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11월8일 대선을 겨우 10주 앞두고, 미국 역사상 이례적으로 인종차별 문제가 민주·공화 양당 대선 후보 간의 핵심 이슈로 떠오르면서 선거판이 요동치고 있다. 현재 지지율에서 앞선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 후보는 상대인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를 ‘오랜 인종차별 전력을 지닌 인물’이라며 맹공을 퍼붓고 있다. 이에 맞서 트럼프는 흑인과 히스패닉 등 소수 인종들로부터 높은 인기를 누리는 클린턴에게 “유색 인종을 득표 차원에서만 본다”라고 반격한다. 인종차별 문제는, 지난해 6월 대선전에 뛰어든 트럼프가 멕시코 불법 이민자들을 비하한 이후 물밑에서 부글거려왔다.

역사적으로 미국 대선에서 인종차별 문제가 핵심 의제로 떠오른 적은 없었다. 재선을 노리던 민주당 버락 오바마 후보와 공화당 밋 롬니 후보가 맞붙은 2012년 대선의 핵심 의제는 일자리 문제였다. 여론조사 지표상으로만 보면 올해 대선도 마찬가지다. 저명한 여론조사 기관 퓨리서치센터의 지난 7월 조사에 따르면, 최우선 이슈는 경제 문제였고 테러, 외교, 건강보험 등이 그 뒤를 이었다. 미국 사회의 영원한 숙제인 인종 갈등은 대선 의제에 끼지 못했다.

그런데도 대선을 코앞에 두고 인종 문제가 트럼프와 클린턴 캠프 사이 이슈로 떠오른 까닭은 무엇일까? 먼저 인종 문제의 불씨를 댕긴 쪽은 힐러리 클린턴 후보다. 클린턴은 8월25일 네바다 주 유세 연설에서 트럼프에게 인종차별주의자라는 공격을 퍼부었다. 클린턴은 “트럼프는 처음부터 인종 편견과 편집증으로 가득한 유세를 펼쳤다”라면서 조목조목 트럼프의 인종차별적 행태를 나열했다. 2800자 이상인 연설문 곳곳이 트럼프 관련 인종차별 논란들이다. 베일에 가려 있던 트럼프의 과거 인종차별 행태도 포함되어 있다. 예컨대 부동산 사업가인 트럼프는 흑인이나 히스패닉 세입자와의 아파트 계약을 거부했다가 소송을 당한 바 있다. 그가 운영하던 카지노 업체는 흑인 딜러를 반복적으로 쫓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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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P지난 8월25일 네바다 주 르노에서 선거 유세를 벌이는 힐러리 클린턴 후보. 클린턴도 트럼프로부터 ‘인종차별주의자’라는 공격을 받았다.
물론 클린턴은 트럼프의 대선 유세 중에 불거진 인종차별 ‘막말’도 빼놓지 않고 열거했다. 트럼프는 멕시코 불법 이민자들을 가리켜 ‘강간범이자 범죄자’라고 발언한 바 있다. 무슬림의 미국 입국을 저지하고, 미국과 멕시코 국경지대에 장벽을 설치하겠다고 공약했다. 이 덕분에 백인우월주의 집단인 ‘KKK’의 전 지도자 데이비드 듀크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심지어 트럼프 캠프의 고위 간부 중 한 명은 백인우월주의 집단 ‘알트라이트(alt-right:대안 우파)’의 핵심 조직원이다.

백인우월주의 단체 인사가 트럼프의 선거 책임자

트럼프도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그는 “클린턴이 거짓말과 중상 비방을 하며 점잖은 미국인들을 인종주의자로 취급하고 있다. 더 나은 미래를 원하는 유권자들을 협박하는 행위다”라고 맹비난했다. CNN 시사 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는 클린턴을 가리켜 “아주 사악하고 편협하다”라며 공격했다. 트럼프 쪽은 힐러리 클린턴이 퍼스트레이디 시절이던 1996년, 흑인 범죄자들을 가리켜 “최악의 약탈자들”이라고 부른 동영상을 공개하기도 했다. 트럼프 자신은 트위터를 통해 “부정직한 클린턴이 흑인 청년들을 ‘최악의 약탈자들’이라고 부른 사실을 어찌 그리 빨리 잊을 수 있는가?”라며 오히려 클린턴을 인종차별주의자로 몰아붙이기도 했다.

연방 상원의원과 국무장관을 거친 정치 베테랑 클린턴이 하필 이 시기에 민감한 인종차별 문제를 꺼내든 까닭은 무엇일까?

정치 분석가들의 관측은 대강 두 가지다. 하나는, 트럼프가 흑인과 히스패닉 등 소수 인종 유권자들을 향해 최근 보여온 적극적 화해 행보를 조기에 차단하려는 전략이라는 것이다. 퀴니팩 대학의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클린턴은 비백인 유권자들의 지지율에서 ‘77% 대 15%’로 트럼프를 압도하고 있다. 퓨리서치센터의 최근 자료에 따르면, 올 대선의 유권자 중 비백인 소수 인종(히스패닉·흑인·아시아인)이 30%에 달한다. 지난 4년 동안 유권자 증가 추세를 봐도, 백인 인구는 고작 2% 늘었지만, 히스패닉 인구는 무려 17%나 증가했다. 흑인과 아시아계도 각각 6%, 16% 증가했다. 비백인 소수계 유권자들을 잡지 못하면 올 대선에서 결코 승리할 수 없다는 징표이기도 하다. 이런 사정을 뒤늦게 파악한 트럼프가 소수계 유권자들에 대한 적극적 구애활동에 들어가자, 클린턴이 ‘트럼프=인종차별주의자’라는 프레임으로 반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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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uters미국 공화당 트럼프 대선 캠프의 최고 책임자인 스티브 배넌.
클린턴의 또 다른 전략은 트럼프를 백인우월주의 집단과 한통속으로 묶어 그 위험성을 한껏 드러내겠다는 심산인 듯하다. 실제 클린턴은 이번 연설에서 트럼프를 극단적 백인우월주의를 표방한 알트라이트와 연계시켰다. 알트라이트는 백인우월주의, 다문화주의 반대, 무슬림 반대, 반여성, 반이민주의 등을 표방하는 극우 집단이다. 백인 민족주의 싱크탱크인 국가정책연구소의 리처드 스펜서 소장이 알트라이트의 이데올로그다. 트럼프는 알트라이트의 핵심 인사로 꼽혀온 스티브 배넌 대표를 최근 자신의 선거 책임자로 임명한 바 있다. 배넌은 2007년 창간된 우익 정치 웹사이트 〈브레이트바트 뉴스〉의 대표를 지냈다. 자신의 매체를 ‘알트라이트를 위한 광장’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클린턴은 트럼프가 배넌을 선거캠프 사령탑에 앉힌 것을 두고 “알트라이트가 사실상 공화당을 접수하는, 기념비적 성취를 이룬 것이다”라고 비판했다.

트럼프 쪽도 이 같은 클린턴의 선거 전략을 모를 리 없다. 트럼프 캠프는 클린턴의 인종차별 공세를 두 가지 맥락에서 파악한다. 하나는트럼프의 소수 인종 공략 전략에 찬물을 끼얹겠다는 의도로 본다. 다른 하나는, ‘클린턴 가족 재단’의 비위 의혹으로 곤궁에 빠진 클린턴이 대중의 관심을 자극적인 인종차별 이슈로 돌리려 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과거 국무장관 시절에 ‘클린턴 가족 재단’ 기부자들을 접견하고 특혜까지 제공했다는 의혹에 휩싸여 있다.

그렇다면 점차 거세지는 양측의 인종 공방은 누구에게 더 득이 될까? 현 단계에서 예단할 수 없지만 주목할 만한 여론조사가 있다. 시카고 대학 부설 ‘흑인청년 프로젝트’가 18~30세 젊은 유권자들을 상대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다. 이 나이대는 부동층 비중이 가장 크다. ‘대선 후보 중 누가 인종차별주의자인가?’라는 질문에 흑인과 아시아계는 거의 80%, 히스패닉계는 약 82%가 트럼프를 지목했다. 백인조차 약 60%가 트럼프를 ‘인종차별주의자’라고 응답했다. 반면 클린턴을 지목한 비율은 소수계와 백인 모두 20% 미만이었다. 인종차별 문제에 관한 한 트럼프가 소수계 표심 확보를 위해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클린턴을 누를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는 뜻이다. 이런 측면에서, 트럼프를 ‘인종차별주의자’라는 프레임에 가두는 클린턴의 공세는 앞으로도 한동안 상당한 효과를 거두리라 보인다.

기자명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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