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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지금 기본소득 실험 중

내년부터 여러 나라에서 일제히 기본소득 관련 실험이 진행된다. 네덜란드에서는 다양한 조건으로 기본소득이 인간의 노동에 끼치는 영향을 탐구한다. 핀란드와 캐나다도 실험을 할 예정이다.

이종태 기자 peeker@sisain.co.kr 2016년 09월 07일 수요일 제4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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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여러 나라와 미국·캐나다 등에서 내년부터 일제히 기본소득 실험이 시작된다. 이 실험들은 단지 새로운 복지 제도의 예행연습이라기보다 오히려 인간에 대한 탐구에 가깝다. 예컨대 인간에게 일이란 무엇인가? 사람은 의무와 제재로 압박해야 겨우 일하는 시늉을 하는 존재인가? 아니면 자유를 누려야 창조성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가? 나아가 인간이 스스로를 책임지고 자립할 수 있는 존재이긴 한가?

어느 나라에서든 어린이나 청소년 교과서들은, 인간이 일을 통해 자신과 세계를 바꿔나가며 창조의 기쁨과 보람을 느낀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서 일은 단지 먹고살기 위해 견뎌야 하는 고역에 가깝다. 그래서 각국의 복지 당국은, 실업급여 수령자들이 공짜 돈을 받으며 놀고먹으려 하지 않는지 끊임없이 감시한다. 예컨대 자진 퇴사인가 해고인가 등 실업급여 수급 자격을 엄격히 심사하고, 수령자가 새로운 일자리를 찾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취업원서 제출을 요구한다. 의무적으로 각종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라고 강요하기도 한다. 이런 감시 활동에만 엄청난 규모의 재정이 지출된다. 영국 정치 전문지 <에이폴리티컬(Apolitical)>에 따르면, 네덜란드 동부의 도시 네이메헌에서는 연간 복지 비용으로 1억1600만 달러 정도가 든다. 그런데 복지 업무를 관장하는 공무원들의 인건비가 2000만 달러 정도다. 한편 실업자들은 복지 당국의 심사와 감시에 순응하면서 적잖이 굴욕감을 느낀다. 실제로 잔꾀를 부려 실업급여를 부당하게 수령하다가 적발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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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A
2013년 10월 기본소득법 국민발의안 통과를 축하하며 스위스 시민들이 동전 800만 개를 뿌렸다.
공짜 돈이 게으름뱅이를 만들 뿐이라면, 기본소득은 사회를 근본적으로 파괴하는 제도로 전락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내년(2017년) 1월부터 2년 동안 일부 시민들을 대상으로 시행하는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시의 기본소득 실험은 매우 흥미롭다. 실험의 목적은 급여 수령자들이 감시당하거나 별도의 의무를 부과받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일하는지를 추정해보는 것이다. 긍정적인 결과가 나온다면 위트레흐트 시는 기본소득제의 시행으로 엄청난 규모의 감시 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

네덜란드 19개 도시에서 실험 예정


이 실험의 대상자들은 여러 그룹으로 나뉘어 1인당 매월 970유로(약 120만원)를 지급받는데, 그 방법이 조금씩 다르다. 어떤 그룹은 매월 970유로를 받는 대신 새로운 직장에 대한 취업원서 제출이나 교육 프로그램 참석 등 실업급여 수령 의무를 그대로 지켜야 한다. 다른 그룹은 의무를 면제받는 대신 지급받는 돈만으로 생활을 꾸려나가야 한다. 인간은 기본적인 삶의 조건이 보장되면 더 이상 일하지 않으려 한다는 고정관념을 검증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또 다른 그룹은 당국이 지시하는 자원봉사(인근 학교 청소 등 간단한 일로 사실상 의무 노동)를 하는 경우, 월말에 125유로(약 15만원)의 보너스를 지급받는다. 월초에 자원봉사 조건으로 보너스를 선불로 받은 뒤,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 125유로를 돌려줘야 하는 그룹도 있다. 마지막으로 급여를 받으면서도 자유롭게 다른 직장에 취업해서 돈을 벌 수 있는 그룹도 있다. 이 모델은 기본소득의 원초적 모델이다.

위트레흐트 시는 이런 그룹들을 연구한 결과들을 비교해 가장 적절한 노동복지 모델을 찾아나갈 계획이다. 네덜란드에서는 이와 비슷한 실험이 바헤닝언, 틸뷔르흐, 흐로닝언, 네이메헌을 비롯한 다른 19개 도시에서도 내년부터 동시에 진행된다.

지난 6월25일 스위스에서는 기본소득 도입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가 시행되었다. 발의자들이 상정한 기본소득의 규모는 매우 야심적이었다. 성인 한 사람에 매월 2500스위스프랑(약 282만원)을 지급하는 프로젝트(어린이는 625스위스프랑)였는데, 이 나라 1인당 GDP의 40~50%(평가 기준에 따라 차이 발생)에 달하는 규모다. 결과적으로, 23% 대 77%로 부결되었다. 그러나 발의안을 국민투표에 상정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성공이라는 평가도 있다. 국민투표 발의자는 <가디언>과 한 인터뷰에서 “5년 전만 해도, 보편적 기본소득이란 용어를 아는 스위스인이 100명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시민이 기본소득에 대해 토론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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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A
독일 베를린 브란덴부르크문 앞에 펼쳐진 “당신 소득이 보장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라는 대형 현수막.
만약 기본소득 급여의 규모가 낮았다면, 좀 더 높은 지지율을 기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1인당 2500스위스프랑으로 높게 잡은 이유는, 국민투표 발의자가 좌파 성향의 정치집단이어서라고 볼 수 있다. “전체 스위스인에게 인간적인 삶과 공적 생활 참여를 보장할 수 있는 수준으로 복지를 강화한다”라는 목표를 최우선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 정도의 기본소득이 제공되어야 저소득 노동자들이 단지 배를 채울 목적으로 일하지 않게 되어 사회적 임금 수준을 높일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스위스는 2015년 기준으로 GDP의 19% 정도를 복지 등 공공사회 지출 부문에 사용하고 있다. 유럽에서는 최저 수준이고, OECD 국가 가운데서는 낮은 편이다.

스위스에서 기본소득 논의를 촉발한 진영이 좌파라면, 핀란드에서는 우파 정부가 기본소득 실험을 내년부터 시행할 계획이다. 내용도 크게 다르다. 유하 시필라 핀란드 총리는 지난해 말 기본소득 실험의 목표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시민들의 노동 의욕을 촉진하고, 사회보장 체계를 단순화해서 공무원의 개입을 줄이며, 공공재정의 지속성을 보장할 수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서다.” 노동·육아·연금 등으로 세분화된 복지급여들을 기본소득으로 일원화하겠다는 의미다. 이런 가운데 복지 관련 공무원 수를 줄여 재정지출을 삭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핀란드 우파 정부의 기본소득 계획은, 복지비용을 전반적으로 줄이고 간소화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핀란드 정부는 당초 기본소득 급여 규모를 매월 성인 1인당 800유로(약 98만원)로 잡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최근 여러 서구 언론 보도를 종합해보면, 내년부터 핀란드 시민 5000~1만명을 대상으로 시행될 실험에서는 1인당 월 500~600유로를 지급할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도 캐나다 중남부의 온타리오 주 정부가 올해 내로 음식·교통비·의류 등 생활필수품비를 시민에게 제공하는 실험을 실시할 계획이다. 뉴질랜드의 거대 야당으로 1999~ 2008년에 집권했던 노동당 역시 다시 집권하면 기본소득 정책을 고려하겠다고 공언한 상태다. <가디언>(6월6일)에 따르면, 영국 노동당 역시 기본소득을 추진하는 시민단체 ‘콤파스’의 관련 보고서를 당 정책으로 내세울지 꼼꼼히 검토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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