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바닷가 마을. 한 남자가 해변에 서 있다. 먼 바다를 향해, 아니 그 바다 위 하늘을 향해 손가락 세 개를 편 채로 서 있다. 남자의 발아래, 작가가 써넣은 한 줄이 보인다. ‘포부:사치와 평온과 쾌락.’ 장 자크 상페의 그림책에서 단숨에 내 마음을 빼앗은 한 컷.

나의 포부도 그와 다르지 않다. 당신의 포부도 나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작은 ‘사치’와 심신의 ‘평온’과 때때로 ‘쾌락’을 바라는 마음일랑 다들 비슷할 것이다.

동일맨션에 기거하는 모든 이들에게도 그러므로 포부는 있다. 저마다 마음속으로 손가락 세 개씩은 편 채로 잠자리에 든다. 언젠가는 내 것이 될 ‘사치와 평온과 쾌락’을 꿈꾸며 이내 곯아떨어진다. 하지만 날이 밝으면 도로 제자리. 어두운 원룸에서 온종일 볼펜만 그러쥐는 손가락 세 개. 각자의 포부를 깔고 앉은 채 그들은 오늘도 고시 공부를 한다. 포부마저 열심히 포기하며 버틴 시간이 벌써 몇 년씩이다.

404호 익수(김대현)는 사법고시를 준비 중이다. 사치와 평온과 쾌락이 넘쳐나는 인생에 가장 빨리 도달하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번에는 감이 좋다. 별일만 없다면 합격할 것 같다. 별일만 없다면 포부를 더는 포기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별일만 없다면, 정말 별일만 없다면 말이다.

“사람 구하겠다는데, 판검사 될 놈이?”

수도요금 120만원. 이 별난 고지서를 받아들고 익수는 생각한다. 까짓 거 별일 아니다, 굳이 문제 삼지 말자, 시험보다 더 중요한 건 없으니까. 그래서 엄마에게 전화를 했고 군말 없이 돈만 입금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익수 엄마 미경(박지영)에게 이건 별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빠듯한 살림에 수도요금 120만원을 문제 삼지 않고 넘길 재간도 없었으니, 당장 서울로 올라온다. 동일맨션 관리사무소로 쳐들어간다. 방방이 찾아다니며 물씀씀이를 캐묻는다. 그렇게 기어이 별일을 만들고야 만다.

기쁘게 ‘올해의 발견’이라 부르고 싶은 영화 〈범죄의 여왕〉은 고시생 아들을 둔 엄마가 주인공이다. 별난 수도요금 고지서를 받기 전까지, 엄마는 아들과 아들 또래들이 처한 현실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눅눅한 원룸마다 덩달아 눅눅해져 눌어붙은 청춘의 시간들. ‘집’을 나와 ‘방’에 갇힌 이들의 고립과 단절. 402호, 403호, 404호…. 이름 대신 ‘호수’로만 불리는 익명과 무명의 커뮤니티. 그들만의 질서와 법칙이 지배하는 고시촌의 이 모든 풍경이 엄마에게는 물론 관객에게도 이상해 보인다.

말하자면 미경은 앨리스, 수도요금 고지서는 토끼. ‘이상한 동일맨션의 앨리스’가 된 미경이 모자 장수 대신 B101호 개태(조복래)를 만나 고시촌의 좁은 복도를 함께 여행하는 이야기다. 코미디이면서 스릴러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사회고발 드라마의 면모까지 갖췄다. “엄마가 사람 구하겠다는데, 판검사 될 놈이 (엄마보고) 가지 말라는 게 정상이야?” 미경이 가볍게 던진 대사는 사실 하나도 가볍지 않다. 남의 가난과 남의 사투와 남의 절망을 애써 모른 체해야만 비로소 나의 사치와 나의 평온과 나의 쾌락을 성취할 수 있다는, 우리 시대의 어떤 신앙과도 같은 믿음. 그 뒤틀린 포부를 쉽게 포기하지 못하는 게 영화 속 고시생들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동일맨션은 분명 ‘그들’의 거처이지만, 실은 오래전부터 이미 ‘우리’의 거처이기도 하다.

〈족구왕〉에 이어 〈범죄의 여왕〉을 만든 제작사 ‘광화문시네마’는 확실히 매력 있는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재주가 있다. 배우 박지영을 만나 더욱 생기와 활력이 넘치는 주인공 양미경. ‘비정상의 정상화’를 위해 몸을 사리지 않는 이 아줌마의 오지랖은 차라리 초능력에 가깝다. 이 영화를 ‘한국형 슈퍼히어로 무비’라 부르고 싶은 이유다.

기자명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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