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처음 부산시 경찰국 대공분실에 끌려갔다. 사람을 잘못 봤다고 생각했다. “난 김진숙이란 말예요”라고 말하는 버릇은 그때 생겼다. 착오만 바로잡히면 금방 복직될 줄 알았다.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56)은 1986년 7월14일, 한진중공업에서 해고됐다.

해고된 지 딱 30년 되던 지난 7월14일, 부러 기억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간 ‘기념일’이 너무 많았다. 민주노조 활동을 하던 동료 네 명을 제 손으로 떠나보냈다. 309일 동안 크레인에 올랐다. 대공분실 세 번, 징역 세 번, 구류 아홉 번…. 30년이 지나는 동안 새하얗게 센 머리를 검게 물들인다.

한진중공업 싸움의 역사는 김진숙 지도위원을 빼놓고 말하기 힘들다. 한진중공업의 30년을 영화 <그림자들의 섬>에 담았다. 그림자(影)의 섬(島), 영도. 육지와의 거리가 얼마 되지 않지만 고립된 곳. ‘그림자’ 노동자 김진숙·박성호·윤국성·박희찬씨의 지난 이야기를 통해 ‘순한 양’이 ‘투사’가 된 시간을 회고한다.

ⓒ시사IN 신선영 김정근 감독(사진)은 전단지를 보고 찾아간 단체에서 처음 카메라를 들었다. 이후 신발 부품 공장에서 일하면서도 영상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부산에서 활동하는 김정근 감독은 지난 5년간 한진중공업을 맴돌며 카메라를 들었다. 앞서 김 감독은 2012년 희망버스를 담은 영화 <버스를 타라>를 만든 바 있다. <그림자들의 섬>은 2014년 서울독립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았다. ‘정근아’ 하던 형들은 장난스럽게 ‘김 감독님’ 하고 부른다. 그들이 더 크게 기뻐했다. “우리의 이야기가 다른 사람에게도 가치 있을 수 있구나….” 호평을 받고도 개봉까지 2년이 더 걸렸다. 소셜 펀딩으로 영화 배급비 1500만원을 모았다. 개미 후원자 453명이 힘을 보탠 덕분이다. 영화 <그림자들의 섬>은 8월25일 개봉한다.

김정근 감독이 한진중공업과 인연을 맺은 건 2010년이다. 2009년 쌍용차 옥쇄 파업을 보면서 한진중공업에서도 일어날 수 있겠다고 여겼다. 아니나 다를까, 이듬해 정리해고 안이 발표되자마자 카메라를 들고 한진중공업을 찾았다. 김진숙 지도위원이 정리해고에 반대하며 천막 안에서 단식을 하던 때였다.

김 감독은 한진중공업 사태에 대한 부채감이 남아 있었다. 2003년 청년단체에서 활동하던 당시, 한 선배가 김주익 지회장의 85호 크레인 고공 농성을 담아볼 것을 제안했다. 인터넷 붐이 일기 시작할 때였다. ‘그때 찍어서 올렸다면 사태를 변화시키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김 지회장은 129일 만에 목을 맨 채 발견됐다. 부산역 광장에서 진행된 장례 행사에 참석했다. 김진숙 지도위원의 추도사를 듣고 상복을 입은 노동자를 보며 가슴에 미안함이 사무쳤다.

애초 다큐멘터리에 관심이 있는 건 아니었다. 집안 형편 때문에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공업 고등학교로 전학했다. 선반, 밀링 등 기술을 익혔지만 적성에 맞지 않았다. 자퇴를 고려하던 중에 학비를 내지 못하면서 퇴학 처리됐다. 가스 배달, 비디오방 아르바이트 등을 거쳐 열여덟 살에 인쇄소 아르바이트를 하기 시작했다. ‘다큐멘터리 교실’ 전단지를 보고 찾아간 단체에서 처음 카메라를 들었다.

‘강서 형’ 죽음 겪으며 영화 기획안이 바뀌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다큐멘터리 강좌를 들었다. 그즈음 1987년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된 명동성당의 6일간 기록을 다룬, 김동원 감독 영화 <명성, 그 6일의 기록>을 보고 “가슴에 불이 이는 것을 느꼈다”. 이런 마음은 <전태일 평전>을 읽었을 때와 비슷했다. 이후 5년간 신발 부품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면서도 영상을 만드는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부산의 신발 산업은 조립 기술이 좋고 인건비가 싼 편이라 인기가 좋았다. 도금 과정에서 각종 약품을 쓰는 탓에 암모니아 냄새가 코를 찔렀다. 프레스가 쇠를 찍어내는 소리에 난청을 겪는 현장 노동자가 수두룩했다. 김 감독에게 이때의 기억은 “관리자보다 현장 사람들이 따뜻하고 친근했다”고 남았다. 이때 그는 자신이 노동자라는 정체성을 뚜렷이 가졌다.

이러한 정체성은 영화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노동자가 한 명씩 들어오고, 카메라를 낯설게 쳐다보면서 미소를 짓는 얼굴이 영화에서 가장 빛이 나는 순간이다. “조명받지 못한 노동자가 무대에 선” 찰나를 포착해냈다. 2012∼2013년 한진중공업 노동자 10명을 연령별로 인터뷰했다.

애초 <그림자들의 섬>은 정리해고 문제가 수십 년 동안 반복되는 양상에 천착했다. 경영상 이유로 속수무책으로 구조조정당하는 노동자 이야기를 구상했다. 그러던 중 2012년 ‘강서 형’의 죽음을 겪으며 <그림자들의 섬> 기획을 전면 수정했다. 최강서씨는 노조 사무실에서 유서를 남기고 숨을 거뒀다. ‘태어나 듣지도 보지도 못한 돈 158억. 죽어라고 밀어내는 한진 악질 자본. 박근혜가 대통령 되고 5년을 또… 동지들, 어떻게 지켜낸 민주노조입니까?’

ⓒ연합뉴스 2012년 한진중공업 노동자 최강서씨가 목숨을 끊었다. 이듬해 2월24일 열린 영결식.

김정근 감독은 최강서씨가 숨지기 바로 전날까지 소주 잔을 기울일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 그의 죽음에 따른 충격이 컸다. 손을 잡고 술잔을 나눈 사람이 없어지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평범한 내 옆 사람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이유를 사람들에게 설득하기로” 방향을 바꿨다. 그동안 찍은 분량을 포기했다. 대신 노동자 얼굴을 클로즈업하고 인터뷰했다. 자신의 지난 시간을 이야기하는 표정에서 마음의 풍경이 드러난다고 생각했다.

‘강서 형’에 대한 장면을 편집할 때는 어김없이 눈물을 쏟고 말았다. 그런데도 반드시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왜냐면 우리가 기억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농담 따먹기 좋아하고 꽹과리 치는 순박한 사람들이 왜 목숨을 걸고 싸우는지”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또 “절반의 승리건, 뼈아픈 패배건 ‘내가 좋아하는’ 당신들이 스스로 초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바람도 가졌다. 영화 내내 감독은 한진중공업 노동자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는다.

“지금보다 더 절망적인 때가 있었다”

김진숙 지도위원이 85호 크레인에 오르면서 김 감독의 어깨는 더 무거워졌다. 김주익 지회장을 떠나보낼 때 짓눌렸던 부채감이 떠올랐다. 무조건 세상에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1차 희망버스가 오기 직전까지 영상을 만들어 인터넷에 올렸고, 희망버스가 돌아간 뒤에는 한진중공업 노동자의 생활을 업데이트했다. 2차 희망버스를 독려하기 위해 궁리 끝에 김 지도위원이 직접 크레인 내부를 촬영하도록 했다. 이 영상의 클릭 수는 5만 회를 넘었다.

현재 한진중공업은 ‘조선업 위기’ 속에서 그나마 안전한 편에 속한다. 채권단과 자율협약 양해각서(채권단 공동관리)를 체결하고 경영정상화에 접어들었다. 다만, 2012년 1월 복수노조가 생기면서 노동자 700명 중 500여 명이 기업노조에 가입했다. 민주노조에는 200명 정도만 남았다. 교섭권이나 발언권이 줄어들었지만 일희일비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김 감독은 앞으로도 노동자의 이야기를 담을 예정이다. 지난해 9월부터 부산 지하철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이야기를 담은 <언더그라운드>를 찍고 있다. 총 3부 중 두 편이 유튜브 등을 통해 공개됐다. “구의역 사고나 삼성 서비스센터 기사의 추락사, 조선업 구조조정까지 세상이 나아진다는 믿음이 흐려지고 있다. 하지만 한진중공업 노조 역사를 보다 보니, 지금보다 더 절망적인 때가 있었다. 계속 싸운다면 ‘불가능은 없다’고 믿는다.”

기자명 송지혜 기자 다른기사 보기 so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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