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김연철 인제대 교수가 펴낸 〈협상의 전략-세계를 바꾼 협상의 힘〉(휴머니스트)을 읽었다. 갈등을 타결하고 협력과 평화를 가져온 세계적 협상 사례 20가지를 심도 있게 다룬 인상적인 책이다. 이들 중 필자의 주목을 끄는 사례는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와 관련한 협상 분석이다.

쿠바 미사일 위기는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사건이다. 소련이 미국의 앞마당이라 할 수 있는 쿠바에 핵미사일을 배치하려 하자 미국 케네디 대통령은 이에 맞서 핵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자세로 모스크바에 압박을 가했다. 결국 소련은 미국의 압박에 굴복해 쿠바의 핵미사일을 철수했다는 것이 세간에 알려진 사건의 개요다. 그러나 실제로는 미국의 일방적 압박 때문이 아니라, 케네디 대통령이 소련과의 비밀협상을 통해 터키와 이탈리아 남부에 배치된 미군의 주피터 핵미사일 철수와 소련 핵미사일의 쿠바 철수를 맞교환함으로써 위기를 종식시킬 수 있었다.

 

 

▲ ⓒAP Photo

1960년 9월20일 쿠바의 카스트로(가운데)가 유엔총회 기간중 뉴욕의 데레사 호텔에서 리키타 흐루시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오른쪽)과 회담하던 모습. 왼쪽은 라울 로아 쿠바 외무장관.

 

김연철 교수는 쿠바 미사일 위기의 사례 분석을 통해 여섯 가지 협상 관련 명제를 도출해내고 있다. 첫째, 전문가를 믿지 말라. 둘째, 위기 시에도 열린 토론을 통해 대안을 만들라. 셋째, 긴장이 높아지면 사건이 일어난다. 넷째, 벼랑 끝에서 협상을 준비하라. 다섯째, 내부 강경파를 협상의 수단으로 활용하라. 마지막으로 신뢰는 협상의 조건이 아니라 결과다. 아주 예리한 관찰이다.

김 교수의 이러한 명제들을 박근혜 정부의 대북 정책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케네디 대통령은 취임 직후인 1961년 4월 중앙정보국(CIA)이 계획한 카스트로 제거 비밀공작 ‘피그만 침공’을 재가하지만 처참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카스트로 체제를 과소평가한 결과였다. 오히려 소련 핵미사일의 쿠바 배치라는 악재를 가져왔다. 이렇듯 쿠바 미사일 위기는 CIA의 오판에서 말미암은 것이었다.

요즘 우리 정보기관과 일부 북한 전문가들은 이구동성으로 제재와 압박의 효력, 고위급 인사 탈북 사례, 그리고 북한 내부의 동요 등을 부각하면서 북한 붕괴론을 키워왔다. 박근혜 정부의 대북 강경책도 이런 전문가 견해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그럴수록 북한의 체제 내 구성은 강화되고 핵, 미사일 위협은 증폭되고 있다. 이러다 쿠바 위기와 같은 걷잡을 수 없는 국면이 초래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까지 든다. 정보기관·전문가에 대한 맹신의 오류를 피해야 하는 이유다.

위기일수록 ‘열린 토론을 통해 대안을 만들라’는 명제 또한 현 정부에 주는 함의가 크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케네디 대통령이 군부 강경파 의견을 수용해 선제공격을 감행했다면 핵전쟁이라는 대재앙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를 막아내고 비밀협상이라는 대안을 마련해주었던 것은 바로 열린 토론이었다. 우리는 어떤가? 개성공단 폐쇄와 사드 사태가 보여주듯이 그런 토론은 없고 대통령의 일방적 결정만 보인다. 이러한 위기관리 시스템 아래서는 다양한 대안이 나올 수 없다.

지금 남북관계는 벼랑 끝에 와 있다

케네디 대통령이 소련과 비밀협상을 전개한 가장 큰 이유는 일촉즉발의 군사 긴장 때문이었다. 1962년 10월27일 위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같은 날 미군 U2기가 소련 영공을 침범해 소련의 미그기가 발진하는가 하면 쿠바 상공에서 정찰 중이던 U2기는 아예 소련군에 격추당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소련 핵잠수함에 대한 미국 해군의 경고용 폭뢰 투하로 소련군은 핵무기 사용 바로 직전까지 갔다. 이런 벼랑 끝 상황에서 소련과 비밀협상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강 대 강’ 대결 구도가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데도 우리 정부는 심각한 위기의식이 없어 보인다. 이는 사드 배치로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을 관리해나갈 수 있다는 정부의 발상을 보면 명백해진다. 지금 남북관계는 벼랑 끝에 와 있다. 서둘러 협상에 나서야 한다.

‘신뢰는 협상의 조건이 아니라 결과’라는 명제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국과 소련은 전제조건 없는 비밀협상을 통해 위기를 타개하고 직통전화 개설 등 신뢰 구축의 새로운 계기를 마련한 바 있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대북 정책의 기조로 삼으면서도 이미 존재하고 있던 남북한 대화 통로와 신뢰 기반까지 무너뜨렸다. 그 이유는 신뢰를 협상의 조건으로 인식해왔기 때문이다. 신뢰와 진정성을 먼저 보여야 대화와 협상에 임하겠다는 것은 북한의 항복을 받겠다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이제라도 서로 대화해서 작은 것이라도 하나씩 합의를 이룰 때 진짜 신뢰가 가능해진다는 역사의 교훈을 되새겨야 한다.

기자명 문정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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