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모순의 연속이다. 불꽃같던 다짐이 어느새 흔적도 없이 증발하는가 하면, 굳건히 붙들고 있던 토대가 와르르 무너지는 일, 다들 몇 번은 겪어봤을 것이다. 얼마 전에도 이런 비슷한 일을 경험했다. 사건의 발단은 바로 인터파크 고객 정보 유출이었다.

처음 정보를 접한 건 페이스북을 통해서였다. 인터파크 사이트에 로그인해보니, 아뿔싸, 당연히 내 모든 정보가 누군가의 손아귀로 넘겨진 다음이었다. 분노가 일었지만 잠시 추스르고 사과문을 쭉 읽어봤다. 이건 뭐, 그냥 다음과 같은 얘기인데, 공손한 척한 것에 불과했다. “쏘리. 미안해. 하지만 뭔가 보상은 없어.” 어디 이뿐일까. 이 문장 뒤에는 아마 괄호가 쳐져 있고, 이런 글이 쓰여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넌 어차피 피치 못할 이유로 우리를 사용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과연 그랬다. 즐겨찾기에서 삭제하고 난 뒤 이틀 정도 지나서였을 것이다. 아침에 출근한 뒤 화장실로 직행해 작은 평화를 누리며 페이스북을 쭉 보는데, 포스팅 하나가 눈에 확 띄는 게 아닌가. “신해철의 〈정글 스토리〉 인터파크 독점 700장 한정 판매.” 재미있는 건 이 포스팅의 주인공도 나와 같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는 거다. “하필이면 인터파크야.”

최근 재발매된 신해철의 <정글 스토리>.

어쩔 수 없었다. 배순탁이 누구인가. 자타가 공인하는 신해철빠 아닌가. 중학생 때부터 신해철에 푹 빠졌고,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동지들을 모아 신해철교를 창시했으며, 대학에 입학해서는 주변에 전도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던, 그런 역사를 지닌 나였다. 갑자기 집에 있는 〈정글 스토리〉의 CD 상태가 눈에 밟히기 시작했다. 1996년에 샀으니 올해로 딱 20년째. 스크래치가 그리 많은데도 여전히 플레이되는 걸 보면, 기적이다 싶었다. 그러나 기적이라는 건 언젠가는 반드시 끝이 나는 법. 언제 튈지 모르는 CD를 새것으로 바꾸기로 마음먹고 인터파크에 로그인한 뒤에 주문 버튼을 눌렀다. CD는 정확히 하루 만에 도착해 지금 내 CD장에 꽂혀 있다.

새 CD로 감상해도 〈정글 스토리〉의 감동은 여전했다. 천의무봉한 김세황의 기타가 첫 곡 ‘Main theme from Jungle Story, part 1’에서 울려 퍼지고 나면, 산울림의 원곡을 파괴적으로 해석한 ‘내 마음은 황무지’가 강렬하게 터져 나왔고, 처절하기 이를 데 없는 ‘절망에 관하여’는 전주만으로도 다시금 나를 압도했다. 예전에도 느꼈지만 〈정글 스토리〉는 넥스트(N.EX.T)의 디스코그래피를 넘어 1990년대 전체를 통틀어 돋보이는 걸작이 아닐까 싶은 만듦새였다.

권력과 불화하며 시대와 공명한 신해철

어쩔 수 없이 다시, 신해철을 떠올려봤다. 그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던 날, 나는 새벽 내내 그의 음악을 틀어놓고 펑펑 울었다. 그런데 나만 이런 게 아니었다. 그의 장례식에 길게 늘어선 조문 행렬이 증명했듯이 그는 각각의 팬들은 물론이요, 시대 전체와 공명한 아티스트였다. 이제는 신해철처럼 때로는 당대와 불화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유명인을 찾기가 어려운 세상이 되어버렸다. 정치처럼 나랏님이나 하는 ‘큰일’에 관해서는 마땅히 입 다물고 있어야 저 고결하신 대중에게 찍히지 않고 계속 밥벌이를 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잠깐 논점을 벗어났다. 여하튼, 하나의 인생을 하나의 도덕성으로 재단할 수는 없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앞으로도 꾸준히 인터파크를 멀리할 테고, 삼성을 비판할 테지만, 이런 특수한 경우라면 별수 없이 인터파크에 로그인할 것이고, 아이폰 체계에 영 익숙하지 않기에 갤럭시 노트를 쓸 것이다. 세상은 이렇게 어쩔 수 없는 일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부끄럽거나 두려워할 일이 아니다. 다만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어떻게든 이걸 최소화하려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과연, 이 세계는 제목 그대로 〈정글 스토리〉와도 같은 게 아닌가 싶다. 수록곡 ‘그저 걷고 있는 거지’의 가사처럼 말이다.

“가끔씩은 굴러 떨어지기도 하겠지만 중요한 건 난 아직 이렇게 걷고 있어.”

기자명 배순탁 (음악평론가·〈배철수의 음악캠프〉 작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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