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럼에 영화 〈터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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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검열이었다. MBC 라디오에서 〈푸른 밤 종현입니다〉를 녹음할 때였다. 3년 넘게 ‘미드나잇 스포일러’라는 코너에서 영화를 소개하고 있다. 이번 영화는 〈터널〉이었다. 한참 줄거리를 소개하다가 잠시 머뭇거렸다. 정말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런데 〈터널〉은 세월호를 연상시키는 구석이 있습니다.” 〈터널〉과 세월호의 유사성을 말하면서 소심해진 건 오직 자기 검열 때문이었다. 이렇게 말해도 되나 싶었다. 이렇게 말하지 않는 게 속 편한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세월호는 자기 검열을 하게 되는, 무의식적인 금기어가 되어 있었다.

〈터널〉은 한국 관객이라면 세월호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영화다. 평범한 자동차 영업사원인 정수는 개통된 지 한 달 남짓한 하도터널을 차를 몰고 지나가다가 붕괴 사고로 매몰된다. 기름을 넣고 받은 생수 두 병과 딸의 생일 케이크가 식량의 전부다. 그나마 휴대전화 덕분에 외부와 교신은 가능하다. 정수도 처음에는 구조대가 자신을 구하러 와줄 거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가만히 있었다.

〈터널〉이 세월호 영화로 본격화되는 건 최초 구조 작업이 실패하면서부터다. 정수의 구조 작업이 장기화되면서 모두가 지쳐간다. 정수를 구조하느라 중단됐던 인근 제2 하도터널 공사를 둘러싸고 여론이 양분된다. 정수의 생존 가능성이 낮아지면서 공사를 재개해야 한다는 여론이 우세해진다. 세월호 실종자 수색 작업이 장기화되면서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국가 경제를 핑계대면서 세월호를 지워버리려고 애썼던 것처럼 말이다. 공무원은 정수의 아내를 만나서 이렇게 말한다. “국민들이 이제 그만하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터널〉은 세월호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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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그림

방송에서 “〈터널〉은 세월호 영화다”라고 쉽게 말하지 못했던 이유가 또 있다. 제작보고회 자리였다. “〈터널〉이 세월호를 풍자한 것이냐”라는 기자들의 질문이 나왔다. 정작 영화를 연출한 김성훈 감독은 “의도하지 않았다”라고 대답했다. 주연배우 하정우도 마찬가지였다. JTBC 〈뉴스룸〉에 출연한 하정우씨는 “생명의 소중함을 다룬 영화고 그런 점에서는 세월호 사건과 맥락을 같이한다고 볼 수도 있다”라고 답했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총선 때 얘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박주민 의원은 세월호 변호사로 유명하다. 박 의원은 유세 때 세월호 얘기는 절대 해서는 안 된다는 정치적 조언을 수없이 들었다. 표를 갉아먹는다는 논리였다. 박주민 의원의 유세장에서는 세월호 유가족들이 선거운동을 했다. 인형 탈을 썼다. 선거에 피해를 줄까 봐 스스로 신분을 감췄다. 한국 사회에서 세월호는 인도적인 문제가 아니다. 당파적인 문제다. 이해관계의 문제다. 재난의 정치화다.

세월호 변호사에게 세월호 얘기를 절대 하지 말라고 충고하는 세상

대중과 소통해야 하는 정치인도, 영화인도, 심지어 언론인도 세월호의 정치화에서 자유로울 순 없다. 세월호가 표가 되는지 세월호가 돈이 되는지 세월호가 듣고 싶은지 고심할 수밖에 없단 말이다. 그래선 안 되는 문제인데도 말이다. 〈터널〉도 예외가 아니었다. 예고편이 나왔을 때부터 〈터널〉이 세월호를 연상케 하는 좌파 영화라고 단정 지으며 보지 않겠다는 게시글들이 올라왔다.

재난 자체는 사회를 단합시킨다. 위기 상황 앞에서 모두가 힘을 합친다. 하지만 재난의 정치화는 공동체를 찢어놓는다. 재난에 대한 견해 차이가 우리를 갈라놓는다. 재난을 두고 이해관계가 갈린다. 그렇게 재난의 정치화는 공동체를 타락시킨다. 피해자가 죄인이 되고 책임자가 가해자가 되고 감시자가 방관자가 되고 참여자가 구경꾼이 되는 공동체의 퇴행 현상이 빚어진다. 〈터널〉의 내용은 2014년 세월호 현장을 직유했다. 〈터널〉을 둘러싼 상황은 2016년 세월호 상황을 은유한다. 시대의 자화상이다.

기자명 신기주 (〈에스콰이어〉 기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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