의 주권을 절대시하는 근대 세계 시스템(국가 간 체제)은 주권국가 사이에 일어나는 일상적인 갈등과 분쟁을 오히려 부추기게 된다면서, 호혜와 공생으로 이루어진 ‘세계-제국’이 다시 회복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주권국가에 경사된 서구는 ‘독립’ 아니면 ‘종속’이라는 이분법으로만 국제 관계를 재단한다. 하지만 중화 문명 속에서는 독립 아니면 종속이라는 서구의 이분법적이고 폭력적인 경계가 흐릿하다. 중화 제국(문명)은 일찌감치 칼을 버리고 붓을 들었으나, 서구 열강은 중국인이 폭죽놀이에나 썼던 화약으로 대포를 만들었다. 주권국가를 그토록 중시한 서구가 만든 게 식민주의다.반전(反轉)은 거꾸로(反) 뒤집는(轉) 것이다. 서구중심주의 사관과 서구의 근대적 가치를 전복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가라타니 고진과 이병한의 작업은 다를 게 없다. 하지만 다른 점도 많다. 일례로 가라타니 고진은 현재 동아시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중국과 미국의 패권 경쟁을 청일전쟁 시기에 있었던 지정학적 상황의 반복이라고 말한다. 오늘의 중·미 갈등은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이 충돌했던 청일전쟁의 재연이라는 것이다. 이런 충돌은 일개의 헤게모니 국가가 장기 지속할 수 없기 때문에 생기는 필연적인 결과이며, ‘세계-경제’ 시스템의 과열과 실패(공황)는 전쟁으로 귀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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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영 그림
가라타니 고진은 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벌이는 중국과 미국의 격돌을 청일전쟁에 빗대고, 한국인의 기시감은 미국이 쇠퇴하고 중국이 부상하는 세기의 전환점에 내려진 한국 정부의 사드 배치 결정으로부터 명·청(明淸) 교체기를 다시 본다. 하지만 이병한은 두 가지 비유가 소란한 수사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지금 동아시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은 “반복이라기보다는 반전에 가깝다”라고 말한다. 그는 미국의 쇠잔보다도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구적 세계 질서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 핵심이라면서, 쇠잔하는 미국과 주도권을 잃은 서구적 세계 질서를 구별하라고 말한다.

“양자를 분별하지 못하면 작금을 미·중 패권 이행기라고 오독하게 된다. 부쩍 귀에 익은 G2론도 그런 혐의가 없지 않다. 중국위협론의 재판이자 치밀한 신냉전의 기획일 수 있다. 그래서 일본은 집단적 자위권을 은근슬쩍 인정하는 해석 개헌의 꼼수를 단행했고, 한국은 군사적 주권 회수를 무기한 방기하는 전시작전권 환수 연기라는 자충수를 둔 것이다. 따라서 작금을 패권국의 교체가 아니라, 패권국이 구축했던 세계 질서의 변동기로 접수하는 시국(時局) 인식부터 합의할 필요가 있겠다. 즉 패권이 이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 체제 자체가 이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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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의 시대〉
이병한 지음서해문집 펴냄
지금 벌어지고 있는 세계사의 변환을 ‘G2’의 각축으로 틀 지울 때, 우리는 서구 문명에서 중화 문명으로의 반전이라는 거대한 세계사적 조망을 잃어버리게 된다. 중화 문명이라면 명멸했던 중국 역대 왕조나 한족(漢族)을 떠올리기 쉬운데, 우리도 소중화(小中華)라는 자부심을 갖고 중화 문명에 주체적으로 참여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한국인이 그토록 존경하는 이순신(李舜臣)이 왜 이 이순신인가? ‘순임금 신하’라는 그 이름에는 “내 민족, 내 나라만의 유아독존”이 아닌, “요순으로 상징되는 태평성세에 복무하겠다는 보편 문명에 대한 공속감”이 드러나 있다. 바로 이것이 근대 세계 시스템으로서의 국가 간 체제(inter-state-system)를 뛰어넘는 반전이다. G2론은 쇠잔하는 미국을 누르고 중국이 나 홀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도·이슬람·남미 등의 지역적 세계가 한꺼번에 분기하면서 평평한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하게 한다.

“황민교육으로 우리는 유럽인이 되었다”

이 책은 곳곳에 지뢰가 매설되어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주권국가를 절대시하는 국제정치에 관한 것이다. 지은이는 12억 인구의 인도와 2000만 인구를 가진 스리랑카, 13억 인구의 중국과 500만 인구를 가진 싱가포르가 국제연합에서 1국1표를 행사하는 것이야말로 서구식 민주주의가 국제정치를 오작동하게 만드는 구멍이라고 말한다. ‘천하에 바깥은 없다(天下無外)’라는 전 지구적인 공공성을 결여한 헤게모니 국가들의 야합은 세계 평화를 이룩하지 못한다. 이런 논리는 국제정치만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신으로 경배하는 현실 정치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이달에 나온 김용옥의 〈도올, 시진핑을 말한다〉(통나무, 2016) 92~ 119쪽이 새 시대의 정치도 민주주의도 결코 투표(선거)일 수 없다는 지은이의 주장을 보충해준다.〈제국의 구조〉와 〈반전의 시대〉를 읽은 독자들의 불만은 제국이나 문명 담론 속에 한국의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중국과 멀찍이 떨어진 ‘아주변(亞周邊)’이라는 용어로 독립적인 일본의 고유성을 확보한 반면, 그런 거리가 불가능한 한국의 재야 사학자들과 ‘환빠’는 그 방향을 돌려 중국 대륙 깊숙이에 고조선(古朝鮮)을 세웠다. 이런 증상은 일본과 한국의 유럽화와 관련된다. 소설가 이병주가 1971년에 쓴 이탈리아 여행기 〈잃어버린 시간을 위한 문학 기행〉(바이북스, 2012)에 이런 말이 있다.

“일본인은 황민교육(皇民敎育)을 시키고 있다면서 기실 유럽인을 만들고 있었다. 우리가 일본인의 황민교육에 반발하게 된 것은 물론 한국인으로서의 민족의식 탓이겠지만 그 근본엔 유럽화된 의식이 있었다. 민족의 의식도 우리는 유럽적인 관념을 통해 스스로 납득하고 표현한다. 대학에 들어가서 학문적인 모든 이상이 유럽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유럽적인 검증(檢證)에 합격해야만 진리(眞理)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결국 근대화란 유럽화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나는 관념상으론 유럽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유럽인이 되고 나서야 동양에의 회귀를 생각하게 되었다. 유럽에선 찾을 수 없는 보물이 동양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중국이 아편전쟁에서 패하고 조선이 망한 이후, 우리는 중화 문명을 송두리째 내다버렸다.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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