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D 프린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메이커(장인)’라기에 언뜻 이과형 괴짜를 떠올렸다. 착각이었다. 구혜빈씨는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정통 문과형 여성이다. 지난 6월 말 서울혁신파크 안에 문을 연 ‘메이커 스페이스’의 총괄 매니저이기도 하다. ‘디지털 공작소’로도 통하는 메이커 스페이스는 말 그대로 장인들의 작업 공간이다. 3D 프린터, CNC 조각기 따위 고가의 디지털 장비를 갖추고 있다. 그렇다고 주눅 들 필요는 없다. 3D 초보자라도 한 달 5만원 안팎의 회비나 시간당 사용료만 내면 이들 장비를 마음껏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 사전에 장비 사용법을 익히고 안전교육을 이수하는 것은 필수다. 구씨 같은 전문요원을 통해서다.

구씨는 어쩌다 이런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걸까. 엉뚱하게도 그녀는 “내겐 늘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던 것 같다”라고 운을 뗐다. 심리학 공부도 소용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유럽의 메이커 스페이스를 소개한 영상을 우연히 접하게 됐는데, 장면 하나가 눈길을 확 사로잡았다. ‘실패해도 괜찮은 공간’이라는 구절이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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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신선영
‘이게 정말일까?’ 실상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던 구씨는 2012년 본격적인 팹랩(Fablab) 투어에 나섰다. 팹랩은 국제 인증을 받은 메이커 스페이스라 할 수 있다. 일정 수준 이상의 장비를 갖추고, 팹랩아카데미에서 자격증을 딴 강사(인스트럭터)가 한 명 이상 배치돼 있어야만 팹랩 신청 자격을 얻을 수 있다. 2000년대부터 팹랩이 생겨났다는 노르웨이·영국 등지의 시골 마을을 돌며 구씨는 문화충격을 느꼈다. 밤마다 여기 모인 마을 사람들이 대형 탁자를 중심으로 왁자지껄 수다를 떨면서 온갖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실물로 구현하는 광경이 경이로웠던 것이다. MP3 기능을 탑재한 칫솔, 테니스채 모양의 크리켓 배트 등은 이렇게 집단지성으로 탄생한 히트상품이었다.

한국에 돌아온 구씨는 곧바로 인터넷에서 영어로 진행되는 팹랩아카데미에 등록했다. 컴퓨터공학·산업디자인 전공자들 틈에 끼어 낯선 용어와 개념을 익히느라 애는 먹었지만, 덕분에 오늘날 그녀는 국내에 다섯 명밖에 없는 팹랩 인스트럭터 중 한 명이다. 이렇듯 희소가치 있는 그녀가 서울혁신파크에 합류한 이유는 하나. 사회 혁신이라는 지향점을 내건 것이 매력적이어서다.

현재 진행 중인 ‘앰뷸런스 드론 프로젝트’가 한 예다. 드론에 심장제세동기를 실어 운반함으로써 심정지 위험에 빠진 응급환자의 생존율을 대폭 끌어올리자는 이 프로젝트에는 메이커 다섯 명이 합류했다. 드론에만 관심 있던 마니아들이 사회로 시야를 확장한 것이다. “본래부터 메이커는 혁신적인 사람들이다. 자기 손으로 직접 뭔가를 만드는 걸 즐기는 데다 오픈소스 등의 영향으로 지식을 공유하는 문화에도 익숙하다. 이들이 머리를 맞대고 사회 혁신을 궁리하다 보면 새로운 차원의 ‘메이커 운동’이 벌어질 수 있지 않을까?”

기자명 김은남 기자 다른기사 보기 ke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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