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2일과 8일 사이, 나라에 작은 소동이 있었다. 이 소동을 굳이 ‘작다’고 말하는 연유가 있다. 지난해 6월에 일어난 신경숙 사태나, 올해 5월에 있었던 한강의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수상만큼 떠들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동은 이랬다. ①8월2일, 국내 최대 문인 단체인 한국문인협회가 육당 최남선(1890~ 1957)과 춘원 이광수(1892~1950)의 이름을 단 문학상을 제정하기로 했다고 공표했다. ②8월4일, 역사정의실천연대가 문인협회가 있는 서울 목동 대한민국예술인센터 앞에서 친일 경력자 최남선·이광수 문학상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퍼포먼스를 벌였다. 이에 앞서 8월2일 민족문제연구소도 두 문학상 제정을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③8월8일, 한국문인협회가 육당문학상·춘원문학상 제정 철회를 발표한다. 아아, 이광수! 탄식이 절로 났다.

이광수의 친일 행적을 입증하기란 어렵지 않다. 이광수의 친일은 추상적이지 않고 꽤 구체적이다. 그런데 한국문인협회가 이광수 문학상을 제정하면서 “작품으로써 문학사 건설에 크게 기여”했다고 주장할 때, 또 “친일 행적 때문에 문학적 자산까지 가려져서는 안 된다”라고 항변했을 때, 이광수가 한국 ‘문학사 건설’에 기여한 ‘문학적 자산’은 무척 추상적이다. 고작 말하는 것이 ‘이광수는 한국 근대문학의 효시’라는 정도인데, 효시란 그가 아니었어도 누군가는 그 노릇을 떠맡게 되어 있는 것 아닌가? 이 짧은 글은 한국 문학사 건설에 기여했던 이광수의 문학적 자산을 명시하고자 한다.

ⓒ이지영 그림

이광수 글쓰기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 ‘자서전적 글쓰기’다. 〈그의 자서전〉(1936), 〈나〉(1947), 〈나의 고백〉(1948) 같은 것이 대표적인 자서전적 글쓰기이거니와, 자서전적 글쓰기와 거리가 있다고 착각하기 쉬운 그의 많은 소설마저 자서전적 일화를 능숙하게 활용하고 있다. 일례로 근대적 장편소설의 시작이라는 〈무정〉은 작품을 둘러싼 단단한 계몽주의 외피 속에 작가의 고백 성향이 약동하고 있다. 김윤식이 〈이광수와 그의 시대〉(솔, 1999)에 “만민을 울린 걸작이자 우리 근대소설의 대표적 장편 〈무정〉은 창작이 아니고 사실 그 자체였다. 그 자신이었다”라고 한 것은 괜한 말이 아니다.

그가 ‘나를 이야기하기’를 즐겼던 것은, 열네 살 때 일본 유학을 가서 접했던 사소설(私小說) 때문이다. 일본만의 소설 형식이라는 사소설은 작가인 ‘나’를 화자이자 주인공으로 내세워 작가 자신의 심경과 사생활을 파헤친다. 이 장르의 난관은 작품의 소재나 줄거리가 사생활을 원료로 하는 만큼, 작품이 독자의 관심을 끌려면 작가 자신의 삶이 그만큼 극적이어야 한다는 데 있다. 일본 평론가들이나 작가들이 사소설에 자멸파(自滅派)니 자해파(自害派)니 하는 희화적인 딱지를 붙인 이유는 그래서다. 참고로 이광수보다 약 20년 먼저 태어난 시마자키 도손은 여조카와 육체관계를 맺고서 〈신생〉(문학과지성사, 2016)을 썼고, 시마자키 도손과 쌍벽을 이룬 다야마 가타이는 여제자에게 애욕을 품었던 자신의 경험을 고스란히 옮긴 〈이불〉(소화, 1998)을 썼다.

〈이광수 장편소설 연구〉와다 도모미 지음예옥 펴냄

이 장르의 정치적·역사적 함의는 국가와 작가 사이의 신사협정으로 설명된다. 즉 작가가 국가의 일에 관여치 않는 한 국가도 작가를 건드리지 않는다는, 국가와 작가 사이의 암묵적 합의의 결과가 사소설이다. 나쓰메 소세키나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은 나라에 무엇인가 중요한 사태가 벌어졌는데도 작가인 ‘나’는 사태에 개입하기를 거부하거나, 사태 자체를 외면한다. 일본 제국이 욱일승천하는 모습을 보면서 작가들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괜히 나랏일(國事)에 간섭해서 감옥에 갈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광수는 당대에 존경받는 명사였는데도 자신의 치부를 즐겨 폭로했다. 그는 자서전에 친척 아주머니에 대한 연정을 회고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으며, 그가 첫 번째로 발표한 단편소설을 비롯한 여러 글은 자신이 가볍게 체험했던 동성애 경험을 공개하고 있다. 또 마을의 옆집 아주머니가 자신의 어린 동생을 가리켜 못났다고 한 것에 분노해서 자기 동생과 또래인 옆집 아주머니의 딸을 죽이려고 했던 엽기적인 일화마저 가감 없이 쓰고 있다. 〈이광수를 위한 변명〉(중앙M&B, 2000)을 쓴 뉴욕 주립대 의과대학 정신과 이중오 교수는 이처럼 솔직한 이광수를 진실에 대한 ‘용기’와 ‘결백벽’을 가진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라고 예찬한다. 하지만 치부를 숨기려 들지 않는 이광수의 솔직함은 용기나 결백벽이라기보다, 사소설의 영향이다. 이광수가 10대 중반에 조우했던 일본 문학의 독소는 그만큼 깊었다. 그러나 이광수는 끝내 사소설의 유혹을 이겨냈다. 아니 이광수는 사소설을 쓰지 못했다.

이광수 대표작들은 ‘과학소설’이다?

행인지 불행인지 일본 작가들에게는 암묵적 협약을 맺을 국가가 있었던 반면, 이광수에게는 협약을 맺을 국가가 없었다. 일본 작가는 성공한 제국주의 국가 안에서 ‘동조의 침묵’이라도 택할 수 있었지만, 이광수가 놓인 상황은 그게 아니었다. 식민지 지식인이던 그는 미래에 올 국가의 바탕이 될 민족부터 개량해야 한다는 숭고한 임무를 발견하게 된다. “큰 학자, 큰 교육가, 큰 실업가, 큰 예술가, 큰 종교가가 나와야 할 터인데, 더욱더욱 나야 할 터인데”라고 부르짖는 〈무정〉이 그것을 웅변한다. 두 나라의 서로 다른 역사적 경험이 한국 근대문학을 일본 근대문학과 전혀 다른 길로 인도했다.

이광수가 사소설에 순순히 투항해 연애와 개인 잡사 쓰기에 열중했더라면, 민족개조론과 같은 미끄러운 비탈길로 빠져든 끝에 민족의 배신자가 될 일도 만무했다. 사소설을 쓰지 않았던 것이 이광수 개인에게는 비극이 되었으나, 한국 근대문학의 향도였던 그가 사소설을 쓰지 않았기에 한국 문학사는 일본 문학사에 편입되는 것을 면했다. 이광수가 사소설로 한국 문학의 기초를 놓았다면 채만식도 염상섭도 없고, 박경리도 조정래도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한국 문학사 건설에 기여했던 이광수의 문학적 자산이다. 덧붙이자면 일본 문학이 사소설로부터 확실히 벗어나기 시작한 것은 무라카미 양씨(兩氏)부터다. 오에 겐자부로만 해도 사소설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허우적거린 흔적이 역력하다.

일본의 젊은 이광수 연구자 와다 도모미는 〈이광수 장편소설 연구〉(예옥, 2014)에서 “일본 근대문학을 기준으로 삼으면 이광수의 소설은 일본 근대문학의 수준을 넘어서고자 해도 넘어설 수 없었던 미완성 소설에 불과하다. 일본 근대문학과는 지향 방향이 다르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광수 문학을 이해할 수가 없다”라고 썼다. 여기서 일본 근대문학과 ‘다른 지향’이 다 무엇이겠는가? 매우 흥미롭게도 와다 도모미는 이광수의 대표적 장편소설들을 진화론을 선전하는 ‘과학소설’로 재해독한다. 엉뚱한 해독처럼 보이지만, 글쓰기가 곧 나랏일이던 성리학적 글쓰기 전통에 입각해 있었던 이광수가 ‘조선 구하기 이론’을 찾아 진화론과 만난 것은 필연이다.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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