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인천상륙작전>이 관객들로부터 높은 인기를 얻고 있는데도 영화평론가들이 낮은 평점을 준 사실을 비판적으로 보도하라.’ 7월29일 KBS 문화부 기자들은 주말 뉴스 아이템으로 이런 내용의 취재 지시를 받았다. 영화 개봉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KBS와 KBS 미디어는 이 영화 제작비 170억원 중 30억원을 투자했다.

이 지시에 반발한 기자 2명에 대해 KBS 사측은 징계 절차에 들어갔다. 편집회의를 거쳐 문화부 데스크가 정당하게 내린 취재 지시를 거부해 취업규칙 제4조(성실)를 위반했다는 이유다.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이하 새노조)는 이런 징계 절차가 신념에 반하는 취재를 거부할 권리를 규정한 KBS 방송편성규약을 위반한 조치라고 비판했다. 한 KBS 기자는 “그동안 KBS <뉴스9>에서 영화 한 편만 가지고 세 번이나 다룬 적도 없거니와, 누가 봐도 영화 홍보를 노골적으로 하겠다는 건데도 ‘이슈 되는 아이템이라 정상 발주한 것’이라고 비상식적으로 부정을 하니 기자들이 당황스러워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예정된 징계는 이뿐이 아니다. 지금 KBS 내부게시판에는 회사 측의 특별감사를 비판하는 기자들 성명서가 연일 올라오고 있다. 회사 측이 KBS 전국기자협회(이하 전국기자협회), 대구총국 등을 대상으로 특별감사를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7월19일 KBS <뉴스9>에 보도된 ‘경찰 성주 시위 외부 인사 참가 확인’ 리포트가 며칠간 이어진 ‘윗선’의 거듭된 지시로 이뤄졌으며, 이 과정에서 대구 현장 기자들의 의견이 무시됐다는 성명을 전국기자협회가 7월20일 낸 데 따른 것이다.


ⓒ전국언론노조 제공 청와대의 보도 개입에 대한 KBS의 침묵을 비판해 보복 인사를 당한 정연욱 기자(가운데).


전국기자협회는 일부 표현상 오류 때문에 성명서를 철회했지만 그 취지와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고 밝혔다. 회사 측은 해당 기사가 정상적 편집회의를 거쳐 채택된 것인데도 ‘윗선’ ‘보도지침’으로 왜곡해 회사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이유로 성명을 낸 노준철 전국기자협회장과 대구총국 등을 대상으로 특별감사에 착수했다.

회사 측이 진행하는 특별감사는 또 있다. 7월11일 임원회의에서 고대영 사장이 사드 배치와 관련해 ‘중국 관영매체 주장을 그대로 전달해 문제다’ ‘사드 문제에서 국익을 최우선시해야 한다’ ‘KBS의 관점이 있어야 한다’ 등의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사장 발언이 보도본부장 등을 거쳐 해설위원들에게도 전해졌다. 이때 임원회의 당일인 7월11일(김진수 해설위원)과 다섯 달 전인 2월11일(김영근 해설위원) 사드 관련 뉴스 해설을 한 해설위원 2명이 주의를 받았다. 각각 중국과 러시아의 반발, 한국의 경제적 이익을 들어 사드 신중론을 편 해설위원들이다.

해당 해설위원 2명은 주의를 받은 직후에 곧 인사 조치가 있을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이 중 김진수 해설위원은 실제로 7월15일 보도본부 밖 조직인 방송문화연구소로 발령받았다(새노조는 다른 한 명도 시차를 두고 인사 조치를 할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이에 새노조가 관련 내용을 전하며 고대영 사장이 ‘사드 보도지침’으로 방송법을 위반했다는 성명을 내자, 성명서가 나온 경위를 조사하겠다며 해설위원들에 대한 특별감사에 착수한 것이다.

회사 측은 “고대영 사장은 (위의 예와 같은) 구체적인 내용의 발언을 한 바 없다. 다만 외교적 맥락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는 취지의 언급을 했을 뿐이며, 이는 KBS 사장으로서 할 수 있는 원론적인 언급이다. 또한 사장은 방송 편성의 최종 책임자인 만큼 방송법 위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라고 <시사IN>에 밝혔다. 성재호 새노조 위원장은 “핵심은 사장이 왜 회의에서 부적절한 이야기를 했느냐는 것이다. 사장의 발언은 사드와 관련해 편파적인 보도지침을 내린 것이나 다름없다”라고 말했다.


ⓒ시사IN 신선영 KBS 1TV <뉴스9>의 사드 관련 보도 모습(맨 위). 언론노조 KBS본부(새노조) 성재호 위원장(위).


고대영 사장 발언 당일인 7월11일 KBS <뉴스9>는 ‘이슈&뉴스’에서 중국의 위협을 세 꼭지로 다뤘다. 중국 일부 매체가 과민 반응하고 있고, 이미 중국은 사드를 능가하는 레이더 체계를 갖추고 있으며, 중국의 경제 보복은 과장된 측면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8월4일 KBS <뉴스9>는 ‘이슈&뉴스’에서 중국 관영매체가 연일 한국 정부를 때리는 것을 비판하며 “중국은 우선 북핵 문제 해결에 집중해야 한다”라고 보도했다.

같은 시기 또 다른 ‘보복 인사’ 논란도 불거졌다. 7월13일 <기자협회보> 기고를 통해 이정현 전 청와대 홍보수석의 보도 개입에 침묵하는 KBS를 비판한 정연욱 기자는 이틀 뒤인 7월15일 오후 돌연 KBS 제주총국으로 발령이 났다.

회사 옹호하는 ‘충성파’ 기자들도 등장

기수별 비판 성명이 이어지자 회사가 아니라 동료, 선배들이 대응에 나섰다. 7월18일 KBS 보도본부 국·부장단 일동은 “외부 매체에 황당한 논리로 회사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기고를 하고서 아무런 일이 없기를 바라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까?”라는 내용을 보도 정보 게시판에 올렸다. 이들 대다수는 지난 3월 실명으로 결성한 ‘KBS 기자협회의 정상화를 촉구하는 모임’ 소속이다. 이 모임은 정지환 보도국장, 최재현 정치외교부장 등 보도본부 핵심 보직자들과 KBS <뉴스9> 진행자 황상무 앵커, 최문종 앵커 등 일부 기자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했다. 111명으로 출범해 현재 130여 명으로 늘었다. KBS 보도국 구성원 모두 가입된 KBS 기자협회의 집행부가 정치적으로 편향되었다고 이들은 주장한다. 정상화 모임으로 불리는 이 모임이 생기면서 보도국 기자들 사이에 ‘균열’이 생겼다. 한 KBS 기자는 “얼굴 맞대고 일하는 동료들이지만 마음은 강 건너에 있다는 걸 공개적으로 천명한 셈이다. 내부적으로 갈등이 심한 걸 넘어서 서로를 포기하는 단계로 갔다가 ‘정상화’ 모임 이후엔 정말 안 좋은 상황이라는 느낌을 서로들 많이 받고 있다”라고 말했다.


ⓒKBS 화면 갈무리


KBS 노동조합과 언론노조 KBS본부(새노조)는 힘을 합쳐 길환영 전 KBS 사장 해임을 이끌어냈다. 김시곤 전 보도국장의 길환영 전 사장 보도 개입 폭로가 발단이었다. 하지만 결국 고대영 사장 체제의 KBS에서도 보도 개입 논란이 일고 있다. 게다가 정상화 모임이 생기면서 기자들 사이에 한목소리를 내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성재호 새노조 위원장은 “고대영 사장이 들어올 때부터 예견된 일이다. 외압에 버틸 장치를 만들려면 방송법 개정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방송법 개정은 멀고, 당장 매일 기사 발제는 발등에 떨어진다. 한 KBS 기자는 “애초에 사측 지휘부 뜻에 거스르는 발제가 잘 나오지 않는다. 어느 순간부터 발제해도 안 되니까 포기하게 되는 단계다. 부당한 아이템 지시를 거부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틀린 기사는 쓰지 말자, 덜 나쁜 기사를 쓰자, 이렇게 꾸역꾸역 버티는 기자들이 많이 있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전혜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wo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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