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때 감옥에 갔다.

강위원씨는 전라남도 영광군에서 광주광역시 서석고로 전학 온 ‘유학생’이었다. 가난한 자취생에게 힘이 되어준 선생님들이 전교조 결성을 이유로 해직되었다. 성직자가 꿈이었던 고교생의 진로가 바뀌었다. 자기표현으로 ‘어용’ 학생회장이었던 그는 광주 지역 학생회장들의 연합 모임에 갔다가 얼떨결에 광고협(광주지역고등학생대표자협의회) 의장으로 뽑혔다. 전교조 해직에 반대하는 고교생 집회를 주도했다. 전남대에 광주 지역 49개 고등학교 학생 1만5000명이 모였다. 1989년 그해의 시위 때문에 구속되었다.

대학생 때 또 감옥에 갔다.

고교 시절의 퇴학과 구속. 집안 어른들은 광주로 유학 가 구속된 그를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서울로 향했다. 식당에서 배달 일을 하고 청계천 시장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1994년 뒤늦게 전남대 국문과에 입학했다. 다시는 데모를 하지 않으리라. 그러나 결심은 오래가지 못했다. 학생운동에 나섰고, 1997년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한총련 5기 의장 강위원. 그가 활동하던 시기에 한총련이 처음으로 ‘이적단체’로 규정되었고, 그는 1997년 7월에 구속되었다. 검찰은 국가보안법 위반 등 혐의로 징역 15년을 구형했다. 대법원에서 5년형이 확정되었다. 나중에 국민의 정부 때 10개월 감형돼 4년2개월을 감옥에서 지냈다. 2001년 7월에 출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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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신선영강위원 전 더불어락 광산구 노인복지관장은 학생운동으로 인한 두 번의 옥살이 과정에서 ‘내가 살면서 언제 뿌듯했나’ 되뇌었다. 장애인 단체 봉사활동 당시를 떠올리며 복지 운동 쪽으로 활동 방향을 바꾸었다.
15년이 지난 지금 강위원씨(45)는 사회복지 활동가로 일하고 있다. 광주광역시 광산구에 있는 ‘투게더광산 나눔문화재단’ 상임이사를 맡고 있다. 올해 1월까지는 광주 더불어락(樂) 광산구 노인복지관장으로 5년 동안 일했다. 지금은 한 해 강연을 100회 이상 할 정도로 사회복지·노인복지계의 ‘스타’로 자리 잡았다. 한총련 의장에서 노인복지·사회복지·사회적 경제 전도사로 활동을 이어온 그를 더불어락 광산구 노인복지관에서 만났다.


어떻게 노인복지관장을 맡게 되었나?

2007년 전남 영광군 묘량면 운당마을에서 농촌복지공동체 ‘여민동락’을 시작했다.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 도시형 공동체는 어떻게 가능할까 싶어서 광주 지역을 둘러보았다. 그때 민형배 광산구청장을 만났다. 노인복지관 운영을 제안했다. 이 지역이 도농복합지역이고 광주의 변두리인데 주변에 공원도 있고 해서 주민들의 커뮤니티 센터 구실을 해볼 만하겠다 싶었다.

5년 동안 이 노인복지관에 큰 변화가 있었다고 들었다. 처음 왔을 때는 어땠나?

2011년 2월 관장으로 부임했다. 관장으로 정식 임명되기 20일 전에 와서 복지관을 왔다 갔다 했다. 직원들에게 관장 될 사람이라고 절대 말하지 말라고 했다. 화장실을 청소하고 이곳저곳 기웃거렸다. 스님같이 생긴 사람이 들락거리니 어르신들이 “어서(어디서) 왔소?” 묻기에 “구경 왔다”고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노인복지관 경험이 처음이니까 나도 노인들의 일상을 관찰해보았다.

관찰해보니 어떻던가?

일반인들은 흔히 노인복지관이 조용할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 노인복지관에서 어르신들이 엄청나게 싸운다. 정말 어르신들이 야수처럼 변해 있더라(웃음). 오죽하면 내가 ‘학교폭력보다 무서운 게 노인복지관의 노인 폭력’이라고 했을까(웃음). 예를 들어 노인복지관에는 ‘황금시간대’라는 게 있다. 점심시간 앞뒤 프로그램 시간대다. 프로그램 앞뒤로 점심시간이 있으면 밥 먹고 활동하기가 좋으니까 자기가 신청한 프로그램이 그 시간대가 아니면 직원들에게 떼쓰듯 항의한다. 왜 너네 프로그램은 그 시간대냐면서 자기들끼리 언성 높여 싸운다. 호환마마보다 무서운 게 복지관 노인들의 싸움이다(웃음). 복지는 공짜니까, 우리가 요구하면 너희(직원)는 들어줘야 해 이런 분위기가 있었다.


노인복지관장 부임 후 한 직원이 13명 명단을 가져왔다고 한다. 일종의 ‘블랙리스트’였다. 이 노인들의 발언권이 세고 분위기를 좌우하니 이들과 잘 이야기하면 운영에 도움이 될 거라는 보고였다. 강 관장은 “편견을 갖지 않고 어르신들을 직접 만나보겠다. 100일 동안 업무보고를 받지 않겠다”라고 답했다. 관장실 문을 활짝 열어두고 노인 면담을 하고 모든 프로그램 교실을 찾아다녔다.

100일 동안 면담한 효과는?

복지관을 좀 알겠더라. 도시의 노인복지는 농촌의 그것과는 달라야겠더라. 시골은 거동 불편한 분 챙기고 파스 사드리고 형광등 갈아드리고 했는데…. 도시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소득 보전을 해주고 복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만으로는 안 되겠더라. 노인 인구가 13.4%, 670만명인데 노인복지가 천편일률적이어서는 안 된다. 아까 말한 ‘블랙리스트’ 분들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해보니 고위직 출신이 많았다. 이런 대단한 분들이 노인복지관에 오면 유치원생·초등학생 대접을 받는 식이었다. 처음에 식당에 ‘잔반 남기면 벌금 1000원’이라는 말이 붙어 있었다. 사회 활동을 많이 하신 분들이 1000원짜리 복지관 밥 먹으면서 그 문구를 보면 무슨 생각이 들겠나. 금지와 명령의 언어로는 사람의 마음을 못 바꾼다. ‘밥 한 그릇에 온 우주가 담겨 있다’는 말로 바꾸어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식당 문화가 달라졌다. 노인들을 돌봄의 대상자, 복지 수혜자로만 여겨서는 안 된다. 이분들이 직접 복지관 일에 참여하고 힘을 합하면 대단하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자치회, 도서관건립추진위원회를 만들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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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1997년 한총련 임시의장 시절의 강위원씨(오른쪽). 한총련이 이적단체로 규정되면서 그해 7월 구속됐다.
복지관 1층에 도서관과 북카페가 있는 게 뜻밖이다.

건강을 생각한다고 죄다 댄스 같은 동적 프로그램 일색이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내내 들떠 있게 된다. 그래서 명상, 요가, 자서전 학교처럼 정적인 프로그램을 섞었다. 그런 활동을 하려니 공간이 필요했고 1층의 죽어 있는 공간을 도서관으로 만들었다. 리모델링하는 데 1억원 넘게 든다고 했다. 내가 그런 제안을 하니까 다들 찬성하시더라. 그때는 관장이 어디서 보조금을 받아오나 싶어 찬성했다고 한다(웃음). 그런데 그분들 기대와 달리 내가 영광의 여민동락 이야기를 하면서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보자고 했다. 우리가 직접 돈을 모아 스스로 공간을 만들어야 당당하지 않겠느냐고. 내심 돈이 금세 모일 것 같았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분들이 500만~ 1000만원씩 낼 듯했다. 그런데 노인들이 자체로 만든 설립추진위원회 회의 결과가 이랬다. ‘한 사람이 30만원 이상 못 낸다. 한 사람이 많이 내면 나중에 생색낸다. 돈 낸 사람 이름 공개를 안 한다. 돈을 못 낸 사람이 미안해하니까. 바자회 등을 해서 최대한 돈을 모은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듣고 깜깜했는데, 돌이켜보면 어르신들이 현명했다. 수백명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았다. 또 68세 회원인 할머니가 건축업자 출신인데, 자기가 하면 비용을 줄일 수 있다고 했다. 정말 절반으로 공사비가 줄어들었다. 돈이 있으면 2~3주에 마쳤을 공사를 1년 동안 했다. 돈이 모이면 형광등 달고, 또 돈이 모이면 문 달고 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나중에 도서관 앞에 ‘협동으로 피어난 꽃’이라고 적어놓았다. 노인들도 자기들 힘으로 이룬 일을 뿌듯해했다.


그렇게 만든 도서관을 지역 주민들에게 무료로 개방했다. 노인들만 있던 복지관에 청소년들이 드나들기 시작했고, 저녁에는 마을 주민들의 사랑방이 되었다. 도서관을 이용하는 마을 주민들은 복지관에서 행사를 열면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도서관은 복지관의 상징이 되었다.


복지관에 기부 카드가 붙어 있던데.

복지관에서 노인 일자리 사업을 한다. 주당 12시간 월 20만원이다. 이분들에게 어르신들이 최고로 존경받을 길이 있다고 제안했다. 동네에서 부침개도 나누어 먹고 쌀도 나누어본 적 있지 않으냐, 그러니 지구촌 나눔운동을 해보자고 했다. 1000원이면 아프리카 아이들 며칠 식량이 되는데, 손자 이름으로 5000원씩 기부해보면 어떠냐고 제안했다. 제안을 했지만 별 기대를 안 했는데 결과가 놀라웠다. 기부 회보를 만들어 손자들 집으로 보냈는데, 일자리 사업에 참여하신 분 250명 가운데 110명이 기부를 했다. 어른들이 그 기부를 그렇게 자랑하더라. 당사자 한 분 한 분의 삶을 고결하게 느끼도록 돕는 것이 노인복지의 역할 중 하나구나 느꼈다.

자치회는 무슨 일을 하나. 엘리베이터를 보니 대동회 안건이라면서 ‘신문 잡지가 사라지니 대책을 의논하자’고 적혀 있던데.

노인들 추천을 받아 40여 명으로 자치회를 구성했다. 직접 투표로 회장도 뽑았다. 마을 대동회 자리에서 중요한 문제를 결정한다. 토론을 하고 초록색 카드를 들면 찬성, 주황색 카드를 들면 반대다. 이분들은 위임과 대리에 익숙하다. 나에게도 그러셨다. ‘뭐, 학생회장도 했다며? 우리한테 묻지 말고 개운하게 일해부러, 시키는 대로 할 텡게.’ 어떤 분은 1월에 뽑은 강사를 3월에 자르라고 민원을 낸다. 관장이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1년 계약 이런 것을 모르신다. 그래서 강사도 자치회에서 면접해 직접 뽑도록 했다. 그랬더니 민원이 확 줄어들었다. 처음에 주차장 늘려달라는 민원이 많았는데, 마을 대동회 투표에서 99대1로 부결되었다. 이후 그런 민원이 사라졌다.


강위원 관장은 처음에 부임하고 각 프로그램 반을 돌아다니면서 “이 복지관이 노인복지의 모범이 되는 전국적 순례지로 만들겠다. 함께 도와달라”고 말했다. 자치하고 협동하자고 제안하고 토론을 이어갔다. 노인복지관에서 노인들이 조합원으로 참여해 더불어락카페협동조합(북카페), 더불어락밥상마실협동조합(복지관 외부 식당), 더불어락두부마을(두부 공장) 등 세 협동조합을 만들기도 했다. 협동조합에서 일자리를 얻고 일을 하면서 노인들의 성취감·자존감이 높아졌다. 이런 일들이 전국으로 점점 소문이 퍼졌다. 전국 174개 자치단체에서 이 노인복지관을 탐방하러 왔다. 대한민국 지역사회복지 대상도 받았고, 이 노인복지관의 자치 사례는 광주 지역 초등학교 4학년 사회과 교과서에 수록되었다. 그가 처음 부임할 때의 약속을 지킨 셈이다.

따지고 보면 노인복지관의 성과는 2007년 학생운동을 했던 이들과 의기투합해 영광으로 들어가 복지공동체 여민동락을 만들었던 일로부터 이어진 결과다. 여민동락은 농촌의 노인들과 함께하는 자립형 공동체의 성공 사례로 꼽힌다. 모시 잎 송편을 만드는 회사를 세워 노인들의 일자리를 만들어냈고, 생필품 사기가 불편했던 지역민들을 위해 ‘이동 구멍가게’ 동락점빵을 운영했다. 나중에 동락점빵은 전라남도 제1호 사회적 협동조합으로 발전했다.

문득 궁금해졌다. 학생운동의 중심에 섰던 그가 왜 노인(사회)복지·공동체 운동가로 나서게 된 것일까.


편견일 수 있지만, 한총련 의장 출신이 노인복지 일을 한다면 의아해할 수도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을 하게 되었나.

감옥을 두 번 갔다 왔다. 고등학생 때 교도소에서 같이 있던 사람들을 출소 후 밖에서 만났는데, 감옥에서는 대단한 혁명가들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출소 이후에 생활인으로 자리 잡지를 못하더라. 운동을 하더라도 전문성이 있어야겠다고 느꼈다. 두 번째 옥살이할 때 ‘내가 살면서 언제 뿌듯했나’ 되뇌었다. 과 학생회장을 할 때 지역의 장애인 단체 ‘별밭 어린이집’과 학생회가 자매결연을 했다. 봉사활동을 자주 갔는데, 그때 생각이 났다. 내가 즐겁고 행복한 일이 뭘까. 그러면서 공익적인 일이 없을까. 거기에 들어맞는 게 복지 운동이었다.


강위원씨는 2001년 출소 이후 한동안 한총련 합법화 운동을 했다. 그가 의장을 맡았을 때 한총련이 이적단체로 규정되었다. 이후 한총련에 가입한 대학의 총학생회장이나 대의원 자격이 주어지는 단과대 학생회장만 해도 자동으로 수배당하는 게 마음에 걸렸다. ‘물리적 폭력보다는 합리적 감화력이 더 중요하다’고 학생운동 사회도 설득해보고 싶었다. 그런 그를 두고 보수적인 이들은 강경 운동권으로 보았고, 일부 학생운동권에서는 개량주의자로 몰았다. “2년 동안 그 일을 하면서 상처를 많이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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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락노인복지관 제공더불어락 광산구 노인복지관에서는 마을 대동회를 열어 주요 안건을 결정한다. 초록색 카드는 찬성, 주황색 카드는 반대를 뜻한다.
한총련 합법화 운동과 여민동락 활동 사이에 무슨 일을 했나?

힘들었던 시기에 ‘별밭 어린이집’ 이모를 찾아갔다. 대구에서 성당이 지원하는 복지시설을 하고 있었다. 복지 운동을 배우고 싶었다. 거기에서 ‘김지원’이라는 가명으로 3년6개월 동안 일했다. 그때는 국가로부터 돈을 지원받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잘 나누어주는 것이 복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명도 ‘김(金)지원’으로 한 거다(웃음). 일하면서 사회복지 공부를 했다. 그곳에서 채용한 직원이 있는데, 그녀와 결혼했다. 아내는 운동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나를 통해 사회운동·학생운동을 처음 접한 사람이다. 그렇게 배우고 나서 운동했던 이들과 함께 여민동락을 만든 거다.

올해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으로부터 영입 제안을 받고 거절했다고 들었다.

보궐선거니 총선이니 선거 때마다 정말 괴롭다. 예전처럼 정당이 일방적으로 사람을 수혈하는 방식은 맞지 않는 것 같다. 정치에 대한 생각은 이렇다. 나는 ‘복지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정치 진출을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복지관 사무국장을 하던 이도 구의회 선거에 출마해 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런데 정치가 중요하다고 보는 것과 별개로 정치에 참여하는 이가 꼭 나여야 하는가는 신중하게 생각하고 있다. 나는 내 활동이 ‘끈질긴 운동’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정치 활동으로 보는 것 같다. 나는 지역사회에서 작은 영역을 만들고 싶은 욕심이 있다. 지금 사회복지계 일이 너무나 행복하다. 이제는 공직자들 앞에서 강의도 많이 한다. 내 하고 싶은 대로 말을 다 한다. 그래도 안 잡아간다(웃음).


내년이면 전남 영광에서 여민동락을 연 지 10년이 된다. 처음 뜻을 모았던 이들이 영광에 다시 모이기로 했다. 강위원씨도 영광에 작은 집을 짓는 중이다. 영광으로 내려가 지내면서 광주를 오가며 ‘투게더광산 나눔문화재단’ 일을 할 계획이다. 지역의 한 방송사는 강위원씨에게 함께 ‘청년 정치학교’를 열어보자고 제안했다. “시민들의 정치 참여는 중요하다. 그게 내가 하느냐 마느냐와 전혀 다른 문제다. 영광 가서 살면서 젊은이들과 정치학교를 연다고 하면 그나마 오해를 덜 받지 않을까요?(웃음)”

기자명 차형석 기자 다른기사 보기 ch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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