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내 안에서 그 계절을 보겠지/ 노란 잎이 한둘 남은, 혹은 다 떨어진/ 나뭇가지는 차가운 바람에 흔들리고/ 노래하던 고운 새들도 사라져 폐허가 된 마른 성가대석.”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73번은 이제 죽음을 앞둔 노인이 연인에게 전하는 노래로 유명하다. 나뭇잎이 떨어진 나뭇가지처럼, 해 지고 스러져가는 빛처럼, 마지막으로 타오르고 남은 재처럼 이제 이 세상을 떠날 생명. 케이트 윌헬름은 인간의 삶에 대한 이 은유를 인류 전체로 확대하여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Where late the sweet birds sang)〉를 썼다.

소설의 시작, 인류는 존재의 가을을 맞고 있다. 급속도로 퍼지는 오염, 오래전에 0으로 떨어져버린 인구증가율, 질병의 확산과 빈번해진 홍수와 가뭄, 사막화. (지금 왠지 낯설지 않게 들리는) 파멸의 징조 앞에서 섬너 가의 사람들은 종말에 대비한다. 과학자인 데이비드는 자연임신이 불가능해진 인류를 이어가기 위해 생명 복제를 실험하고 마침내 성공한다.

1976년에 처음 출간되어 휴고상과 로커스상 등 유수의 SF 문학상을 받고 고전의 반열에 오른 이 소설은 2005년 8월 한국에 처음 소개되었다. 난 이 책을 처음 읽던 때를 기억한다. 황우석 교수 연구팀이 체세포 복제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면서 인간 복제 기술이 가져다줄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기대가 사회에 널리 퍼지던 해였다. 그리고 그 겨울, 다시 그 기대가 차갑게 배반당한 해이기도 했다. 인간 복제에 대한 회의 없는 장밋빛 예상과 연구윤리 위반 의혹을 받는 세계적인 한국인 과학자를 보호하자는 민족주의적 담론이 결합했다. 인간 복제가 획일화된 집단성을 용인하는 태도와 관련되었음을 연상하면 역사적 우연만은 아니다.

잘 쓰인 과학소설은 사회의 방향을 예측하기 마련이다. 지금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를 다시 읽으면서 우리의 11년은 이 책이 그려낸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케이트 윌헬름이 인간 복제라는 소재에서 탐구하려 한 것은 ‘인간은 어떻게 정의되는가’ 하는 본연적인 문제였다. 1부에서 데이비드가 만들어낸 클론들은 똑같이 행동하고 사고하며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원래의 인간이 모두 사라진 2부에서 클론의 다음 세대들은 이 단일성을 존재의 기본 조건으로 당연히 여기지만, 자기만의 고독을 발견한 개체가 등장해 분열을 일으킨다. 3부에서는 모두가 혼자인 새로운 인류가 기다린다. 고립을 받아들일 때 인간은 비로소 인간이 된다. 개체들이 같은 사고를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집단의 이익을 위해 동일한 행동을 해야 한다는 요구는 가끔은 절대적 가치를 지닌 통일성처럼 선전되지만, 개체로서의 성격을 빼앗아간다.

혼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아름답다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는 무척 아름다운 소설이라고 한다. 심지어 책 뒤표지에서 스스로 그렇게 주장한다. 나는 ‘아름답다’는 말이 요새 무척 낯간지럽게 쓰인다고 생각하지만 이 말에는 동의할 수밖에 없다. 문장이 정밀하고 묘사가 서정적이라든가, 소설 속 연인들이 애틋하다는 것과는 또 다른 문제이다. 이 소설이 아름다운 이유는 이를 읽는 사람이 우리가 각기 혼자라는 사실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이에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상관없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처럼 인간으로서 우리는 다 다르다.

“마지막으로” 또 하나 간지러울 수도 있는 말을 덧붙이려 한다. 이 소설의 제목이 유래한 소네트 73번의 마지막 두 행은 이러하다. “(임박한 죽음을) 깨달은 당신, 사랑이 더 강해져/ 머지않아 두고 갈 것을 더 잘 사랑하리라.” 더 잘 사랑한다. 고독하기에 개별인 인간이 종말에 앞서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유일한 선택이다.

기자명 박현주 (번역가·에세이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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