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은 구제불능이라는 결론이 났다. 이제 공화당 의원 후보들은 각자도생할 수밖에 없다.” 최근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대선 후보로 선출된 이후에도 갖가지 망언과 과격한 주장을 퍼부어 지지율이 급락하고 있는 도널트 트럼프를 두고 토머스 데이비스 전 연방 하원의원이 <뉴욕 타임스>에 밝힌 말이다. 실제로 트럼프의 대선 가도에 심각한 경고등이 켜지면서 공화당의 베테랑 선거 전략가들이 대선 패배 시 대안 마련에 돌입했다. <뉴욕 타임스>를 비롯한 주요 언론에 따르면, 공화당 전략가들은 오는 11월8일 함께 시행되는 대통령 선거와 총선 가운데 후자(총선)에 초점을 맞추는 쪽으로 선거 전략을 재편하고 있다. 당선이 위태로운 현역 공화당 의원들은 이미 트럼프를 피하기 시작했고 당 주류 인사들도 지지를 철회하며 대거 이탈 중이다.

그간 트럼프의 좌충우돌 행보에 안절부절못하던 공화당 인사들이 자당 대선 후보를 사실상 포기하고 의회 선거에 집중하기로 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트럼프가 대선 후보로 확정된 이후에도 망언과 망동을 멈추지 않아 더 이상 대선 승리를 기대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공화당 전체를 몰락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뉴욕 타임스> 8월7일자에 따르면, 대선에서 힐러리 클린턴이 승리할 가능성이 무려 83%에 이른다.

ⓒEPA 도널드 트럼프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오른쪽)는 “계속 이겨온 상황에서 갑자기 선거 전략을 바꾸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라고 말했다.

이런 불리한 상황에서도, 트럼프의 거친 행태는 여전하다. 그는 당 핵심 중진이자 2008년 공화당 대선 후보였던 존 매케인 상원의원, 2012년 공화당 부통령 후보를 지낸 폴 라이언 하원의장, 경합 지역인 뉴햄프셔 주의 켈리 아요테 상원의원 등을 지지하지 않겠다고 했다가 비난이 폭주하자 며칠 만에 철회했다. 특히 그는 2004년 이라크 전쟁에 미군으로 참전했다가 전사한 무슬림 병사 후마윤 칸의 유가족을 폄하하는 발언을 하면서 거센 비판에 직면했다. 심지어 8월9일 연설에서는 클린턴 후보에 대한 저격을 은근히 부추겼다는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대선에서 클린턴이 승리하는 경우, 총기 소유를 허용한 미국 수정헌법 제2조가 폐지될 수 있지만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라고 말한 뒤 “수정헌법 지지자들이 있긴 하지만”이라고 말을 흐린 것이다. 여기서 ‘수정헌법 지지자’는 총기 소유자들을 의미한다. 민주당의 진보 성향 의원인 엘리자베스 워런은 즉각 “트럼프가 클린턴 살해 협박을 한 것이다”라고 비난했다.

이 같은 트럼프의 막무가내식 행태에 공화당의 대표적 온건파인 수전 콜린스 상원의원이 트럼프를 지지하지 않겠다고 공개 선언했다. 지금까지 트럼프를 거부한 공화당 상원의원은 6명에 달한다. 심지어 일부 공화당 의원들은 트럼프 거부에 그치지 않고 공개적으로 클린턴 지지를 표명했다. 리처드 한나 하원의원, 미시간 주 전 지사 윌리엄 밀리컨, 뉴햄프셔 주 전 상원의원 고든 험프리 등이 ‘클린턴에게 투표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뿐 아니다. 레이건 전 대통령의 대변인 출신 더그 엘멧, 핵심 참모였던 프랭크 레빈에 이어 부시 행정부 시절 공보국장을 지낸 리즐리 웨스틴 등도 클린턴 지지를 표명했다. 마이클 헤이든 전 중앙정보국장, 존 니그로폰테 전 국무부 부장관 등 공화당 소속으로 안보 관련 고위직을 역임한 50인이 “트럼프는 역사상 가장 무모한 대통령이 될 것이다”라는 합동 공개서한을 발표하기도 했다.

ⓒAP Photo 트럼프를 지지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공화당 소속 수전 콜린스 상원의원

공화당 상·하원 현역 의원들은 자구책 마련에 나섰다. 대표적인 경합 주인 펜실베이니아 주의 패트릭 투미 상원의원은 “올 선거에서 유권자들이 대권 후보와 상원 후보를 구별해  투표할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을 지지하는 유권자들에게 대선 후보로는 트럼프가 아닌 클린턴을 사실상 권유한 것이다. 또 다른 경합 지역인 위스콘신 주의 론 존슨 상원의원과 아이오와 주의 데이비드 영 상원의원 등은 최근 트럼프가 유세차 들렀을 때 현장에 나가보지도 않았다. 콜로라도 주의 마이크 코프먼 하원의원은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면 그와 맞서 싸우겠다는 공약을 담은 TV 광고를 내보내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공화당 선거 전략가들은 막대한 후원 조직들의 자금 지원을 받아 공화당의 전통 가치와 정강을 집중 부각시키는 광고를 내보낼 예정이라고 알려졌다. ‘진짜 공화당’은 트럼프의 망언으로 빛이 바랜 지금의 공화당과 다르다는 메시지를 발송하겠다는 의도다.

경합 주 공화당 현역 의원들도 당선 힘들어져

공화당 현역 의원들의 이 같은 반란은 트럼프의 망동으로 오하이오·플로리다·펜실베이니아 등 경합 주에서 당선이 극히 불투명해졌기 때문이다. 8월9일자 <월스트리트 저널>과 NBC 뉴스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경합 주에서 클린턴은 4~9%포인트 차이로 트럼프를 앞지르고 있다. 더욱이 이들 경합 주는 모두, 트럼프의 주된 지지층인 백인 노동자가 많은 지역이다.

클린턴을 지지한다고 밝힌 같은 당의 리처드 한나 하원의원

2012년 공화당 대선 후보 밋 롬니의 대변인을 지낸 라이언 윌리엄스는 “대선 지원 유세는 일선 선거 참모진이 전부 동원돼 상·하원 선거 유세와 공동으로 진행하는데 지금 트럼프 측의 일선 선거 지원 활동은 아예 없다. 그 때문에 공화당 후보들이 대통령 지원 유세와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뛰고 있다”라고 밝혔다. 특히 트럼프가 나중에 철회하긴 했지만 당 핵심인 매케인 상원의원, 아요테 상원의원 등에 대해 지지하지 않겠다는 등의 모욕적 언사를 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현역 후보들은 트럼프를 적극 피한다는 게 윌리엄스의 주장이다. 하지만 당 선거자금 태반이 당 대선 후보를 위해 경합 주의 텔레비전 광고비용 등으로 충당되는 마당에 대선 후보의 지원 유세 없이 이들 현역 후보들이 클린턴의 막강한 유세 지원을 받는 민주당 후보들을 꺾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경합 주의 민주당 후보들은 클린턴의 지지율 상승 덕분에 당선 가능성이 커졌다며 매우 고무돼 있다. CBS 보도에 따르면, 클린턴 대선본부는 막대한 비용을 들여 공화당 아성인 펜실베이니아 주에 선거 사무실을 무려 18개나 개설했다. 콜로라도 주에도 지난 선거 때보다 많은 사무실을 열었다.

트럼프는 지지율 하락과 공화당 주류 인사들의 추가 이탈을 막기 위해 최근 법인세 인하와 육아비 전액 소득공제 등을 골자로 한 경제 공약을 부랴부랴 발표하는 등 이미지 쇄신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런 임시방편이 얼마나 통할지 미국 언론들도 의문을 제기한다. 실제로 트럼프는 8월9일 ‘폭스 비즈니스 네트워크(FBN)’와 한 인터뷰에서 “지금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내 기질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계속 이겨온 상황에서 갑자기 선거 전략을 바꾸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라고 말했다. 막가파식 ‘마이웨이’ 선거운동 방식을 고수하겠다는 의미다. 공화당 상·하원 후보들의 한숨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

기자명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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