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강동원이 아니었다면 그날 밤이 될 때까지 까맣게 몰랐을 거다. 지난 1월, 연극 〈날 보러 와요〉 20주년 기념 공연은 그 상징성 때문인지 연예인 관객이 많았다. 이희주씨(24) 역시 그들을 지켜보며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강동원이 나타났다. “사람 얼굴이 정말 말도 안 되게 작고 막 빛이 나는데 그 뒤로 사람들이 졸졸 쫓아오더라고요. 마치 ‘피리 부는 사나이’ 같았달까.”

강동원 팬인 친구가 떠올랐다. 잦은 고장 탓에 꺼두었던 핸드폰을 부랴부랴 꺼내 켰다가 깜짝 놀랐다. 엄마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여러 통 와 있었다. 엄마는 전화를 그렇게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집에 무슨 일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의 말을 들었다. “희주야, 너 당선됐단다.”

문학동네 대학소설상 수상은 생각지도 못했던 소식이었다. 소설을 쓴 것도 자신이고, 응모를 한 것도 자기였지만 당선은 한 번도 자기 것으로 생각해본 적 없었다. 당선 소식을 들은 지 7개월 만에 이씨가 쓴 글이 책의 꼴을 갖춰 세상에 나왔다. 〈환상통〉은 이씨의 데뷔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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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윤무영
언젠가는 글 쓰는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읽는 걸 좋아했으니까 쓰는 것도 자연스럽게 여겼다. 국문과에 진학했지만 대학 생활이 썩 재미있지는 않았다. ‘돈 되지 않는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은 몇 없었다. 동기들은 각종 자격증과 영어 점수 따기에 골몰하며 열심히 미래를 도모했다.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휴학을 반복하게 되었고, 그동안 이씨는 주로 시를 썼다.

집에 있지 않은 시간 대부분은 방송국과 방송국 주변 카페에서 보냈다. 보통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월요일을 제외한 모든 요일에 음악방송이 하나씩은 있었다. 다섯 살, 벽지 위에 ‘강타 오빠 사랑해요’라고 썼던 그때부터 이씨는 늘 누군가의 팬이었다. 아이돌은 쫓아다니는 게 아니었다. 아이돌을 좋아하는 건 기다림의 다른 이름이었다. 서울 등촌동과 여의도동과 상암동을 오가며 서울의 지리를 익혔다. 이씨는 고등학교 2학년 9월에 치른 모의고사를 엄마의 얼굴로 기억한다. 엄마가 진지한 얼굴로 이제 ‘그런 거’ 안 할 때 되지 않았느냐고 말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아무리 기다려도 ‘안 할 때’는 오지 않았다.

컴퓨터를 켜고 텅 빈 화면 위 깜빡이는 커서 앞에 처음 앉았던 날을 떠올려보면 지금도 놀랍다. 처음부터 소설을 써야겠다고 작정한 건 아니다. 새로운 아이돌 그룹에 ‘덕통사고’(아이돌과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을 교통사고에 비유한 말)를 당한 후 어지럽게 요동치는 자신의 감정을 글 쓰는 일로 정돈하고 싶었다. ‘나의 계속되는 팬질’을 이해하고 싶어서 시작한 일이었다.

“만옥과 처음 만난 것은 SBS 등촌동 사옥 앞 도로변에서였다.” 가상의 인물을 내세워 홀린 듯 첫 문장을 썼을 때 이 글이 소설이 되겠구나 직감했다. 원고를 마무리 지을 때까지도 분량이 어느 정도 될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쏟아내듯 썼다. 처음 써본 장편소설을 완성하는 데 한 달 남짓밖에 걸리지 않았다. “빠순이로 살다 보면 정말 써야 할 게 너무 많거든요. 대다수가 여성이고, 나이도 어리고….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불가촉천민 취급을 받아요.”

〈환상통〉은 아이돌 팬덤을 본격적으로 다룬 첫 장편소설이다. 소설은 3부로 이뤄져 있다. ‘사랑을 어떻게든 기록으로 남기려는 사람’ M과 ‘기록보다는 실재를 목격하려는 사람’ 만옥, 그리고 그런 만옥을 사랑하는 한 남자의 시선으로 각각 쓰였다. 이희주씨는 M에 가깝다. “복잡한 세상에서 한 아이돌 그룹의 한철과 그 시절 팬의 일상은 아무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서 더 기록해야 한다(141쪽)”라고 생각한다. 아마 앞으로도 공적 영역에서는 다뤄지지 않을 어떤 역사가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려 이렇게 존재를 드러냈다.

아이돌 팬덤이라는 주제는 문학동네 대학소설상 심사위원들에게도 일종의 ‘허들’이었다. 심사를 맡은 강지희 문학평론가는 〈환상통〉에 대해 “아이돌을 향한 사랑은 역사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사건이 거의 말소된 세대의 새로운 집단 경험임을 짚어두고 싶다”라고 평했다. 정한아 소설가 역시 심사평에서 다소간의 거리감을 갖고 읽기 시작했다고 고백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마음이 무너져내렸다고 말한다. 소설 속 만옥이 아이돌 민규를 볼 때마다 내뱉는 “씨X, 죽어도 좋아”라는 문장이 자신을 칼처럼 헤집은 이후 소설에 질질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며 광기의 매혹을 이야기한다. 광기야말로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 본질이라는 의미다.

소설 속 만옥은 자신의 사랑이 병이라는 걸 아는 사람이다. 돈을 많이 벌어 부엌이 분리된 집으로 이사하고 싶고, 더 더워지기 전에 샌들을 사고 싶고, 커피를 고를 때 500원 차이로 망설이고 싶지 않고, 늘어난 속옷도 싫다. 더 이상 발을 들이면 모든 게 엉망이 될 게 뻔했지만 그걸 알면서도 만옥은 계속 아이돌 민규를 보러 간다. 계속해서 보는 것 외엔, 그렇게 자신의 무력함을 확인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만옥은 말한다. “방송국 앞에서, 사람들이 경멸에 찬 눈으로 보거나 욕을 하고 지나갈 때마다 나는 생각합니다. 당신은 평생 이 정도로 사랑하는 감정을 알지 못할 거야,라구요.”(11쪽)

M의 기록도 만옥의 무력감과 맞닿아 있다. ‘아름답다’ ‘멋지다’ ‘사랑스럽다’로 채워진 일기는 날짜를 구분하는 일이 무의미하다. 민규의 사진마다 붙인 아름다워1, 아름다워2, 아름다워3…의 나열로 이어지는 파일명은 그 표현의 빈약함에도 불구하고 기이하게도 M에게만은 각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M은 아이돌을 기록하며 자신을 이해하고자 했다. M이 민규를 위해 새로이 써내려간 사전은 그 결과물이다. 그 사전 안에서 목숨은 ‘나는 그것이 아까워서 마구 내던지고 싶다’가 되고, 병은 ‘너를 만나고 지속되고 있는 나의 상태’이며, 자본주의는 ‘너와의 만남을 가능하게 했고 불가능하게도 함’으로 정의된다.

한국 소설에 존재를 드러낸 ‘빠순이’

이씨는 이 소설을 ‘사랑’에 관한 소설이라고 두루뭉술하게 포장하지 않는다. 꼭 집어 ‘팬의 사랑’이라고, 그 점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두려움도 있다. “누구에게나 ‘미친 감정’이라는 건 다 있잖아요. 그 감정을 현실에서는 쉽게 행동에 옮길 수 없지만 소설 속에서는 자유로울 수 있거든요. 한편으로는 현실에서 팬을 낮잡아보는 시선이 있기 때문에 제가 쓴 소설의 인물이 팬에 대한 편견을 강화시키는 부분이 있지는 않을까 걱정도 돼요.”

졸업을 한 학기 앞둔 요즘, 이씨는 〈쇼코의 미소〉(문학동네)를 펴낸 최은영 작가의 말에 기대곤 한다. “최은영 작가가 존재만으로 멸시받고 천대받는 사람들을 위한 글을 쓰고 싶다고 말하는 인터뷰를 읽었어요. 저 역시 꼭 그 마음이에요. 제가 앞으로 쓸 소설에서도 그런 인물들이 중요한 일을 할 수 있도록 구상하고 있습니다.”

소설 쓰기와 취업 준비 외에도 음악 프로그램 공개방송 대기 명단에 들기 위해 줄 서는 일은 아마 오래도록 계속될 것 같다.

기자명 장일호 기자 다른기사 보기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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