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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월간지 형태의 콘텐츠 만드는 일을 꽤 오래 했다. 그리고 지금은 모든 종이 매체의 관리자들과 마찬가지로 디지털 미디어와 디지털 콘텐츠라는 난해한 숙제를 막 펼친 참이다.

모르긴 해도 역사상 모든 세대가 자신들이 ‘애매하게 낀 세대’ 혹은 ‘격동의 과도기’ ‘의 마지막 세대’라며 종종 장탄식하지 않았을까? 60대인 엄마는 “우리가 시부모를 모시고 산 마지막 세대”라 말하고, 외환위기 직후 취업을 해야 했던 대학 선배는 “우리 학번이 버블경제의 과도기에서 가장 불행한 세대”라며 억울해했다. 나는 요즘 부쩍 내가 ‘아날로그 시대에 태어나 디지털을 생산해야 하는 마지막 세대’가 아닐까 싶다. 물론 한 10년 뒤 ‘아, 그때 왜 그런 말을 썼지…’ 하며 후회할 수도 있을 것이다(엄마와 선배는 그랬다).

10년이 훌쩍 넘게 종합지 형태의 정기간행물을 만들다 보니, 매일 ‘필요한 표현’과 ‘쓸 수 있는 표현’과 ‘대중적인 재미’를 아슬아슬하게 저글링하는 기분이 들곤 한다. 특히 실시간으로 조회 수가 오르는 온라인 콘텐츠의 경우, ‘필요한 표현’과 ‘쓸 수 있는 표현’ 사이에서 삐끗하는 순간 걷잡을 수 없는 파장에 휘말리게 된다. 적지 않은 경우, 그 표현이 ‘실제로 적절한가 아닌가’보다는 ‘보는 이의 기분이나 취향에 맞는가 아닌가’가 더 중요한 이유로 작용하는 듯했다.

결국 표현(방식)의 문제다. 표현은 정말 중요하면서도 중요하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무엇보다 중요할지 모른다. 얼마 전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의 미셸 오바마 연설에서 내게 가장 인상적인 단어는 ‘블랙(black)’이었다. “저는 매일 아침 노예들이 지은 집에서 눈을 뜹니다”에서 ‘노예’라는 단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자신의 두 딸(“아름답고 지적인 젊은 흑인 여성”)을 ‘아프리카계 미국인’ 대신 ‘흑인’이라 불렀다는 인상을 받았다. 나는 그날의 연설이 듣는 이의 마음을 힘 있게 움직이는 매우 우아한 언어라고 느꼈다. 하지만 ‘정의로운 보수’를 자처하는 이들 중 일부는 “굳이 노예나 흑인이라는 표현을 쓸 이유가 없었다. 너무나 노골적으로 선동적인 연설이었다”라며 공개적으로 불쾌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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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그림

표현은 정말 중요하면서도 중요하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데 왜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보느냐”라고 지적할 수도, “달을 굳이 중지로 가리키는데 그 손가락을 안 볼 수가 있느냐”라고 되물을 수도, “아무리 말해도 달을 보려 하지 않으니 중지라도 써야 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달을 보긴 했잖느냐”라고 반박할 수도, “중지로 가리키는 바람에 달을 봤지만 기분만 상했다”라고 불평할 수도 있다. 뭐가 옳은지는 상황마다 다를 것이고, 대부분은 똑 부러진 정답이 없을 것이다. 무엇이든 실시간으로 공개되고 폭발적으로 확산되는 디지털 시대에는, 똑 부러진 정답을 찾느라 여유롭게 소비할 시간이 애초에 없는 것 같기도 하다. 그냥 누군가는 표현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거기에 반응한다. 그렇다는 게 시행착오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린 후 내린 중간 결론이다.

우리는 어떤 표현에 웃고 울고 감동받고 각성하는가

그렇다면 표현이 정말 중요할까? 그렇다. 다만 앞으로 세상에서는 표현하는 능력만큼이나 표현을 해석하고 반응하는 능력이 중요해질 것이다. 성별, 직업, 나이, 출신 학교나 학력, 인종, 국적보다는 우리가 어떤 표현에 웃고 울고 감동받고 각성하는가가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해줄 것이다. 얼마 전 화제가 되었던 〈시사IN〉 기사를 읽고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같은 표현’이 아니라 ‘같은 이해’가 ‘당신들’과 ‘우리’를 나누는 기준이 된다면, 나는 내 기분과 취향에 맞춘 표현을 하는 이들보다는 세상의 온갖 차별과 부당함에 자세히 관심을 갖고 그 균형점을 찾으려 고민하는 이들과 나란히 서고 싶다. 그들의 표현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은 내 몫이다. ●

기자명 신윤영 (〈싱글즈〉 ‘디지털 스튜디오’ 팀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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