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은행 태스크포스 회의를 가보면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금융권은 물론 비금융권에서 다양한 직급·직책의 임원과 실무자들이 배석한다. 그런데 그 누구도 결정권이 없다. 또 회의를 주도하려 하지도 않는다. 회의는 공전에 공전을 거듭한다. 현실적인 해결책을 논하는 대신 공허한 원칙만 반복한다. 그런 와중에 서로가 가진 데이터를 탐하는 눈빛만은 이글거린다. 금융권과 비금융권이 만나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핵심은 결국 데이터다.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핀테크 서비스의 성공 여부는 데이터 확보다. 대출금의 부도 리스크를 낮추고 더 싼 금리로 더 많은 사람에게 자금을 융통해주는 대안적인 신용평가 모델을 구축하려면 데이터 확보가 필수다. 이때 활용되는 데이터로는 SNS에 올린 텍스트나 로그 데이터, 휴대전화 결제 데이터, 휴대전화나 웹브라우저 상에서 방문한 사이트나 애플리케이션 이용 현황을 담은 로그 데이터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국내 현행법상 데이터 확보가 쉽지 않다. 개인정보, 금융정보, 신용정보를 서로 결합해 분석하기 위해서는 거쳐야 하는 절차가 매우 까다롭고 복잡하다. 그래서 법인들 사이의 결합 데이터 분석이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 이용자들에게 하나하나 제3자 이용 동의를 받는 것도 문제지만, 데이터 이용 목적과 활용 방안에 대해서도 매우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명기하지 않으면 데이터 이용 자체가 불법이다. 데이터 기반의 창의적인 가설 설정과 실험이 불가능한 이유다. 결국 데이터 분석에 대한 논의는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 음지로 숨어들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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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테크지원센터 제공지난 8월30일 임종룡 금융위원장(가운데)이 ‘핀테크 지원센터 제10차 데모데이’ 행사를 둘러보고 있다.
국내 핀테크 스타트업과 관련해 또 하나 재미있는 현상은 대표들 중에 대부업자가 많다는 점이다. 현행법 때문이다. P2P 금융 서비스를 운영하려면 대표이사 외 1인 이상이 대부업 교육을 받고 대부업체 혹은 대부 중개업체를 설립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 서비스를 운영하다가 방통위에 의해 서비스가 차단당했던 P2P 업체 ‘8퍼센트’의 사례는 꽤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그러다 보니 요즘 대부업 교육 현장에 가면 주름이 선연한 중년이 절반, 홍안의 젊은이가 절반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핀테크 스타트업 창업자들은 사업성을 검증하며 생존하기에 앞서 고객들이 가지고 있는 대부업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부터 뛰어넘어야 한다. 회사명에 반드시 대부나 대부중개를 넣어야 하는 이들로서는 고정관념을 깨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고객들은 혁신적인 핀테크 서비스라 하더라도 혹시 신종 고리대금업이 아닌가 하는 의심부터 품는다. 또 대부업 하면 수금 가방과 금 목걸이를 차고 껌을 씹는 ‘깍두기 머리’ 스타일을 먼저 떠올리기 때문이다.

데이터 확보가 쉽지 않은 법 조항이나, 대부 중개업체를 설립해야 하는 조항 등 스타트업계의 발목을 잡는 규제는 숱하다. 또 다른 예를 들면, 로봇이 금융자산 포트폴리오를 자동으로 조정하며 투자해주는 로봇PB 서비스인 ‘로보어드바이저’가 세계적으로 각광받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로보어드바이저를 정상적으로 운영하려면 자본금 최소 요건 15억원인 투자일임업 허가를 받아야 한다. 초기 스타트업에게는 어림없는 금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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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신선영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인근 지하도 계단에 붙은 중국 핀테크 업체 알리페이의 광고.
문제 제기가 잇따르자 금융 당국은 로보어드바이저 테스트베드(시험공간)를 설치하고, 이번 달부터 본격 운영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로보어드바이저를 운영하려면 반드시 대면으로 운영해야 한다는 제약조건이 붙었다. 온라인 비대면 운영을 기본으로 하는 로보어드바이저의 기본 개념과 너무도 배치되는 결정이었다. 로봇과 얼굴을 마주하고 거래하라는 꼴이다.

“앞으로 은행이 꼭 필요하지 않은 시대가 온다”

물론 제도 개선에 대한 정부 당국의 의지는 거의 모든 핀테크 스타트업 관계자들이 공감한다. 굵직굵직한 규제들을 철폐하거나 한시적으로 유예하고, 유권해석을 유연하게 풀어준 것만 해도 수십 건이다. 예를 들면 금융위원회는 2015년부터 보안성 심의 폐지, 크라우드 펀딩을 위한 자본시장법 개정, 비대면 본인 인증 방식 확대 허용, 은행 및 보험권의 공인인증서 의무 사용 폐지, 외국환거래법 개정 등 오래된 ‘박힌 돌’을 빼냈다.

하지만 조금만 들어가 보면 총체적 난맥상이 펼쳐진다. 금융위원회가 규제를 열심히 풀었다고 해도 행정자치부 규제가 발목을 잡고, 미래부가 가로막으며, 미래부를 통과하면 방송통신위원회에 걸리고, 중소기업청을 거쳐야 한다. 무엇보다 기존 금융권이 얼마나 강한 의지를 가지고 핀테크 사업을 키우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한 시중은행의 핀테크 애플리케이션 서비스는 준비한 지 5년이 넘어서야 출시되었다. 보수적인 내부 조직문화가 출시 자체를 막은 것이다. 외부에서 핀테크 열풍이 불자, 그제야 출시했다. 출시 후에는 은행원들에게 다운로드 실적을 강제하는 아날로그식 실적 올리기를 벌이기도 했다.

“앞으로 은행이 꼭 필요하지 않은 시대가 온다”라는 빌 게이츠의 예언처럼 중국의 알리페이, 영국의 트랜스퍼와이즈, 미국의 랜딩클럽 등 해외에서는 혁신적인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국내 핀테크를 활성화할 대안은 없을까? 그동안 만들어진 규제들을 정부가 풀기만을 기다려야 할까? 스타트업 관계자들은 고개를 젓는다. 현실과 동떨어진 규제가 너무나 많고, 정치적 역학관계나 정부 부처 간 이해관계 탓에 규제를 풀려면 십수 년이 걸릴지도 모른다고 업계에서는 본다.

그래서 ‘핀테크 FTA(Free Trial Area)’를 만들자고 주장하는 핀테크 스타트업 관계자이 적지 않다. 수원이나 판교, 인천 등 수도권 근교의 특정 지역 혹은 제주도에 한해 현행법상 혁신을 가로막을 수 있는 규제들이 아예 적용되지 않는, 일종의 ‘소도’를 만들어달라는 것이다. 여기서 시도되는 혁신적 서비스들의 결과에 따라 법제를 순차적으로 바꿔나가는 식이다.

알려졌다시피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IT와 스타트업을 적극 지원했다. 창업 및 IT 혁신에서 한국은 꽤 앞서갔다. 이명박 정부에 이어 특히 ‘창조경제’를 내건 박근혜 정부 들어 창업이나 IT 관련 스타트업 경쟁력이 뒤처진다는 신호가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정부가 선의나 의지만 공언하지 말고, 더 늦기 전에 ‘핀테크 FTA’와 같은 과감한 시도를 해야 한다.

기자명 이종대 (데이터블 대표)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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